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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 60 : 김일성 회고록 속 동아일보

Posted by 신이 On 11월 - 30 - 2010

  “노발대발한 총독부 당국은 <동아일보>에 정간처분을 내리고 그 관계자를 구금하였다. 우리는 그 소식을 듣고 손기정의 경기 성과와 일장기말소사건을 소개하는 강연을 하였다. 우리 부대의 모든 대원들은 강연을 듣고 <동아일보> 편집 집단이 취한 애국애족적인 립장과 용단에 열렬한 지지와 련대성을 보내였다.” (5권 56쪽)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의 한 대목입니다.


 1992년 4월~1998년 6월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에서 발간한 8권의 김일성 회고록에는 동아일보가 19번 나옵니다. 세 번은 1, 2, 3권의 앞부분 사진물 중 동아일보 기사 사진을 게재한 것이고 열여섯 번은 본문 속에 나오는데 동아일보를 나쁘게 언급한 대목은 없지만 부정확한 부분이 많습니다.


  1권(1912.4~1930.5월의 기록)


  1) 앞부분 사진집에 도산 안창호와 그의 강연회 참가자 체포사건을 소개한 동아일보 1927년 2월 23일자 2면 수록.  











  ‘도산 안창호와 그의 강연회 참가자 체포사건을 소개한<동아일보>’ (1927년 3일 22일부) – 2월 23일자의 착오( 편집자 주)






1927년 2월 23일자 2면






  백여명(百餘名)은 강연회장포위(講演會場包圍)


  백여명은 각처(各處) 주택수색(住宅搜索)


  군경(軍警)을 출동(出動)식힌 길림당국(吉林當局)의 처사


  안창호(安昌浩)씨 외 이백명 동포를 검거




  작년 여름이래 금년 정초까지 전에 없던 대사건이 뒤를 이어 발생하였고 각처로 들어오는 정보는 더욱 불온하여 이동경찰(移動警察)을 기차에 탑승시키어 여객을 일일이 취조하며 통신기관까지 엄밀히 검열하여 실로 물샐틈없이 경계를 하든 중이었으나 만주(滿洲)를 근거로한 ○○단의 활동은 금년 정초부터 더욱 심하다는 정보와 각처의 수령들이 길림을 중심으로 집합하여 모모 협의를 한다는 등 정보가 만주에 있는 총독부탐정기관으로부터 들어오자 삼월일일도 임박한때라 총독부에서는 경무국장대리를 보는 국우(國友)경무과장이 얼마전에 신의주(新義州)로 출장하여 평북 부영(富永)경찰부장을 대동하고 봉천(奉天)으로 향하더니 며칠이 아니 되어 길림(吉林)에 체류 중이던 안창호(安昌浩)씨 이하 재류동포 약 200여명이 중국관헌에게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모처로부터 도착되었다.






  부녀아동을 일시감금


  안창호씨가 등단하자 돌연 포위체포


  ○○회 주최 강연회 석상




  이제 체포되었던 전후사실의 개강을 듣건대 지난 2월 24일 저녁 만주 길림성 대동문(滿洲 吉林省 大東門)밖 대동공사(大東公司)안에서 재류동포단체 길성○○회(吉城 ○○會)주최로 큰 강연회가 개최되어 연사 안창호(安昌浩)씨가 등단하여 강연할때에 140여명의 중국순경과 헌병이 당내당외를 포위하고 부인과 15세이하의 아동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다른 장소로 잠시 감금하고 연사 안창호(安昌浩) 씨 이하 남자 130여명만 포박하여 길림경찰서에 검속하고 동시에 일백수십명의 순경대는 재류동포들의 주택을 일제히 수색하여 서류를 압수하고 다시 40여명을 체포하여 전후 두차례에 200명을 검속하였더라.






  2) “나도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비밀련락을 자주 다녔다. 언제인가는 포평주재소에 갇힌 애국자들에게 옷과 음식을 차입해준 적도 있다. 내가 제일 많이 다닌 집은 우편물 위탁소였다. 아버지는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와 같은 신문 잡지들을 비롯하여 조선에서 발간되는 출판물들을 그 집에서 가져 오라고 하였다. 그 때 아버지는 형권 삼촌의 이름으로 <동아일보> 지국을 맡아 보았는데 수입은 따로 없었지만 신문은 그저 얻어 볼 수 있었다.” (65~66쪽)






  김일성의 삼촌 김형권의 이름으로 동아일보 지국을 했다면 1920~1923년 아니면 1925~1926년 사이인데 사사(社史)의 지국장 명단에 김형권 또는 김형직이란 이름은 없습니다. 사료의 미비이거나 지국장의 명의인은 아니면서 지국 일을 한 것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현재의 만경대)에서 3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지주 집안의 묘지기였다고 하는데(김일성, ‘세기와 더불어 1, 2’, 조선로동당출판사, 1992, 8쪽) 태어날 때 이름은 김성주(金成柱)였다…감옥에서 나온 김형직은 만주로 이주하여 한의원을 개업하였고 김일성도 1919년 어머니, 동생 철주와 함께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그가 조선에서 교육받기를 원했기 때문에 1923년 다시 평양에 돌아와 외가가 있는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 하리에서 창덕학교에 다녔다. 김일성이 창덕학교에서 다시 부모가 있는 만주로 건너간 것은 13세 때인 1925년이었다. 아버지 김형직의 위독한 병세로 만주로 건너간 것이다. 만주로 건너간 그는 무송에서 1년간 소학교 생활을 마치고 1926년 3월 화성의숙에 입학하였다. 여기서 숙장 최동오와의 만남은 뒤에 북한으로 망명한 그의 아들 최덕신과의 만남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1926년 6월 아버지 김형직이 3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자 그는 화성의숙을 나왔다.” (이종석, ‘새로 쓴 현대 북한의 이해’, 역사비평사, 2000, 397~398쪽)






  3) “내가 조국으로 돌아온 그 해(1923년)는 평양지방에 전염병까지 퍼지어 시민들이 모진 고통을 겪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홍수의 피해를 입은 온 도시가 형용하기 어려운 곤란을 당하였다. <동아일보>는 그 해 홍수로 인한 참상을 전하면서 평양시내 총호수의 절반에 달하는 1만여호의 집들이 물에 잠겼다고 하였다.” (90쪽)






1923년 8월 6일자 3면







  평양부내(平壤府內) 가(家)의 옥도괴류실(屋倒壞流失) 칠천호(七千戶)


  개인의 손해만 칠백만원가량


  군부의 도괴류실(倒壞流失)은 약 팔분(八分)




  평양 수해 참상에 대하여는 그간 보도한 바어니와 그 손해액은 아직 확실히 알 수가 없으나 평양부내에만 개인(個人)의 손해가 약 700만원이나 될 모양이며 도내 각처의 침수 가옥과 무너진 가옥의 통계는 지난 3일 오전 10시까지 조사된 것이 아래와 같더라.


평양부 침수 가옥 10,440호…(후략)






  4) “우리가 항일무장투쟁을 할 때에는 유격대에 여장군들이 많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그런 여성이 조선에는 없었다. 고보시절에 수놓이나 재봉 같은 것만 배우던 책상물림의 녀자들인데 그처럼 용감하고 담력이 있었다. 한때 <동아일보>나 <조선일보>같은 신문들이 리관린을 두고 굉장히 떠들었다.” (184~190쪽)






  김일성 회고록 1권 ‘독립군의 녀걸 리관린’ 184~198쪽에 따르면 리관린(리장청, 1997~1985년)은


– 초기에는 오동진이 조직한 광제청년단에서 총무로 활동하였고


– 만주로 건너가기 전에 벌서 고향에서 일본경관 두 놈을 권총으로 쏴죽이고 압록강 얼음구멍에 쳐넣어 세상을 놀래운 적도 있으며


– 독립군에 입대한 후 그가 국내에 자연모연공작을 나왔다가 경찰에게 걸려들어 조사를 당한 적이 있었다. 리관린이 이고 가는 보퉁이 속에 권총이 들어있었으므로 정황은 아주 위급하였다. 경찰은 그 보따리를 자꾸 풀라고 하였다. 리관린은 보따리를 푸는 척하다가 재빨리 권총을 뽑아들고 경찰을 수림 속에 끌고 들어가서 처단해버렸다.


