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1882년)에 과거 급제하고 20세(1884년) 때 갑신정변의 주역 중 1인이 되었던 서재필.
그러나 그는 그 후 조국을 떠나 1890년 한국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가 되고 28세(1892년)에 한국인 최초로 미국에서 세균학 의학사(M.D.)가 됩니다.
동아일보 주필 송진우는 1925년 6월 30일부터 7월 1일까지 만국기독교청년회 주최로 하와이에서 열린 태평양문제연구회 회의에서 그를 만났습니다(동아일보 사사<社史> 251~253쪽 참조).
“서재필 씨와 이승만 씨의 두 분은 그분들이 반도(半島)에 게실 때는 우리는 년소배(年少輩)엇기 맛나 뵈올 기회가 업다가 포규(布叫·하와이)서 태평양회의가 잇섯슬 때 거기 갓다가 맛나뵈엿다. 이승만 씨에는 자가용자동차가 잇섯다. 그 차에 서(徐), 이(李) 두 박사와 나의 셋이 타고 조용한 해안의 빌레지에 가서 약 20일동안 동거동식하면서 시사(時事)를 이약이할 기회가 잇섯다.” (송진우, 교우록<交友錄>, 삼천리 1935년 6월호 54쪽)
1925년 8월 1일자 2면
태평양회의에 참가한 동포(전열 우로부터 송진우 신흥우 윤활란 서재필 김양수 유억겸 씨)
서재필은 1926년 3월 6일 동아일보가 2차 무기정간을 당하자 송진우 주필에게 편지를 보내 “선생과 여러분이 자주 곤고(困苦)를 당하는 것은 개인으로는 유감이지마는 민족 전체에 대하여는 오히려 ○○할 일이라고 믿는다”며 “언론의 자유를 위한 선생의 인고로 인하야 해방의 날이 올 것을 확신한다”고 격려합니다. 이 편지는 무기정간이 해제된 뒤인 6월 12일자 1면에 게재되지만 일제에 의해 압수됩니다 (일정하 동아일보 압수사설집, 신동아 1974년 1월 별책부록 285쪽 참조).
좀 더 잘 살 길은 정신물질의 합작에서
“이 글은 미국에 계신 서재필 박사가 본사 주필 송진우 씨에게 보낸 영문 서한이다. 현재 우리 조선 사람의 처한 역경이 ‘자유와 정의의 가치를 해득’케 한다는 것을 갈파하고 우리가 좀 더 잘 살기 위하여는 ‘물질 급(及) 정신상으로 분투맹진하여 합작적 정신을 발로함에 있다’는 것을 역설하여 척영(隻影)을 외국에 부치나 고국을 연(戀)하고 동족을 애(愛)하는 지성이 지면에 횡일(橫溢)한 바 있어 우리에게 일대 교훈이 되겠으므로 이에 역재(譯載)한다.”
