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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3년 1월  12일 오후 8시 10분경 종로경찰서의 서쪽 창문으로 폭탄이 날아들었습니다. 유리창이 산산조각 나고 일경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기자 등 10여명이 다쳤습니다.


  17일 경성 삼판통(지금의 서울 용산구 후암동) 은신처에 숨어있다가 그를 체포하려는 일경과 총격전을 벌여 4명을 사상케 했습니다.


  22일 새벽 종로구 효제동 일대에서 일경 수백명과 3시간 넘게 대치하며 16명에게 총상을 입혔습니다.


  그의 몸에도 10발의 총탄이 박혔습니다. 그러나 그의 목숨을 끊은 것은 그가 자신의 머리에 쏜 한 발의 총알이었습니다.


  김상옥 의거. 그의 나이 34세.


  동아일보는 김 의사 의거를 두 차례에 걸쳐 상세히 보도했습니다.  






1923년 1월 14일자 3면. 파손된 종로서 사진과 함께 피해자 등 사건의 상보.


  종로경찰서에 폭탄투척


  12일밤 8시 종로서 서편창에


  폭탄을 던지어 큰소리를 내고 폭발




  12일밤 8시 10분에 종로경찰서에 폭발탄을 던지었다. 8시 10분에 종로서 서편 동일당 간판점 모퉁이 길에서 어떤 사람이 경찰서 서창을 향하여 폭탄 한개를 던지었는데 큰 소리를 내며 폭발하였더라.




  서편창을 파괴한 폭탄 파편이 행인 5명을 상해 


  폭탄이 파열되매 종로네거리는 물론 부근 일대에는 졸지에 큰 소동이 일어난 것은 물론이요 경찰서에 있는 숙직경관들은 대경실색하여 일변 활동을 개시하며 일변 조사에 착수하였는데 경찰서의 손해는 서편으로 난 유리창 두엇이 깨어졌으며 폭탄이 터질 때에 마침 동일당 골목으로 지나가던 행인 5명은 폭탄의 파편에 다치어 부상하였다더라.




  부상자는 경찰서에


  남자 다섯사람은 매일신보 사원 


  (사진) 폭탄에 맞은 현장. (상) ×가 터진곳 (하)×는 깨어진 유리창 








 
1920년대 종로서(동아일보 자료사진)






  김 의사가 폭탄을 던진 경성 종로경찰서는 당시 조선 민중에게 ‘원한의 표적’이었습니다.


  효제동 총격사건 직후 일제 경무국은 이 사건의 보도를 금지시켜 두 달 후인 1923년 3월 15일에야 해제했습니다.


  동아일보는 호외를 발행해 김 의사가 종로서에 폭탄을 던지고 일경과 총격전을 벌이다 자결, 순국한 사건의 전모를 다음과 같이 세상에 알렸습니다.  






1923년 3월 15일자 호외 1면


  총살의 因으로 총살의 果를 結한


  계해 벽두의 대사건 진상


  주모자 김상옥이 피살된 이후


  연계자 8명은 피착되야 기소




  지난 1월 17일 새벽에 경성 시내 삼판통 304번지 고봉근의 집에서 경관의 포위를 당하고 육혈포로써 대항하여 종로서의 전촌(田村)형사를 총살하고 기타의 매전(梅田), 금뢰(今瀨) 양 경부를 중상케하고 도주한 사건이 생긴 이래 그 달 22일 새벽에 시내 효제동 72번지에 잠복하여있는 범인을 수백의 경관이 에워싸고 잡으려하다가 마침내 범인을 총살한 사건에 대하여는 사건 발생 당시부터 당국의 게재금지 명령이 엄혹하여 이때까지 그 자세한 진상을 보도할 자유가 없었더니 금 15일 오전에 총독부 경무국에서 그 사건에 대한 게재 금지를 해제하였기로 본사에서 신속히 보도하기 위하여 즉시 호외를 발행하는 바이라.(15일 정오)




  피살자는 김상옥


  연루자 8명은 이미 기소


  1월 7일 새벽에 시내 삼판통에서 전촌형사를 총살하고 그달 22일에 시내 효제동에서 순사대의 총을 맞아 죽은 사건의 범인은 경성부 창신동 487번지에서 철물상을 하던 김상옥이오 그가 죽은후 그와 한가지 일을 하던 동지는 모두 경찰의 손에 잡히어 이미 경성지방법원검사국에서 심리를 마치고 관계자중 8명은 지난 13일에 기소되었더라.