– 3.1 인민봉기 후 남만에서는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 사업이 활발히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모든 단체들이 저마다 다른 파를 무시하고 자기파를 내세우면서 본위주의를 하기 때문에 통합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통합을 위한 논의는 매번 무의미한 입씨름과 마찰로 공회전을 하였다. 아버지는 통합운동이 직면하고 있는 이런 난관을 타개하기 위하여 이 사업에 독립운동의 원로들을 인입하려고 결심하였는데 그 첫 대상으로 지목된 사람이 량기탁이었다. 적의 감시 속에 있는 량기탁을 서울로부터 남만주까지 안내해온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였다. 아버지는 심중히 생각하던 끝에 그 적임자로 리관린을 선전하고 량기탁에게 보내는 편지를 주어 그를 서울로 파견하였다…(중략)…리관린이 하도 뻗대자 한 달 만에 놈들은 그를 놓아주었다. 그는 운신조차 할 수 없는 몸이었으나 기어이 량기탁을 데리고 흥경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양기탁(梁起鐸)은 동아일보 창간 당시 편집감독으로 창간호 1면의 ‘知아 否아?’(아는가 모르는가?)가 그의 명의로 게재됐습니다. 그는 1927년 1월 ‘조선혁명자후원회’를 발기했는데 리관린은 발기인 92명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동아일보 1927년 1월 28일자 2면


  창립총회는 3월 3일 조선○○자 후원회


  남만청총(南滿靑總), 정의부, 노동당 관계자


  양기탁(梁起鐸) 씨 외 90명 발기




  재 만주 조선인 ○○단체의 남만청총(南滿靑總), 정의부(正義府), 노동당(勞動黨)에서는 책임자 양기탁(梁起鐸), 현정경(玄正卿), 김(金)울이가 외 90여명이 작년 12월 7일 길림성 반석(盤石) 모처에 모여 조선○○자 후원회(朝鮮○○者 後援會)를 발기하고 즉석에서 동회 창립과 기타 제반사항을 의결한 후 창립위원으로는 김상덕(金尙德), 고활신(高豁信), 박근조(朴根祖), 송한석(宋寒石) 외 1명을 선정하고 창립총회는 오는 3월 3일 모처에서 열기로 결정하였다 하며 이 발기인중에는 방금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 사건으로 방금 신의주 경찰서에 체포되어 있는 송헌(宋憲) 씨도 들어있다 하며 그 회에서는 자못 격렬한 문구로 장문의 발기문을 발표하였는데 대체의 의미는 즉 ○○○○○○○○○○○○○ 민족운동을 하다가 방금 조선 내지에 체포 수감되어 있는 수많은 동지와 그들의 유족으로서 방금 무참한 비경에 빠지어 애통하는 동포를 직접으로나 간접으로나 또는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동정과 후원을 아끼지 말자는 등 의미를 특기하고 전기 양기탁 이외 91명의 명의로 각처에 이 뜻을 통달케 하였다더라. (신의주)






  5) “1927년 2월 길림의 교포사회는 전례 없는 환영 일색으로 들끓었다. 상해임시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독립운동의 원로 안창호 선생이 베이징을 거쳐 길림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길림의 교포들은 안창호를 국가수반 못지않게 성대히 영접하였다. 우리도 ≪거국가≫를 부르며 그를 진심으로 환영하였다. ≪거국가≫란 안창호가 외국으로 망명할 때 조국을 하직하면서 지은 노래이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라는 구절로 시작되어 ≪나 간다고 설워말아 나의 사랑 한반도야≫라는 구절로 끝나는 이 ≪거국가≫는 ≪한일합병≫후 청년학생들 속에서 특별히 애창되었다. 망명가들이 많이 부르는 노래라고 하여 한때는 ≪망명자의 노래≫라고도 하였다. 조선 사람들은 ≪거국가≫를 사랑하듯이 ≪거국가≫의 창작가인 안창호에 대해서도 굉장히 존경하고 숭배하였다. 안창호의 인품과 실력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대통영감≫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 표현은 크게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임시정부를 시답지 않게 보는 독립군 단체의 지도자들까지도 안창호 개인에 대해서는 ≪독립운동의 선배≫라고 하면서 떠받들었다. 안창호의 금새를 잘 알고 있은 이등박문이 한때 그를 자기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일본의 정책에 대한 지지를 조건부로 도산(안창호의 호)내각을 세워주겠다는 흥정까지 했다는 사실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동아일보≫, ≪조선일보≫를 비롯한 조국의 신문들은 안창호의 길림도착소식을 대서특필하였다.…” (285~300쪽)






  동아일보 1927년 1월 28일자 2면


  창립총회는 3월 3일 조선○○자 후원회


  남만청총(南滿靑總), 정의부, 노동당 관계자


  양기탁(梁起鐸) 씨 외 90명 발기




  재 만주 조선인 ○○단체의 남만청총(南滿靑總), 정의부(正義府), 노동당(勞動黨)에서는 책임자 양기탁(梁起鐸), 현정경(玄正卿), 김(金)울이가 외 90여명이 작년 12월 7일 길림성 반석(盤石) 모처에 모여 조선○○자 후원회(朝鮮○○者 後援會)를 발기하고 즉석에서 동회 창립과 기타 제반사항을 의결한 후 창립위원으로는 김상덕(金尙德), 고활신(高豁信), 박근조(朴根祖), 송한석(宋寒石) 외 1명을 선정하고 창립총회는 오는 3월 3일 모처에서 열기로 결정하였다 하며 이 발기인중에는 방금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 사건으로 방금 신의주 경찰서에 체포되어 있는 송헌(宋憲) 씨도 들어있다 하며 그 회에서는 자못 격렬한 문구로 장문의 발기문을 발표하였는데 대체의 의미는 즉 ○○○○○○○○○○○○○ 민족운동을 하다가 방금 조선 내지에 체포 수감되어 있는 수많은 동지와 그들의 유족으로서 방금 무참한 비경에 빠지어 애통하는 동포를 직접으로나 간접으로나 또는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동정과 후원을 아끼지 말자는 등 의미를 특기하고 전기 양기탁 이외 91명의 명의로 각처에 이 뜻을 통달케 하였다더라. (신의주)






  5) “1927년 2월 길림의 교포사회는 전례 없는 환영 일색으로 들끓었다. 상해임시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독립운동의 원로 안창호 선생이 베이징을 거쳐 길림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길림의 교포들은 안창호를 국가수반 못지않게 성대히 영접하였다. 우리도 ≪거국가≫를 부르며 그를 진심으로 환영하였다. ≪거국가≫란 안창호가 외국으로 망명할 때 조국을 하직하면서 지은 노래이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라는 구절로 시작되어 ≪나 간다고 설워말아 나의 사랑 한반도야≫라는 구절로 끝나는 이 ≪거국가≫는 ≪한일합병≫후 청년학생들 속에서 특별히 애창되었다. 망명가들이 많이 부르는 노래라고 하여 한때는 ≪망명자의 노래≫라고도 하였다. 조선 사람들은 ≪거국가≫를 사랑하듯이 ≪거국가≫의 창작가인 안창호에 대해서도 굉장히 존경하고 숭배하였다. 안창호의 인품과 실력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대통영감≫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 표현은 크게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임시정부를 시답지 않게 보는 독립군 단체의 지도자들까지도 안창호 개인에 대해서는 ≪독립운동의 선배≫라고 하면서 떠받들었다. 안창호의 금새를 잘 알고 있은 이등박문이 한때 그를 자기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일본의 정책에 대한 지지를 조건부로 도산(안창호의 호)내각을 세워주겠다는 흥정까지 했다는 사실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동아일보≫, ≪조선일보≫를 비롯한 조국의 신문들은 안창호의 길림도착소식을 대서특필하였다.…” (285~300쪽) 






  김일성 회고록은 1권 285~300쪽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에 대해 장황하게 기술하며 그 해 3월 가진 길림강연회에서 아래와 같은 일이 있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나(김일성)는 강연을 듣다못해 더 참지 못하고 안창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종이에 써서 들이대였다.