송진우선생 귀하
작하(昨夏) 호놀룰루에서 일별(一別) 후에 매양 글을 올리려 하였으나 오늘까지 시간이 없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일전에 들은 즉 동아일보가 정간을 당하였다 하니 그 이유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하여간 언론의 자유가 없는 사회의 어떠한 법률에 저촉된 것인 줄 알고 그 불상사에 대하여 동정을 금치 못하던 바, 이제 해금의 소식을 들으니 오히려 더 늦지 않은 것만 다행입니다. 선생과 기타 제위가 이같이 자주 인고를 당하게 되는 것은 개인으로는 유감이지마는 민족 전체에 대하여는 도리어 ○○할 일이라고 믿습니다. 오직 이런 역경의 교훈을 받아야만 조선 민족은 자유와 정의의 가치를 해득하고 인류의 이상사회를 출현시키기에 노력할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자유와 정의를 위하여 노력하지 못하였으므로 지금 그것을 못가진 것이외다. 선생과 기타 제위가 이런 시련을 당하는 것은 조선민족의 과거의 허물을 보상하는 동시에 장래에 올 날을 위하여 길을 닦는 것인 줄 압니다. 선생은 마땅히 생각할지니 선생이 ○○된다 하면 이는 개인 때문에 됨이 아니요 조선의 언론의 자유를 위하여 ○○됨인 것이외다. 언론의 자유를 위하여는 위대한 인물들이 자진하여 ○○되기를 주저하지 아니할지요. 따라서 조선이 선생의 지금 고초받는 동기를 이해하고 감사할 날이 올 것이외다. 현재의 언론계의 고통에서 장차 ○○○○할지 누가 예언하리까. 세계상에 어떠한 사업이든지 그를 위하여 분투하는 용사가 없이 성공된 법이 없습니다. 언론의 자유를 위한 선생의 ○○로 인하여 ○○의 날이 올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에 있거나 사무를 보거나 선생은 조선 민족에게 합작적 정신을 고취하여 물질 급(及) 정신상으로 분투맹진해야 할 것을 알려주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민족은 아직 분투의 진의를 모릅니다. 우리가 분투하여 금일보다 일층 더 큰 일을 하기 전에는 오족(吾族)의 장래는 암흑합니다. 우리는 일하여야 하겠습니다. 일하되 합(合)하여야 되겠습니다. 그것이 오직 우리를 살리는 길이외다. 명년의 태평양회의에 출석하게 되면 다시 거기서 대안(對顔)할 줄 압니다. 마지막으로 사건이 속히 해결되기를 바라며 회신을 고대하면서 그칩니다.
미주(美洲) 펜실베니아에서 서재필
동아일보는 서재필 선생의 근황도 전합니다.
1926년 11월 23일자 2면
생계에 궁한 서재필씨 의과대학에 입학
갑신기미운동에 사재를 없애고
62세요 미국 의학박사의 학위를 가진 서재필 박사는 미국 펜실베니아대학 의학과 연구과에 입학하기로 결정하였다는데 시내 어떤 친우에게 보낸 사신을 보건댄 “나는 갑신혁명에 가족과 조전의 재산을 잃었노라 기미운동에 다시 내땀으로 만든 재산을 잃었노라 이제 가족을 먹여 살릴 도리가 없으며 남은 것을 팔아 2,3년간 가족의 ‘밥’값을 장만하여놓고 나는 학교로 가노라. 내가 다시 학생 생활에 들어가는 것은 교수의 자격을 얻어 생활의 기초를 세우려 함이로라”하는 구절이 있더라.
◇참고
박사는 약종상으로 20만 불 이상의 재산이 있었으나 기미운동이래로 가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분주하기에 거의 재산 전부를 없이하였더라.
서재필 선생의 기고문이 조선일보에 처음 실린 것은 1924년 11월 23일자 1면의 ‘조선일보 주필 귀하에게’란 글입니다.
“여(予)는 조선일보가 우리 민족의 원로인 이상재 노인과 김동성 등 제씨의 협동조직한 새 기관으로 넘어갔단 말을 듣고….”
그는 이상재 선생과는 젊은 시절 함께 활동했고 김동성 기자는 동아일보 재직시절 워싱턴 회의에서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1927년 1월 1일자에는 그의 영문 기고문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각기 번역돼 실립니다.
Let us face the new year with a smile
by Philip Jaisohn
By the time this reaches and appears in print, it will be about the first of this year. Good luck to everybody who reads this message.