  총독 암살을 계획중


  삼판통 집에서 포위를 당하여


  김상옥은 일산 방면으로 입경


  세상에서 전하기는 김상옥이 가원산편으로 국경방면을 넘어서 경성으로 들어왔다는 말이 있으나 경찰당국의 말은 김상옥은 12월 상순경에 육혈포 몇자루와 폭발탄 몇개를 가지고 압록강의 얼음을 타고 국경을 건너서 몇십리를 걸어서오다가 평안북도 경의선 모정거장에서 차를 타고오다가 경의선 일산역에서 내리어 걸어서 경성까지 들어왔다하며 경성에 들어온 후에는 일즉이 친하던 모모 친구의 집에 유숙하며 기회를 기다리는 그때부터 경찰당국에서는 이 계획을 탐지하고 각처에 수색이 심함으로 한곳에 오래 머물러있지 못하고 혹이일씩 혹삼일씩 각처로 돌아다니며 유숙하다가 1월 12일 저녁에 종로경찰서에 폭발탄이 터진 이후로 시내의 수색이 더욱 엄중하매 1월 13일 저녁에 남대문밖 삼판통 자기 누이의 집인 304번지 고봉근의 집에 가서 유숙하였는데 원래 모험을 하는 사람이라 누이의 집에서라도 자기의 본색을 말하면 재우지 아니할까 염려함인지 시골서 피물장사를 하다가 왔노라 말하고 잠복하여있으며 동경의회에 건너가는 재등총독을 암살코자 때때로 남대문정거장에 배회하다가 총독이 떠나던날 즉 1월 17일 새벽에 종로경찰서에서는 그의 잠복한 것을 탐지하고 형사중에 가장 날랜 형사 14명을 뽑아서 전부 육혈포를 가지고 고봉근의 집을 철통같이 포위하고 잡으려하였더라.




  삼판통 충돌의 찰나


  전촌형사를 죽이고 피신


  그러나 대문이 걸리었음으로 형사들은 담을 넘어가서 그가 자는 건넌방문을 열려하니 그는 문을 걸고 잠그고 문을 열라고 여러번 재촉하였으나 아무 대답이 없어서 형사들은 수각이 황망한중 종로경찰서에 유도 2단이요 날래기로 유명한 전촌장칠이가 앞장을 서서 문을 잡아 낙구치니 벼락같이 문이 떨어지자 김상옥은 어느틈에 예비하였던지 나는 새같이 전촌의 목에 총을 놓고 달아나려하매 종로경찰서 금뢰 경부가 붙잡으려하니 역시 그에게 총을 놓아 거꾸러뜨리고 또 동대문경찰서 매전 경부보가 뒤로 붙잡으매 어깨에 총을 놓아 넘어뜨리고 급히 도망하니 이 사이가 실로 수분간이라 육혈포를 가지고섰던 형사들도 잠시 어찌할줄을 모르고 놓쳤더라.




  설중의 남산 포위


  경찰대는 각처로 활동개시


  김상옥의 친족은 모두 인치


  김상옥을 잃은 형사는 즉시 호각을 불어 중대범인을 놓친 경호를 자조하며 즉시 각 경찰서 정복 순사 1천여 명을 풀어 그가 도망한 남산을 나는 새도 빠지지 못하게 에워싸고 눈 쌓인 남산 전부를 수색하고 일변 수백명 경관은 왕십리 일대와 광희정 일대를 수색하며 기마 순사가 총검을 번쩍이며 삼판통 일대를 경계하니 실로 금시에 경성 시내 일대는 전시상태와 같았으며 일면 김상옥의 누이와 고봉근과 그 친족까지 전부 경기도 경찰부로 인치하였더라.