– 산업과 교육을 진흥시켜 조선민족의 실력을 배양해야 한다고 했는데 나라를 일제 놈들에게 통채로 빼앗긴 조건에서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 우리 민족을 정신 수양이 낮은 민족이라고 했는데 어떤 점이 그러한가?


– 연사가 말하는 열강이란 미국이나 영국 같은 나라들인데 과연 우리가 그들을 본받아야 하는가? 또 우리가 그들의 ≪원조≫에 의해서 독립을 가져올 수 있는가?




  질문 쪽지는 앞에 앉은 학생들과 사회자를 거쳐 안창호에게 전달되었다. 반발심에 못 이겨 단호하게 서면질문을 들이대기는 하였으나 막상 사회자가 불안한 표정으로 학생들이 앉아있는 쪽을 주시하는 모습을 보게 되니 사실 그때의 내 심정은 복잡하였다. 그 질문 때문에 강연 중에 있는 연사가 불쾌한 자극을 받게 된다면 안창호를 숭배하고 있은 독립운동자들과 수백 명의 청중들에게 큰 실망을 주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생기였다. 안창호의 강연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게 되면 그의 강연을 위해 남다른 성의를 보인 오동진도 서면질문의 장본인인 나를 고깝게 생각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런 결과는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안창호에게 서면질문을 들이댄 것은 그가 우리의 질문을 받고 잠간만이라도 자기의 주장을 검토하여 민족의 자존심과 자주정신에 배치되는 유해로운 사상을 그 이상 더 먹이지 말았으면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독립운동의 대선배로 존경받는 안창호에게서 그가 청중에게 채 말하지 않은 독립운동의 새로운 지침이나 방략을 듣고 싶은 욕망을 억누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태는 내가 예상한 것보다 크게 번지였다.




  안창호는 쪽지의 글을 한참동안 내려다보고나서 사회자에게 무엇인가 몇 마디 물었다. 후날 손정도에게서 말을 들으니 그날 안창호는 사회자에게 질문쪽지에 김성주라는 서명이 있는데 그런 사람을 아는가고 물었다고 한다. 그처럼 도도한 기상을 가지고 장내를 쥐락펴락하던 안창호의 연설이 그만 김이 빠져버리었다. 안창호는 조금 전까지 일사천리로 펼쳐나가던 강연을 성급하게 마무리 짓고 연탁 앞에서 황황히 물러섰다. 연사는 매우 심각하게 질문을 받아들인 것 같았다. 좀 자극이나 받으라고 그런 질문을 했는데 안창호자신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고 강연을 중도에서 스스로 포기해버린 것이었다. 실망한 청중은 도산 선생이 왜 갑자기 저렇게 주접이 드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출입문 쪽으로 밀려나갔다. 그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길림독군서에서 수백 명의 헌병과 경찰을 동원해가지고 강연회장에 불시에 달려들어 30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체포했던 것이다. 연사인 안창호는 물론, 현묵관, 김리대, 이관린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자들이 한꺼번에 무리로 붙잡혀 경찰청에 구금되었다. 






  그러나 이명영 교수는 ‘김일성 회고록의 진실과 허구’, 신동아 1992년 7월호 351쪽에서 다음과 같은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소설적 상상력을 짜내어 김(金)의 경력을 창작하는데 경탄을 넘어서 고소를 금치 못하게 하는 것으로는 안창호와의 대결이라는 장면이다. 안(安)이 1927년 2월에 길림에 와서 민족운동의 장래를 놓고 대강연회를 연 일이 있다. 당시 그의 나이 만 49세였다. 그때 15세의 김일성이 안(安)의 고루한 민족주의 노선을 반박하는 질의서를 내자 안(安)은 답변이 궁해 어쩔 줄을 몰랐다는 것이다. 1968년 ‘전기’의 기술이다. 회고록에서는 질의서를 받자 안(安)은 강연을 중단하고 말았다고 기술을 바꿔 놓았다.  안(安)의 강연이 중단된 것은 김(金)의 질의서 때문이 아니라 중국 경찰이 들이닥쳤기 때문이었다. 조선총독부 경찰이 길림정권에 강연회를 공산주의자들의 집회라고 모략했던 것이다. 안(安)을 비롯해서 숱한 사람이 잡혔다. 이 소식을 듣고 상해(上海)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단체들이 들고 일어나서 결국은 모두 석방되었다.”






  2권(1930.5~1933. 2월의 기록)


  6) 앞부분 사진집에 ‘나의 체포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 1931년 3월 26일자’ 수록. 







‘나의 체포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 (1931년 3월 26일부)






  그러나 김일성 회고록은 위 동아일보 기사 중 ‘리종락(李鍾洛)의 부하’란 글자를 지웠습니다.






1931년 3월 26일자 2면






  조선○○군


  남녀 삼명 피착(被捉)


  길림성 이통현(二通縣)에서 잡혀


  무기도 압수되었다




  (장춘) 근일에 길림성이통현(吉林省伊通縣) 중국공안국(中國公安局)손에 조선○○군(朝鮮○○軍) 리종락(李鍾洛)의 부하 3명이 피착되어 방금 엄중한 취조를 받는중이라는데 그 사실을 탐문한 바에 의하면 전기 피착된 3명중에 여자 한명이 있다하며 그들은 전기 이통현 고유수(伊通縣 孤揄樹)라는 동포가 거류하는 촌에 잠입하여 모 계획을 하든 중이던 바 그만 전기 중국공안국에서 탐지한 바 되어 공안국에서는 국원 6명을 시켜서 그들의 잠입처소를 수색하야 체포하는 동시에 무기도 압수하였다는데 그들의 씨명은 아래와 같다고 한다.