It is customary with some people to make new resolutions in the beginning of every year to be carried out during the coming year. Here is a resolution that all of you should make and you executed in 1927. Resolve to be more hopeful, more cheerful, more helpful, more courageable, and more willful. If you do your friends, and your neighbors will also be that way so that the atmosphere in which you live will be charged sith cheerfulness and friendliness…
동아일보 1927년 1월 1일자 1면 조선일보 1927년 1월 1일자 1면
신년을 당하여 고국동포에게, 깃브라 일하라 배호라
이 글이 도착하여 인쇄될 때는 아마 새해 첫날일 듯합니다. 이 짧은 편지를 읽으시는 모든 동포께 복(福)이 있을지어다. 어떤 사람들은 항용 그해 1년 동안 할 일을 해마다 첫날에 작정합니다. 여기 작정할 것 하나이 있으니 그것은 동포 여러분이 다 1927년에 실행하여야할 것입니다. “더 희망을 갖자 더 기뻐하자 더 유익한 일을 하고 더 용기가 있고 더 하려는 힘이 많자”하는 것이니 만일 여러분이 이렇게 하시면 여러분의 친구와 이웃이 또 그와 같이 하여 여러분을 두른 공기가 기쁨과 의(誼)좋음으로 찰 것입니다.…(동아일보)
신년을 새맘으로 맞자(상)
◇미국 비부에서 서재필 박사
◇이 간단한 기고가 본국에 도착되어 발간되기까지는 신년원단(新年元旦)이 될 것이다.
매년 연시(年始)는 당하여 혹 어떤 인사들은 1년중 시행할 신결심을 세우는 것이 관례이니 애독제위는 좌기(左記)와 같은 결심을 굳게 세워 1927년 중에 이행하라.
많은 기대
많은 환희
많은 위안
많은 용기
많은 욕망
등의 신년명(新年銘)을 세우고 이행하면 붕○○인 사이에도 여사(如斯)한 일을 실행하여 생활의 분위기는 유쾌(愉快)와 우정으로 쎄울 것이다.…(조선일보)
조선일보의 안재홍 주필은 그에게 미국생활을 회고하는 원고를 청탁했는데 1927년 그가 쓴 ‘재미사십년(在米四十年)’ 원고는 우송 중 분실됐습니다.
“안재홍 귀하…6월 11일 우정(郵呈)한 ‘재미사십년(在米四十年)’ 원고를 접수치 못하였다하시니 끽경(喫驚)을 금치 못하나이다.” (화부<華府>통신-서재필박사, 조선일보 1927년 11월 7일자 1면)
“그때 내가 그 분에게 ‘재미(在米) 40년의 회고록’을 조선일보에 써 보내시라고 부탁하여 ‘여름 휴가에는 꼭 써보내마’고 회신을 얻엇든 것인데 그것이 중간에서 인멸되어 사(社)에까지는 못오고 말엇고 그때부터 멫 해 후이지만 나도 조보(朝報)에서 물러나오게 된 것이다.” (안재홍, ‘미국에 기려하는 서재필씨를 회<懷>함’, 삼천리 1935년 10월호 88~89쪽)
그 후 송진우 주필이 요청한 서재필 선생의 ‘갑신정변 회고기’ 와 ‘체미오십년(滯米五十年)’ 이 1935년 1월 1일자부터 동아일보 지면에 실렸습니다.
1935년 1월 1일자 부록 1면
회고 갑신정변(甲申政變) 서재필 박사 수기, 변영로 옮김
“그런데 갑신정변(1884)도 다른 나라의 혁명과는 달라서 피압박 민중의 분기로 된 것이 아니고, 그 당시 특수 계급의 몇몇 청년의 손으로 된 것이었다.…실패의 근본 원인은 둘이니, 하나는 일반 민중의 성원이 박약한 것이고, 또 하나는 너무도 타에 의뢰하여 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김옥균)가 대인격자였고, 또 처음부터 끝까지 진정한 애국자였음을 확신한다. 그는 조국이 청국의 종주권하에 있는 굴욕감을 참지 못하여 어찌하면 이 수치를 벗어나 조선도 세계 각국 중에서 평등과 자유의 일원이 될까 주주야야로 노심초사하였던 것이다. 그는 현대적 교육을 받지 못하였으나, 시대의 추이를 통찰하고 조선도 힘있는 현대적 국가로 만들려고 절실히 바랐었다. 그리하여 신지식을 주입하고 일신 기술을 채용함으로써 정부는 일반 사회의 구투(舊套) 인습을 일변시켜야 할 필요를 확각(確覺)하였다.”