  폭탄사건과의 관계는


  아직 판명되지 안했다고


  김상옥의 사건은 별항에 기록한 바와 같거니와 이에 대하여 경무국 산구 고등과장은 말하되 사건이 발생한지는 이미 오래이나 그동안에 신문의 기재를 금지한 것은 범인을 수색하는 관계상에 장애가 있음으로 지금까지 발표를 못하였습니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범인이라면 김상옥인지 아닌지는 아직까지 판명치 못하였으나 초심에는 김상옥이가 던진듯한 행적이 있었으나 김상옥이는 이미 사망한 까닭에 확실한 증거를 발견치 못하였다고 말하더라.   






  김상옥 의사의 의거 보도에 대한 창간기자 김동성, 김동철의 회고.




  “이런 민족 정신 아래 이따금 직접 행동의 사명을 띠고 돌아온 애국열사의 행적에 관한 기사가 한번 보도되면 일반 동포에게의 큰 자극은 물론 신문기자의 정신상의 양식도 되었다. 그때 일본 경찰을 전율케한 김상옥 의사의 총독암살사건을 한 예로 들려한다. 김상옥 의사는 상해에서 파견되었다. 동시에 상해 주재의 일본 경찰은 김상옥의 본국 잠입을 통보하여 서울 경찰은 아연 긴장했다. 김 의사는 본래 동대문밖 큰 길거리에 본집이 있어 오전 2시에 2층에서 취침한 모친을 찾아뵈었다. 놀랍고 반가운 노친은 경찰이 찾으니 얼른 해외로 나가라고 명령했다. 김 의사는 그리운 모친을 잠시 뵙고 자기 매씨의 삼판통 집에 숨었다. 거기는 정거장이 가깝고 마침 재등총독이 일본 갔다가 오는 날짜를 고대하여 정거장의 출영 군중에 싸여 권총을 난사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경찰은 김 의사의 친척집을 수색하다가 삼판통 집에 잠복함을 발견하고 상오 5시경에 형사대가 습격했다. 몇시간만 있으면 재등총독이 남문역에 도착하게될 날짜였다. 형사 하나가 방문을 흔드니 김 의사는 벌써 알아채고 두발길로 문을 걷어차니 형사는 나동그라졌다. 곧 나가면서 권총을 발사한즉 그집을 포위한 형사대는 모두 땅에 엎드리어 감히 고개를 못들었다. 김 의사는 맨발 그대로 남산으로 올라가 성을 넘어 장춘단으로 내려갔다. 그날 아침에 형사대는 성밑 눈위에 발자국을 발견했다. 장춘단에서 내려오다가 구멍가게를 일찌기 여는 데가 있어 짚신 한쌍을 사서 신고 북악바위 속에서 이틀동안 숨었다가 동지 이혜수 집에 와서 숨었다. 그 집은 연지동 채전에 5, 6호 새로 건축한 집으로 채전 가운데 성과 같이 따로 섰다. 경찰은 탐지하고 하나가 그집에 들어가서 병풍을 젖히고 벽장문을 열었다. 김 의사는 벽장안에 서적을 쌓고 그뒤에 있다가 권총을 쏘니 형사의 어깨를 스칠 뿐이었다. 그 형사는 밖으로 도망했으나 형사대는 포위했다. 김 의사는 손톱으로 벽을 뚫고 오전 5시경에 이웃집으로 뛰어나갔다. 그 집주인은 5시경에 기침하여 변소에 가는 습관이다. 김 의사를 보고 어디로 가라는 주인 음성을 포위한 형사가 듣고 김 의사가 나온 것을 알았다. 주인의 나가라는 재촉은 심하고 갈 곳은 없어 김 의사는 그 집 변소로 들어갔다. 그 변소는 밖에서 판장틈으로 보이는 곳이다. 형사는 김 의사가 변소에 들어가는 것을 목격하고 엽총을 발사하여 김 의사 발에 명중되었다. 이렇게 부상이 되니 탈출할 희망이 없어졌다. 김 의사는 권총을 자기 이마에 대고 방아쇠를 눌러 애처롭게 사명을 달성못하고 영웅의 최종을 고했다. 아침에 신문사에서 전화가 있어 나는 인력거를 타고 연지동 경신학교 구내에 달려가니 형사대 40~50명은 엽총과 몽둥이를 든 무장한 그대로 상부의 명령을 기다리고 둘러섰다. 그 가운데 김상옥의 시체는 거적에 덮였었다.” (김동성, 동아일보 1962년 4월 11일자 4면)