김일성(金一成) 최득영(崔得英) 류봉화(女子) 






  “오가자 일대는 50여명의 무장대원을 거느린 이종락의 길흑(吉黑)농민동맹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이 동맹의 목적은 반제운동이었고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ㅌ ㄷ운동이라 했다. 최 등 청년들이 여기에 망라되어 있었다. 김은 이종락의 무장대원으로서 1929년 11월과 1930년 11월에 오가자에 와서 농민동맹 관련 일을 했다. 당시는 그가 본명대로 김성주로 불리울 때인데 최(형우)가 김성주에게 일성(一星)이란 호를 지어 주었다.” (이명영<李命英> 성균관대 정치학 교수, ‘김일성 회고록의 진실과 허구’, 신동아 1992년 7월호 348~349쪽) 






  “김일성은 육문중학생이던 1929년 5월에 공산주의 청년들에게 포섭되어 그들 서클조직에 가담했다가 발각되어 길림을 떠나 당시 좌경 청년들의 의지처였던 이종락 부대를 찾아 그 대원이 되었다. 계급은 참사였다. 권총을 얻어 차고 고유수 카륜 오가자 등지를 다니면서 길흑농민동맹 일도 보고 각 부락의 군사세포원들과 같이 반동분자 소탕에도 열을 올리고 다녔다. 이종락 부대는 1931년초에 이(李)가 체포되자 와해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고록은 사실을 완전히 뒤바꿔놓고 있다.” (위 책 354쪽)






  “육문중학시절인 1929년 가을에 김일성은 반일활동협의로 중국 군벌당국에 체포되어 생애 처음으로 수개월동안 감옥살이를 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학교에서 퇴학당하였다. 김일성은 1930년 봄에 감옥을 나오자 길림성 소재 카륜 고유수 지방에서 급진 청년들이 다수 모여 있던 이종락이 이끄는 국민부 계통의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 대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즈음 그는 반일운동가들이 으레 그렇듯이 변명(變名)을 가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김일성(金日成)이었다. 그러나 1931년 초 조선혁명군이 붕괴되자 곧 동만(東滿 간도지방)으로 이동하여 공산청년동맹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이때 1국1당주의 원칙에 따라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종석, 새로 쓴 현대북한의 이해, 399쪽)






  동아일보는 1931년 5월 4일자 2면에 후속 기사를 게재했는데 ‘이종락(李鍾洛) 부하’가 제목으로 뽑혀있습니다.






1931년 5월 4일자 2면






  이종락(李鍾洛) 부하


  3名이 피체


  이통현 공안국에 잡히어서


  길림성 정부로 호송


  (장춘전보) 조선○○군(朝鮮○○軍) 리종락(李鍾洛)의 부하 김일성(金一成) 최득영(崔得永) 류봉화(劉鳳和) 등 3명은 수일전 길림성이통현(伊通縣) 중국공안국의 손에 체포되어 엄중한 취조를 받은 후 길림성정부로 호송되었다.






  7) “나는 그 때(1930년 6월) 카륜에 가서 진명학교 교원들인 류영선과 장소봉의 집에 숙소를 정하였다. 장소봉은 진명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편 <동아일보> 지국장의 일도 겸하여 보았다…장소봉은 조선혁명군이 조직된 후 무기를 구입하려고 장춘에 나갔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전향하였다. 한 때는 나에 대한 귀순공작에도 동원되었다고 한다.” (36쪽)






  김일성 회고록은 장소봉이 “ 진명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편 <동아일보> 지국장의 일도 겸하여 보았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장소봉(張小峰)이 동아일보 지국장이나 지국 기자를 했다는 기록은 없고 동아일보 1929년 3월 25일자 3면에 ‘죽으러가는 馬賊’(수필), 1929년 10월 31일자 4면에 ‘鄕愁’(시), 1930년 3월 25일자 4면에 ‘人間鳥瞰’(시) 라는 작품이 실려 있습니다.




  장소봉은 김일성 회고록의 기술처럼 일제 경찰에 체포돼 일제의 앞잡이가 됐는데 이강훈 전 광복회장의 ‘마적과 왜적’ (인물연구소, 1990, 207~209쪽)에 아래와 같은 기술이 있습니다.






  밀정 장소봉의 반역행위


  일시적일망정 국내 각지에서는 무고한 중국인들에게 피해를 입혀 민족으로서 씻지 못할 죄를 짓고 만주 각지, 특히 오지에서는 죄 없는 한인들이 격앙한 토민들에게 참살을 당하는 등의 가혹한 변을 겪었다. 이는 당시 중동철도 연선(沿線)에서 필자가 듣고 본 사실인데 마치 1923년 9월에 일본 동경에서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이 다만 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일본인 소위 자경단원에게 학살을 당한 것처럼 이번에는 그보다 숫자는 적으나 역시 학살하는 이유는 마찬가지였다.




  당시 조선일보에는 다음과 같은 호외가 발행되었다.






조선일보 1931년 7월 4일자 2면






  “중국 관민 8백여 명과 2백 명의 동포와 충돌하여 불상사를 냈다. 중국 경관대 교전 급보 장춘 일본 주둔군 출동 준비 삼성보에 풍운급 중국 기마대 6백 명 출동 급박한 동포 안위” 등등 이러한 선동적 기사가 게재되고, 이를 읽는 본국 내 서울 평양 인천 의주 등 몇 곳에서는 격앙한 군중이 중국인을 학살하고 무죄한 중국인의 가옥이며 상점을 불 지르고 파괴하는 등 광태를 부려 씻지 못할 민족적 죄를 지었다. 이를 본 일본 경찰은 전력을 다해서 제지할 태세를 취하지 않고 말막음으로 말리는 듯 거진 방관적 태도였다. 이 용서할 수 없는 만행, 순치 관계에 있으며 공동의 적을 가진 중국 인민 대중에게 박해를 주는 행동 이것은 사실 우리 민중 자의에서 빚어진 만행이 아니고, 침략자 일제 무리들이 중국인과 우리 민족과 서로 적대시하게 하여 어리(漁利)를 얻으려는 교활한 간지에서 빚어진 인위적 불상사였다. 검은 손에 악용당한 몰지각한 자들의 소행이나 같은 핏줄이 켕겨지는 자들이 범하였으니 어찌하리요. 다만 중국 인민 대중에게 민족의 이름으로 사죄할 따름이다. 그리하여 해외에서는 독립 운동 기관을 통하고, 국내에서는 민족지인 동아일보를 비롯하여 각계각층이 내외에 성명하기를 이번의 불상사는 침략 일제 무리들의 음모에서 빚어진 부산물이라는 사실을 표현하여 수억의 중국 인민 대중의 이해와 관량(寬諒)을 촉구하고, 안으로는 몰지각한 자들의 경거망동을 규탄하였다.




  본건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당시 조선일보 장춘지국장 김이삼(金利三)이 있어서 그 밑에 장소봉(張小峰)이란 자가 붙어 있었는데, 그는 일본 영사관의 밀정이었던 사실이 나중에야 알게 되었고, 김이삼은 그것까지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일제 무리는 만보산에서의 한중 농민의 대립을 기화로 이를 대륙 침략의 구실로 이용하려고, 또는 한 중 양 민족의 이간도 시킬 것을 겸하는 술책도 곁들여서 이상에 실은 원고를 작성해서 밀정 장소봉을 시켜서 김이삼 조선일보 장춘지국장으로 하여금 본사에 발송하였던 것이다. 김이삼은 1930년 1월 하순 북만 중동선 산시참(역) 김좌진 장군 댁을 찾아와서 장군이 피해된 전말과 모든 정황을 직접 현지에 와서 잘 파악하고 정확 신속한 제보를 하였기에 본사에서 호평과 신용을 얻었으며, 여기서 상기 원고를 아무 고려 없이 그대로 호외로 발표하여 세간의 물의를 어머어마하게 일으켰던 것이다. 당시 필자는 백야(白冶) 김좌진 장군의 사회장의위원회의 대변인으로서 김이삼을 맞아하여 송진우 동아일보 사장이 보낸 거액의 부의금을 접수하고 하루 밤을 같이 지세면서 여러 가지로 의견을 교환한 사실이 있었는데, 당시 그는 26세의 청년으로 필자의 본적지 인제 화천인으로, 선량한 엘리트로 보였었다. 그 뒤 필자는 구강포 동신학교에서 교무를 담당하고 있을 무렵, 어제까지도 열친(熱親)하게 지내던 이웃 중국 학교의 교원들까지 만보산사건 발생해 국내에서 무고한 중국인 박해사건이 보도되자, 우리를 사갈시(蛇蝎視)하고 서로 인사말도 하려하지 않았었다. (만보산사건에 대해서는 후술할 예정)




  다음해 9.18 사건이 일어나 일제의 침략군이 하르빈까지 점령하고, 아직 중동선 연안까지에는 침략군의 세력이 미치지 않고 있을 시기 필자가 있던 다음다음 화차참(정거장) 부근 동포농장에 거류하는 이청천 처소에서 임시 체류 중인 전 임시정부 국무령이었던 홍진 선생의 소개로 이종영(李鍾榮)이란 신사의 내방을 받고 하루 밤을 학교 숙소에서 지새는 동안에 그는 말하기를 김이삼을 자기가 죽였다고 자랑삼아 하는 말을 듣고 그저 서운한 마음으로 듣고만 있었다. 그 뒤 다음에 필자는 만주를 탈출하여 상해로 가던 도중 봉천 동아일보 지국장 전학현(田鶴鉉)씨의 신세를 지면서 상해로 탈출할 때까지 2개월 동안 내외의 정세를 파악할 절호한 시기였다. 여기서 김이삼은 기자의 입장으로 일본인을 접촉은 하였으나, 절대 이적행위를 범할 인물이 아니라는 것, 그 밑에 있던 장소봉의 소행으로 일본 영사관의 돈 6천원을 얻어먹고 적이 작성한 원고를 지국장의 이름으로 본사로 발송하였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그 뒤 세월이 흘러 50년이 지난 오늘 당시 만보산사건의 전말이며 이미 언급한바 토지조차(土地租借) 관계 등을 상세히 알고 있는 신뢰할 수 있는 산 증인이 한 분 현재 건존한데 그에게서도 역시 김이삼은 조선일보사에 보낸 물의를 일으켰던 원고 발송한 죄책은 없고, 장소봉의 소행이라는 것을 거듭 들어 알게 되었다. 김이삼을 자기가 죽였다고 자랑하던 자는 거세소공지(擧世所共知 · 세상사람이 다 아는)인 일본의 고등밀정이었다. 그 자는 몇 년 전에 횡사하였다 한다.”






  8) “나는 오가자에서 반제청년동맹위원장이며 ≪농우≫의 주필이었던 최일천의 집에서도 몇 주일씩 유숙하였다. 그 당시에는 그를 최천, 최찬선이라고도 불렀다.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에 찍혀진 최형우라는 이름은 해방 직후 서울에서 저술사업을 할 때 사용한 그의 필명이다. 오가자에서는 그가 제일 개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김혁 처럼 시는 짓지 않았지만 뛰어난 산문가의 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의 권유로 여러 해 동안 장춘에 나가 비밀공작원활동을 하면서 ≪동아일보≫ 지국장의 일을 맡아보았다. 그 과정에 우리에 대한 자료도 많이 수집하고 좋은 글을 써서 투고도 자주 하였다. 최일천은 일본 정보계통이 주목하는 ≪요시찰인≫이었다. 그가 맡아보는 ≪동아일보≫ 지국의 출입문 밖에는 매일같이 일본 헌병들과 밀정들이 와서 그를 감시하느라고 당번을 섰다. 적들이 최일천을 주목하게 된 것은 그가 장춘에 나와서도 청년들과의 사업을 계속하였기 때문이며 국내 애국인사들과의 밀접한 연계밑에 우리에 대한 선전을 많이 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동만에서 무장투쟁을 시작한 다음 그는 반제청년동맹조직을 통하여 직접 육성한 여러 명의 핵심청년들을 항일유격대에 보내주었다.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에 반영된 재만조선인들의 민족해방투쟁 실상과 그것을 유감없이 구사한 활달하고도 격정적인 필치는 바로 이상과 같은 혁명 실천과정에서 이루어지고 수련된 것이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최일천은 심양과 베이징에 있을 때 여러 차례에 걸쳐 서울에 나와 국내의 저명인사들과 각계각층 인민들에게 항일무장투쟁의 전과를 소개하였다. 조국광복회가 결성된 후에는 그 강령도 해설해 주었다. 그의 선동에 따라 이극로 선생이 지도한 조선어학회와 민속운동도 조국광복회10대 강령을 전폭적으로 지지 찬동하고 그 정신에 따라 민족문화와 민족의 얼을 고수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최일천은 일본 관헌들의 박해와 감시가 심해지자 ≪동아일보 지국의 일을 할 때 만주 각지를 돌아다니며 손수 수집해 놓았던 우리의 투쟁 자료들과 독립운동 자료들을 가지고 서울에까지 나와 당시 조선어학회를 책임지고 있던 이극로 선생에게 그 자료들을 모조리 넘겨주었다. 그 자료들 속에는 우리가 오가자에서 발간한 ≪농우≫ 잡지 묶음도 있었다. ≪이것은 국보적 가치를 가지는 자료입니다. 적의 감시와 추적 속에서 사는 나에게는 이 자료들을 간수할 힘이 없습니다. 나라가 독립되면 이 자료들로 역사 서술을 하려고 하는데 이 선생이 어떻게 하나 그때까지 잘 보관해주기 바랍니다.≫ 그때 최일천은 이런 부탁을 남기고 만주로 다시 들어갔다. 그는 해방 직후 이극로 선생이 자기의 부탁을 받고 소중히 보관해온 자료들을 넘겨받아가지고 단숨에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를 써냈다. 그 책은 파지를 모아 제조한 모래알까지 섞인 재생지에 인쇄된 것이었으나 구독자들이 너무 많아 역사와 문학을 전공하는 젊은 지식인들이 백지에 전문을 베껴가지고 다니면서까지 탐독하는 인기 도서로 되었다.” (188~190쪽)  






  디지털 북한 인명사전 (코리아콘텐츠랩, 2004년 구축) 기록




  이름 : 최일천


  생년월일 : 1905년 10월 11일


  출생지 : 평안북도 정주시


  사망일 : 1950년 11월 05일


  학력 : 소학교


  기관/직위 :


  약력 : 1905.10.11-1950.11.5반일애국열사


  1905년 10월 11일 평안북도 정주시 출생


  중국 봉천성 류하현에서 성장하고 소학교 다님


  정의부 산하 독립군에서 병사 생활을 하다가 오동진 사령의 서기 됨


  1927년 길림성 회덕현 오가자의 삼성학교에서 교원 생활


  1930년 가을 이후 오가자 반제청년동맹 위원장, 잡지 <농우> 주필로 사업


  1931년 12월-1945년 장춘과 베이징, 심양 등지에서 <동아일보> 지국장 및 기자로 일함


  1945년 해방 후 서울에서 <동방문화사> 기자로 일함


  남한 정계에 진출하여 조선혁명당 정치부장, 신진당 중앙위원회 부장, 김일성장군환영위원회 위원, 민족자주연맹 집행위원 등 중요 직책 역임


  1950년 11월 05일 피살됨, 애국열사릉에 안치 


  활동상황 : 로동신문 2006년 12월 1일 2면 ‘소중한 추억’에 게재






  동아일보 사사 1권 부록과 당시 보도를 보면 ‘최형우’는 기간은 명확하지 않지만 신경(新京, 길림성 장춘) 지국장과 신경지국 기자를 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신경(新京)……김이삼(金利三, 1928. 3~) 최형우(崔衡宇, ?~) 송명배(宋明培, 1938. 2~) 김병권(金秉權, 1939. 4~) 김경규(金景圭, 1939. 9~) 최경가(崔景加, 1940. 2~) 유시용(劉時鎔, 1940. 5~)




  1927년 4월 11일자 4면


  장춘지국 변경 지국장 咸錫殷 기자 金玉斌 金利三 崔衡宇 고문 崔德潤 李春基 임명




  1931년 12월 3일자 3면


  장춘지국 ; 장춘통신원 崔衡宇 任 장춘지국장




  1937년 6월 13일자 6면


  新京 소개판 ; 신경과 재류동포(신경지국장 崔衡宇)