  “또 한가지 내 맘에 입혀지지 않는 일은 세상을 흔들던 김상옥 열사가 참살되었을 때의 일이다. 김 열사는 지금 ‘메디칼 센터’자리 훈련원에서 나와 함께 축구를 해왔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이였다. 나는 김 열사의 비보를 받고 지금 동대문밖 이대부속병원 근처에 있던 그의 본가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의 집에는 이미 그의 식구들까지 모조리 왜경에 끌려가고 집에는 왜경 3명이 집을 지키며 오는 사람들을 심문하고 있었다. 나는 기자라는 신분 덕에 별다른 고생을 겪지 않고 지금 연건동 효제초등학교 근처 김 열사가 사살된 현장으로 달려갔다. 나는 역시 기자의 신분을 힘입어 김 열사의 시체를 볼 수 있었다. 그 참상이란 전신이 수를 헤일 수 없는 총탄을 맞은 김 열사는 차마 목불인견(目不忍見)이었다.” (김동철, ‘구우회고실<舊友回顧室>’, 동우<東友>, 1963년 10월호 10~11쪽)






  동아일보는 김 의사 사후에도 그의 독립정신을 집요하게 보도했으나 일제의 탄압도 극심했습니다. 사건 1년 뒤, 1924년 4월 8일자에는 한식(寒食)날 김 의사의 묘소에서 그의 어머니가 통곡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과 ‘죽으러 왜 왔더냐’는 제하의 기사를 실었지만 일제가 신문 배포를 금지하는 ‘차압’ 처분을 내려 독자들은 이 기사를 보지 못했습니다.






1924년 4월 8일자 2면 


‘죽으러 왜 왔드냐/묘전에 통곡하는 김상옥의 친모’


한식(寒食)의 애수를 따라서(2)  




 


  6일 오후에는 먼지이는 동대문밖을 걸어 떡점거리에 가서 북편으로 꺾이어 구불구불한 길을 얼마나 지나가면 리문안 공동묘지가 나선다. 산길을 한참 올라가면 이곳에는 단신으로 수천 경관과 엿세 동안을 싸워 일시 경성 천지를 진동하던 일대의 모험아 김상옥이가 말없이 누워있는 곳이다.


  한식이 되었다고 넓으나 넓은 공동묘지에는 사람이 뒤덮혀 울고불고 야단들이다. 어버이를 부르는 자식의 울음, 남편을 부르는 소복한 과부의 울음, 이 울음중에 우리 일행은 무슨 연고로 김상옥의 산소를 찾았는가? 김상옥의 부인의 인도로 수많은 무덤을 지나가는데 문득 눈에 띄이는 것은


  원적 조선경성×××


  주소 상해 법조계 애인리


  라고 쓴 목비가 보인다. 이것만 보고 언뜻 기자는 이것이 김상옥의 산소로구나 하고 다시 본즉 한편에 ‘김순경(金淳慶)의 묘’라 썼다. 이것도 역시 김상옥과 같이 상해와 조선간을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에 열중하다가 고초에 못견디어 죽으면서 나는 죽어도 혼은 상해에 가서 일할 터이니 묘목에 주소를 상해로 써달라고 하였다 한다. 두어걸음 더 지나가니 묘표도 없는 무덤 하나 있다. 김상옥의 부인은 “이 산소가 그 산소이야요. 소생 남매가 있어서 남에게 고공사리를 하여 그것들을 가르치느라고 산소에 올 사이도 없고 묘표도 세우지 못하여 부끄럽습니다.”