  1938년 2월 4일자 8면


  신경지국 ; 宋明培 任 지국장 崔衡宇 지국장 의원해직




  1938년 2월 4일자 8면


  신경지국 ; 고문 李鴻周 李鍾元 朴泰晉 崔衡宇 기자 洪揆植 집금원(集金員) 宋英培 임명




  신동아 1935년 10월호 119~122쪽 최형우, 재만동포의 근황(新京 崔衡宇)






  이명화, ‘도산 안창호의 독립운동과 통일노선’ (경인문화사, 2002, 245쪽)


  “이상과 같은 수력자원개발의 내용을 전하고 있는 책은 최형우의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동방문화사, 1945, 47쪽)가 유일하다. 이러한 사실 내용을 기록한 근거를 확인하고자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위의 책은 그 어떤 기록에도 나오지 않은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안창호의 이상촌 운동 기록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필자 최형우는 본명이 최일천으로, 그는 길림성 회덕현 오가자에서 농민단체인 농우회를 조직하고 농민계몽잡지인 ‘농우’의 주필로 활약했으며 이 지역의 민족교육학교인 삼성학교의 교사였다. 또한 이 지역에서 조직된 청년운동 단체인 반제청년동맹의 위원장을 역임했다. 말하자면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는 최형우 자신이 길림에서 실제 체험한 산 증언의 기록이기도 한 것이다.”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도산안창호전집 8, 흥사단 원동위원부,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2000, 891~894쪽, ‘정·경 병행운동과 안창호’ (최형우,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  




  “나는 이러한 과제를 간도 로정의 첫 단계 사업목표로 정하고 동만으로 가는 걸음을 다그쳤다. 그런데 천만뜻밖에도 고유수에서 대중조직들의 사업을 지도하고 류봉화 최득영과 함께 장춘으로 나가다가 밀정의 고발로 반동군벌당국에 체포되었다.(199쪽)…(1931.3.26일자 동아일보 2단 보도 – 앞부분에 수록된 사진)…장춘으로 이송되어 20일 가량 감옥생활을 하였다. 내 생애에서의 세 번째 감옥살이였다.” (200쪽) 






  9) “우리 부대는 직업과 지식정도 출신 지역과 출신 조직이 각이한 사람들로 구성되여있었다. <동아일보><조선일보>와 같은 출판물들과 중학 강의록 같은 것을 정기적으로 받아보면서 꾸준히 눈을 틔워온 청년들이 있는가 하면 장광자의 ≪소년 방랑자≫나 최서해의 ≪탈출기≫와 같은 소설 작품들을 읽고 사회 개조의 푸른 꿈을 키워오다가 유격대에 입대한 청년들도 있었으며 학교 물은 조금도 먹어보지 못했지만 적위대나 소년선봉대와 같은 혁명 조직들에서 몇 해 동안 정치적 수련을 쌓아오다가 총을 한 자루씩 얻어가지고 무장 대오에 들어온 청년들도 있었다. 그러므로 사물 현상을 이해하는데서 자연히 수준 상 층하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308쪽)






  3권(1933.2~1935.2월의 기록)


  10) 앞부분에서 “땅을 빼앗긴 사람들이 갈 곳은 어디인가. 1933년 11월 <동아일보>는 간도 인구 총 57만 중 조선 사람이 8할이라고 보도하였다.”고 인용.






1933년 11월 1일자 2면






  전(全) 간도(間島) 총인구의 8할이 조선인


  조선인 9할은 순농민(純農民)이오 교육기관(敎育機關) 수(數)는 436교


  총인구는 57만












  이 선전물 속의 동아일보는 1931년 9월 22일자 2면 입니다.











  간도(間島) 일대도 불안(不安)


  라남여단(羅南師團)도 출동(出動) 간도지방에 물정소연(物情騷然)


  수비대 출동 대안경비(對岸警備) 두만강 안(岸) 전시기분




  불안하다고 전하든 간도(間島) 일대에는 19일 이래 여러 곳에서 사단이 생기어 라남(羅南) 제○○사단의 일부는 간도로 출동하게 되어 21일 미명에 라남 ○○대대는 모 방면에 이동하고 제 ○○사단사령부는 ○○에 이동하기로 되었다. 온성(穩城)수비대가 대안에 출동하고 회녕 일대는 화물열차의 출동 준비 등으로 매우 긴장되었다.




  제 19 사단(師團)에 간도(間島) 출동명령(出動命令)


  (전통) 간도 방면의 시국이 절박했으므로 조선군사령부는 제19사단에 대하여 출동준비명령을 발하였다. 그리하여 동 사단 관하 ○○여단은 금조 여단사령부를 라남으로부터 회녕에 옮기고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출동한 군대는 혼성 1여단으로 21일 오후 각의에서 승인을 얻은 후 금곡 참모총장은 곧 참내하여 사정을 상주한 후 어재가를 받으리라고 한다.






  4권(1935.2~1936.5월의 기록) 


  11) “16살에 일본 유학을 가는 것으로써 친일의 첫걸음을 뗀 박석윤은 도쿄제국대학 법과와 제국대학 연구원,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등 일류급의 대학들에서 여유 있는 수학 생활을 하였다. 영국에서 유학을 할 때에는 매해 총독부 학무국으로부터 3,000여 원에 달하는 거액의 학비까지 받았다고 한다. 해외유학 후의 그의 직함은 그보다 훨씬 더 화려하였다. ≪동아일보≫기자, ≪매일신보≫부사장, 일본 외무성 촉탁 만주국외교부 참사관, 폴란드주재 만주국 총영사… 등 귀국 후 그가 역임한 직무들과 훗날 쏘일중립조약 체결 시 일본 측 단장으로 그 조약문에 수표했던 외상 마쯔오까 요스께가 이끄는 일본대표단 성원으로 1932년 제네바에서 열렸던 국제연맹총회에까지 참석한 현란한 경력은 그가 일본 지배층으로부터 얼마나 두터운 신임을 받았는가 하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게 한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로서의 박석윤의 체면을 세울 수 있게 그로 하여금 저들의 식민지 통치를 비난하는 사설도 쓰게 하고 창씨개명을 반대하여 총독과의 정면대결도 하게하고 태평양전쟁 말기 여운형이 주관한 건국동맹에도 관여하게 하였지만 ≪민생단≫과 관련된 원한도 있어 간도지방의 조선 사람들은 누구나 다 그를 곱게 보지 않았다. 해방 직후 박대우란 이름으로 변성명을 하고 양덕에 숨어 살다가 적발되여 민족반역자로서 준엄한 심판을 받은 박석윤은 재판정에서 일제 통치하 조선 사람의 ‘민족 자체’가 자기의 정치적 이념이였다는 것, 조선도 영국의 식민지들인 카나다나 남아연방과 같은 정치 발전의 코스를 걸어야한다고 생각했었다는 것, 바로 이런 정치이념으로부터 사이또 총독과도 가깝게 지냈고 일본의 이름 있는 세계제패론자이며 동아연맹의 정신적 고취자의 한 사람인 이시하라 간지도 숭배하였다고 실토하였다.” (12~13쪽) 




  이에 대해 이명영(李命英), ‘김일성 회고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 문제와 인식’ (사단법인 해성사회윤리문제연구소, 2000)은




  “(19쪽) 동만의 당과 그 유격대 내에서 사납게 그지없는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던 ‘반민생단 투쟁’이란 무엇이었든가. 민생단이란 1932년 2월에 일제 관헌의 조종 아래 동만에서 조직된 조선 사람들의 반공단체이다. 단장은 박두영(朴斗榮)이었는데 이 단체는 갓 태어난 만주국의 지원을 제대로 얻지못해 그해 7월에 이내 해체되고 말았다. 그러나 당과 유격대쪽에서는 공산당 박멸을 외치며 탄생했던 민생단에 대해 비상한 경계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36~37쪽) 이상에서 보아온 바와 같이 사실상의 역사와 회고록이 말하는 내용과는 전혀 다르다. 회고록의 일관된 역사 위조의 단면인 것이다. 북한 문헌에 나오는 조국광복회 창립선언과 10대 강령도 실제의 그것과는 많이 개작된 것이다. 필자는 10여 년 전에 ‘권력의 역사’란 저서를 통해 조국광복회에 관한 북한의 역사 위조를 심각히 비판한 바 있다. 그 비판을 의식해서인지 회고록은 더욱 세심하게 기교를 부리고 있는데 그것이 발기인 명단에 관한 대목에서 아주 잘 나타나 있다. 회고록은 발기인이 김동명, 리동백, 려운형이었다고 하고 있으나 사실은 오성륜, 엄수명, 리상준이었다. 이에 대해 회고록은 다음과 같이 변명하고 있다. 조국광복회의 창립과 그 선언이 알려지자 각지에서 비슷한 선언문들이 나왔는데 그 중의 하나가 남만에서 나온 ‘재만한인조국광복회’이고 그 선언문이 발기인으로 오성륜, 엄수명, 리상준 같은 사람들의 이름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각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김일성의 조국광복회 선언문이나 10대 강령을 뒷받침해주는 문헌 자료는 아무데도 없다. 오로지 북한측 출판물에서만 볼 수 있다. 그것도 연대에 따라 주장의 내용들이 다르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나도 길림시절에 <조선일보> 지상에서 간디의 편지를 읽고 박소심과 함께 무저항주의를 론평한 적이 있다. 그 편지의 원문은 아래와 같은 것 이였다. 사랑하는 친구여! 나는 당신의 편지를 받았나이다. 내가 보낼 유일한 부탁은 절대로 참되고 무저항적인 수단으로 조선이 조선의 것으로 되기를 바란다는 것 뿐입니다. 1926년 11월26일 사바르마티에서.” (113쪽)  






  회고록은 ‘ <조선일보> 지상에서 간디의 편지를 읽고’ 라고 했으나 이는 동아일보의 오류입니다.






  5권(1936.5~1937.3월의 기록) 


  12) “다까하시의 ≪정예부대≫는 동산골짜기에서 전멸을 면할 수 없었다. 이 비극적인 사태는 그날 오전 중으로 관동군사령부에 보고되었다. 훗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보고 알게 된 데 의하면 그때 신경비행장에서는 무송주둔군을 지원하려고 폭탄과 탄알을 만재한 군용기들이 떠올랐고 통화, 환인, 사평가 등지에서는 증원부대가 긴급히 출동하였다. 중강진 수비대도 무송으로 급파되었다.” (36쪽)




  13) “우리가 서간도로 진출하고 있을 무렵에 국내에서는 일장기말소사건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 그 소식이 백두산 밑에 까지 날아왔다. 이 사건의 발단으로 된 것은 신문 <동아일보>가 1936년 8월에 베를린에서 있은 여름철 올림픽 경기대회 마라손 종목의 1등 수상자인 손기정을 사진과 함께 소개하면서 그의 앞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지워버린 것이였다. 노발대발한 총독부 당국은 <동아일보>에 정간처분을 내리고 그 관계자를 구금하였다. 우리는 그 소식을 듣고 손기정의 경기 성과와 일장기말소사건을 소개하는 강연을 하였다. 우리 부대의 모든 대원들은 강연을 듣고 <동아일보> 편집 집단이 취한 애국애족적인 립장과 용단에 열렬한 지지와 련대성을 보내였다.” (56쪽)




  14) “도천리의 선각자들과 혁명적 군중은 김정숙의 지하공작과 신변보호를 위해 있는 힘을 다하였다. 그들은 김정숙을 위해 신파에 건너가서 그가 읽을 수 있는 신문까지 정기적으로 얻어왔다. 정동철이 신파 조직성원인 잡화점 주인에게 구독료를 주면 그는 자기 이름으로 신문을 신청하였다. 신문이 나오는 족족 포장지 대용으로 상품을 싸서 넘겨주든가 그대로 넘겨주었다. 그래서 김정숙은 정기적으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받아 볼 수 있었다.” (448쪽)






  6권(1937.3~1937.11월의 기록)


  15) “그 당시 사령부에는 <동아일보><만선일보><조선일보>를 비롯한 국내외의 신문들과 <레닌주의 제 문제><사회주의 대의><국가와 혁명> 같은 책자들을 비롯하여 식견을 넓히는데 도움이 되는 출판물이 수두룩하였다.” (55쪽)




  16) “해와 달도 빛을 잃어가던 조국 땅에 있어서 보천보 밤하늘에 타오른 불길은 민족의 재생을 요구하는 서광이였다. <동아일보><조선일보><경성일보>를 비롯한 국내 주요 신문들은 일제히 인상적인 표제를 달고 보천보전투 소식을 전하였다.” (176쪽)






  ‘보천보 전투’ 보도는 동아일보의 특종이었습니다(동네역사관 59 – 김일성 이름 알린 ‘보천보 전투’ 특종호외 참고)






  7권(1937.11~1938.11월의 기록. 김일성 사후 그가 남긴 메모를 토대로 작성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음. 1996.4.15 발행)


  17) “우리는 족제비사냥군령감을 통하여 심룡준에게 돈을 좀 보내서 <동아일보>라든가 <조선일보>와 같은 정기간행물을 사 보내게 하였습니다.” (28쪽)






  8권(1940.4~1945.8월의 기록) 


  18) “1938년 말에 동아일보는 서울 연희전문학교에 적색연구회라는 비밀결사가 있었다는 혐의로 그 연루자들이 검거되었다는 기사를 실어 독자들의 관심을 모았습니다. 공화국의 초대 교육상이었던 백남운도 적색연구회의 조직성원이었습니다.…우리는 내각을 조직할 때 백남운을 첫 교육상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는 한때 과학원 원장도 하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도 하였는데 일을 아주 양심적으로 하였습니다.” (394쪽)






1938년 12월 17일자 2면






  “적색연구회(赤色硏究會)”의 혐의(嫌疑)로


  연전(延專) 3 교수(敎授) 등 송국(送局)


  백남운(白南雲)  이순택(李順鐸) 노동규(盧東奎)등


  졸업생 16명은 불구속(不拘束)으로




  지난 2월 27일 부내 서대문서 고등계에서는 아연 긴장하여 부내 대현정에 있는 연희전문학교 도서관을 수색하고, 다수 좌익 급 불온서적을 압수하는 동시에 동교 백남운(白南雲)교수를 소환 취조중 기보한 바와 같이…(삭제)…건의 전모가 명확하다하여 지난 15일 오전 10시에 백남운(白南雲)  이순택(李順鐸) 노동규(盧東奎)의 3 교수를 치안유지법 위반 등 죄명하에 500여장이나 되는 의견서와 두 “트럭”의 불온서적 급 다수 증거들과 함께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신체구속으로 송국하고 기외 학생 등 십수명을 구속으로 송국하였다 한다.