  옆에 섰던 김상옥의 모친은 “삼형제 아들이 이제는 독신이 되었습니다. 맏아들은 병으로 죽고 둘째가 상옥인데 너무 잘나서 그랬는지 못나서 그랬는지 그 일로만 상성을 하다가 그만 그 지경이 되었습니다. 죽던 해에도 몇 해 만에 집이라고 와서 제 집에를 들어앉지도 못하고 거리로만 다니다가 죽었습니다. 밥 한그릇 국 한그릇을 못해 먹이고 그렇게 죽은 생각을 하면….”  


  눈물이 쏟아지며 털썩 앉더니 목을 놓아 울며 “에그, 왜 왔더냐! 죽으려 왜 왔더냐! 거기 있으면 생이별이나 할 것을…왜 와서 영 이별이 되었느냐!”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사설을 하며 운다.






  1927년 4월 20일자에는 김 의사 가족이 생활이 어려워 집을 경매처분당한 사연도 후속 보도했습니다.




1927년 4월 20일자 2면

 


  김상옥 일사(一死)후 쇠잔한 그 가정


  김상옥 죽은 뒤 영락하기 짝이 없는 식구


  불쌍한 열 네 명 그동안 한 몸에 매여 달려


  암담한 일가의 장래 


  위로 칠십노모와 과부 형수 두사람을 비롯하여 상시하솔(上侍下率) 열세식구를 다리고 장구한 시일에 가진 애를 다쓰다가 필경은 사정에 없는 채권자에게 살던 집을 빼앗기고 길거리에 나앉게된 사람이 있다.


  피려는 꽃바람에 춘흥을 가득 실은 자동차가 서울을 거리거리에 기세좋게 다니건마는 불행한 이 가정을 위하여 동정의 시선을 던지는 이는 없는 모양이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에 폭탄과 권총을 가지고 들어왔다가 무수한 경관의 포위를 받아 효제동에서 최후를 마친 김상옥의 아우 김춘원씨가 불행의 주인공이니 그가 지금 많은 식구를 업고 안고 거리에서 울지않을 수 없게 된 경로를 들으면 다음과 같다.


  김상옥이가 남다른 최후를 마친 후로부터 그 가정의 책임은 전부 그의 동생인 전기 김춘원씨가 가지게되는 동시에 김상옥이 경영하던 창신동 487번지 대장간까지 김춘원씨가 경영하게 되었다. 그러나 원체 많은 식구에 혼자 힘이라 도저히 살아갈수가 없었음으로 지금으로부터 3년 전에 그 가족이 살고있는 전기 창신동 487번지 가옥을 시내 통의동 74번지 광명사라는 곳에 일금 5천원을 내어쓰고 저당을 잡혔었다. 혼자 힘으로 벌어서 열네식구의 입에 풀칠을 하기도 어렵거든 이 차용금을 갚을 희망은커녕 이자도 넣을 힘이 없어서 지금까지 그대로 지나왔다한다.


  이리하여 달이 가고 해가 오는 동안에 살림은 점점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경영하는 일까지 뜻과 같이 되지 아니하자 이것을 본 전기 광명사에서는 더 참을 수가 없다하여 할수없이 이 가옥을 경매에 부치기로 하고 재판소에 수속을 하였음으로 김춘원씨는 백방으로 주선을 하여 사내원동에 거주하는 로판이란 일본인에게 그 집을 6천3백원에 팔기로 하고 광명사에는 5천5백원만 갚기로 약속한 후 나머지 8백원으로 의지할 집간이나 장만하고저 주선을 하였다 한다. 그러나 그 가옥이 김상옥의 장자 김태용군의 명의로 있는 관계상 미성년이라하여 재판소 등기가 얼른 나지 않겠다 하여 전기 로판이란 일본인은 매수하기를 거절하고 재판소에서 경매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단 5천원에 낙찰을 시켰다고 한다.