(사진은 상으로부터  白南雲 李順鐸 盧東奎)  






  19) “왜정말기 국내에서 민족의 넋을 고수하기 위해 치열한 투쟁을 벌인 조직 가운데는 조선어학회도 있습니다. 이극로의 말에 의하면 조선어학회는 1930년대 초에 나왔다고 합니다. 조선어연구회라는 것은 그 전신입니다. 조선어학회가 소문도 없이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조선어사전편찬사업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어학회가 조직된 후부터입니다. 그전까지는 우리나라에 온전한 조선말사전이 없었습니다…조선어학회 내부에는 우리의 조직선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이극로를 비롯한 선각자들을 망라한 비밀지하조직이 틀고 앉아 있었습니다. 최일천이 서울에서 살고 있은 이극로를 찾아간 것이 1936년 가을과 1937년 여름이었다고 하는데 그때 우리 조직에서 그에게 국내 지식인들 속에 조국광복회 조직을 꾸리는 과업을 주어 파견하였습니다. 최일천은 장춘에 있는 ≪동아일보≫ 지국장으로 서울에 들락날락하면서 우리의 과업을 훌륭히 수행하였습니다.” (400쪽)






  조선어학회와 동아일보, 그리고 인촌 김성수 선생과의 관계에 대한 기록으로 아래와 같은 내용들이 있습니다.






  “조선어학회 운영은 이극로 박사에 의한 것이고, 이극로 박사로 하여금 조선어학회를 운영하게 한 장본인이 김성수 선생임을 경찰 당국이 모를 리 없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의 수사에 있어서 김성수 선생에게 까지 확대하지 않은 것은 총독부의 정치적 방침에 따라서 행하여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왜냐 하면, 이극로 박사를 고문하고 추궁하면 김성수 선생까지 확대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증인으로도 부르지 않았다. 동아일보사의 주인이요, 정치적으로도 조선의 대표적 지도자인 그를 괄시할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물은 흘러’, 한글학회, 1993, 23쪽)






  “개성회의(1932년 12월 27일부터 1933년 1월 4일까지 열린 1차 독회) 때 10일간 철자제정위원 전원의 숙박비 회의비 왕복 차비, 기타 일체를 개성 유지 공탁이 전담하였다. 제2차 독회(1933년 7월26일부터 시외 화계사 태화원에서 열린 제2차 조선어철자법위원회의)에서의 모든 뒷바라지에 힘써준 김성수 송진우 및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사람의 후의와 회의 때마다 회의자료 기타의 인쇄물을 전담한 한성도서주식회사의 희생적 봉사는 통일안 제정위원들의 노고와 함께 길이 새겨져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한글학회 50년사’, 한글학회, 167쪽, 169쪽)  






  “특히 1931년 여름방학 동안을 이용하여 동아일보사 주최로 열렸던 전국 한글 순회강습회에는 조선어학회 회원이 총출동하여 이에 협력하여 강사로 순회하게 되었다. 이는 1933년까지 3년 동안을 여름방학 때마다 계속되어 전국에 아니 미친 데가 없을 정도였다. 그들은 그만큼 철자법 자체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의 신 철자법에 대한 동아일보(1933.4.1)의 논설을 보면 당시 사정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중략)…동아일보가 통일안을 실시하기로는 1933년 4월 통일안의 초안이 작성되었을 때부터였다. 이는 신문에서뿐만 아니라 동 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신동아 신가정에도 같은 방침을 취하였음은 물론이다. 국내 신문 중에는 물론 한글 출판물로서의 신 철자법 사용으로는 동아가 효시에 들 것이다. 동아일보사는 이에 뒤따르는 활자의 개정과 노년층 독자들이 갑자기 나타나는 낯선 글자로 인한 구독자 감소로 말미암아 한때는 재정적 타격까지 받았다고 한다…(중략)…당시는 언론기관인 동아일보와 학술기관인 조선어학회는 특히 혼연일체가 된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지지와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김선기<金善琪>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 동아일보사, 1985, 152, 176, 207쪽)






  “한글맞춤법 통일안의 제정은 아주 시급한 문제였다. 나는 당시 25세의 약관으로 권덕규 김윤경 최현배 씨 등 선배들을 모시고 18인 소위원회 위원으로 125회의 모임을 갖는 동안 모든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심지어 화계사 회의 때는 모든 경비까지 조달해야 할 정도였다. 경비 150원은 거금이었는데 선친(김철중<金鐵中> 동아일보 전 총무국장)께서 구해다 주셨다. 인촌 선생의 후원이 아니었나 싶다. 어쨌든 통일안은 우여곡절 끝에 제정되었으나 시행이 문제였다. 모든 신문 잡지 출판물이 호응을 해줘야 하는데 호응을 하자면 활자를 다시 주조해야 하기 때문에 막대한 비용이 들게 돼 있었다. 제정만 해 놓고 시행을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조선어학회에서는 날더러 동아일보를 설득하도록 책임을 맡겼다. 인촌 선생과 고하 선생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동아일보가 10만부를 찍어 전국에 홍보를 하고 앞장서서 새 맞춤법을 시행해 주었다. 한글이 오늘날의 체계를 잡은 것은 동아일보의 공로인 동시에 인촌의 공로인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는 1만부가 나갈 때였다. 나는 동아일보에 파견되어 맞춤법 교열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중략)…1942년, 언어말살을 기도한 일제의 흉계에 의해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나 나도 가람 이병기(李秉岐)와 연행되어 옥고를 치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인촌 선생도 고역을 당하시고 겨우 투옥만은 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옥고를 치르고 나와 인촌을 뵈러 갔더니 내 손을 잡으며 고생했다 하시고, 고문을 당하면 못할 말이 어디 있겠나 하시며 이극로(李克魯)를 걱정했다. 무슨 일이 있었구나 직감한 내가 물었더니 혼자만 알고 있으라며 말씀했다. 잡혀간 이극로가 매에 못 이겨 사전 편찬 등은 독립운동의 일환이라고 거짓 자백을 했으며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의 책임자로 있던 인촌도 관련이 있는 것처럼 말했다는 것이다. 그렇잖아도 틈만 엿보던 경찰은 인촌을 옭아 넣으려 했다. 어느 날 보안과장 야기(八木)라는 자가 날 청향원(술집)으로 부르더구먼? 술 한 잔 사겠다는 거여. 무슨 꿍꿍이가 있지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건 취조여. 조선어사전 편찬은 독립운동의 방법이었다고 이극로가 불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거였지? ‘그래서요? 뭐라셨습니까?’ ‘조선어 사전 하나 편찬해서 독립이 된다면 왜 진작 편찬하지 인제야 허느냐! 일본 경찰이 그렇게 편협한 줄 몰랐다. 독립운동과 사전 편찬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고 말했지. ‘그랬더니 뭐래요?’ ‘말이 막히는 지 더 말이 없더구먼’ 그 뒤에도 감시의 눈을 번뜩이며 인촌 선생을 계속 괴롭혔다고 한다. 그러나 그 말씀은 결코 다시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범인으로서는 못할 일이다.” (위 책, 213~214쪽)   






  “통일된 표기법이 없이는 사전을 만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30년 12월 중순 조선어학회는 한글맞춤법 통일안의 작성을 결의하고, 권덕규 김윤경 박현식 신명균 이극로 이병기 이윤재 이희승 장지영 정열모 최현배 정인섭 등 12명이 이 일을 맡았다. 이들은 125회의 모임을 가진 끝에 1932년에 원안을 작성하였고 1933년 10월 29일에 최종적인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동안 인촌은 여러 번에 걸쳐 조선어학회의 이 활동에 재정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인촌 선생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거액이었던 300원(圓)을 투척(投擲)하셨다. 철자법위원회를 제1회 개성, 제2회 인천, 제3회를 서울 화계사에서 열었을 때도 그때마다 적지 않은 액수의 돈을 내주셨던 것으로 안다.” (이희승, ‘인촌 김성수전’, 인촌기념회, 1976, 377쪽, 3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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