  일이 이렇게 되매 김춘원씨는 집한간이라도 장만할 예산이던 8백원을 잃어버리게 되고 광명사에서 이자폭으로 받자던 5백원을 잃어버리게 되었으나 오직 전기 로판이가 이틈에 1천3백원의 리를 보게 되었다 한다. 이리하여 전기 가옥은 로판의 소유가 되었는데 그는 그래도 갈곳없는 열네식구에게 동정이 생기었던지 현금 50원을 내어놓으면서 삭월세를 얻어가지고 재작 18일까지에 집을 내어놓으라고 하였다 한다. 김춘원씨는 애걸복걸하여 22일까지 겨우 연기를 하게 되었으나 빈손을 들고 갈곳이 없어서 어쩔줄을 모르고 헤매는 중이라 한다.  






  동아일보는 김 의사의 아들 태용 군을 특채했습니다. 




  “슬하에 아들 태용(泰用, 1914~1939)과 딸 의정(義正, 1917~1958) 남매를 두었으나 태용은 동아일보에 특채되어 근무하던 중 후사 없이 25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고 딸 의정은 김진익(金振益)과 결혼, 슬하에 아들 세원(世源)을 두었으니 그가 유일한 외손자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아들 태용이 요절했지만 다행히 7명의 조카들이 있어 입양으로 대를 있게 됐다.”(‘김상옥 의사’, 백산서당, 2003년, 321쪽)








 
                                      김상옥 의사(동아일보 자료사진)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김상옥(金相玉,永振)  


  서울 사람이다.


  20세 때 동흥야학교(東興夜學校)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전개하면서 이전부터 종사하던 철물공장을 설립하여 이윤을 분배하였던 그는 또 이종소(李鍾韶)·임용호(任龍鎬)·손정도(孫貞道) 등과 사회계몽·민족독립에 대한 일을 의논하고 실행하였다. 그리하여 백영사(白英社)를 조직하고 금주·단연운동을 크게 전개하며 말총모자공장을 설치하고 국산모자의 생산·보급에 힘쓰기도 하였다.


  그는 3·1독립운동이 일어남과 함께 윤익중(尹益重)·신화수(申華秀)·정설교(鄭卨敎) 등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인 혁신단(革新團)을 조직하고 기관지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배포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그리고 1920년 봄에는 만주에서 들어온 군정서원(軍政署員) 김동순(金東淳)과 만나 암살단을 조직하여 적 기관을 파괴하고 요인을 암살하는 등의 직접 행동으로 독립운동을 타개해 나갈 것을 계획하였다. 그해 8월에는 미국 의원단 일행이 서울에 들어오는 기회를 이용하여 한우석(韓禹錫) 등과 함께 의원단이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에 하차하기를 기다려 시위와 총격전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의원단의 서울 도착 전날에 일부 동지들이 피체됨에 따라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일제 경찰의 수사망을 피하여 그해 10월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김 구(金九)·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지도와 소개로 중국의 지사들과 교유하면서 조국독립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1921년 일시 귀국하여 군자금 모집과 정탐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다시 1922년 겨울 의열단원으로 폭탄·권총·실탄 등의 무기를 휴대하고 동지 안홍한(安弘翰)·오복영(吳福泳) 등과 함께 서울에 잠입하였다. 이때 그는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을 통하여 서울에 있던 의열단원 김 한(金翰)과의 연락 협력을 당부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동지들에게 연락하며 거사의 기회를 노리다가 이듬해 1월 12일 밤 종료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였으며, 이후 일경을 피해 10여일간 은신하다가 1월 22일 일본 경찰과 교전 끝에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순국 후 1924년 상해 임시정부 외교부장 조소앙(趙素昻)은 전(傳)을 지어 간행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2 Comments »

  1. 존경하는 김상옥의사 동영상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보신 분들은 왜 이런 분을 우리가 모르고 있었느냐고들 하십니다.
    저의블로그에 오셔서 보셔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Comment by 윤덕호 — 2013/02/16 @ 11:37 오후

  2. “서울시가전의 용장 김상옥의사” 가 KBS TV제작국 요청으로
    “1: 1000의 독립전쟁”으로 제목이 바뀌어 11월17일 순국선열의 날 행사전
    오전 10시 방영됨을 알려 드립니다 제블로그에서 예고 동영상을 볼수 있습니다
    http://blog.daum.net/56dhyoon/15847228

    Comment by 윤덕호 — 2014/11/15 @ 11:4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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