“그(김옥균)는 구미(유럽·미국)의 문명이 일조일석의 것이 아니고 열국간 경쟁적 노력에 의한 점진적인 결과로 몇 세기를 요한 것이었는데, 일본은 한 대(代) 안에 그것을 달성한 양으로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자연히 일본을 모델로 치고 조선을 개혁시킴에, 일본의 우의와 조력을 청하여 백방으로 분주하였던 것이다.”
“누구누구 하여도 나에게 제일 강한 인상을 끼친 이는 김옥균이었다. 그의 서와 평문은 물론이고 사죽에 이르기까지 통하지 않은 데 없는 그 높은 재기는 나를 사로잡지 않고는 마지아니하였다. 나는 그에게 십여 년 연하이었으므로 그는 나를 늘 동생이라고 하였다.”
“하루는 그가 나에게 국방을 충실히 하자면 정예한 군대밖에 없는데, 현하의 우리 급무로 그우(右)에 출(出)할 자 무엇이냐 하며, 일본으로 건너가 무예를 배우라고 권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곧 승낙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15인의 다른 학생들과 일본으로 향하였다.”
“그(김옥균)는 주일 한국공사는 아니었으나, 일본의 관리들과 일본에 파견된 외국 사절들에게 외교적으로 상당히 친밀한 교유를 하였던 것이다. 매 일요일이면 우리는 반드시 그를 동경 축지(築地·쓰키지)에 심방하였다. 그때마다 그는 우리를 친형제 같이 대접하고 숨김없고 남김없는 가슴속의 말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그는 조국 쇄신에 대한 우리의 중차대한 임무를 말하는 동시에, 나라에 돌아가 우리가 빛나는 대공훈을 세울 것을 믿어 의심치 아니하였다. 그리고 그는 늘 우리에게 말하기를 일본이 동방에 영국 노릇하려 하니, 우리는 우리나라를 아세아(아시아)의 불란서(프랑스)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그의 꿈이었고 또 유일한 야심이었다. 우리는 김(김옥균)씨의 말을 신뢰하고, 우리 진로에 무엇이 닥쳐오든지 우리의 이 책임을 이행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
1935년 1월 2일자 1면
회고 갑신정변(甲申政變) 서재필박사 수기, 변영로 옮김
“무엇보다도 제일 큰 (갑신정변) 패인(敗因)은 그 계획에 까닭도 모르고 반대하는 일반 민중의 무지몰각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민중의 조직이 있고 훈련 있는 후원이 없이 다만 몇몇 개인의 선각자만으로 성취된 개혁은 없는 것이다.”
1935년 1월 3일자 1면
체미오십년(滯米五十年) 상-서재필 박사 수기, 변영로 옮김
“우리는 아는 사람도 없고 돈도 없고 언어도 통하지 않으며 이 나라 풍습에도 익지 못하였다. 이처럼 생소한 곳에서 우리는 온갖 고초를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에서는 금릉위이던 박영효 씨나 바로 1년 전까지 워싱턴 우리 공관에서 참사관생활을 하던 서광범 씨의 지위를 알아주는 이가 전혀 없었다. 그러니 아무 명목도 없는 나인지라, 나 자신 남이 몰라준다고 물론 낙심하지를 아니하였다. 우리 세 사람은 태평양의 거친 파도에 밀려서 캘리포니아 해안에 표착한 가장 외롭고 가엾어 보이는 ‘잿섬’(선박의 유기물)이었다.”
“일 자체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으나, 일본제의 잘 맞지 않는 구두를 신고 온 종일 뛰어 다니는 것이 고통이었다. 갈라지고 해어진 발바닥이 밤에는 얼얼하고 쑤셔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이를 악물고 그 고통을 참고, 다음날도 그 괴로운 광고지 붙이는 마라톤을 하였다.”
“그는 퇴직 법관으로 주법원과 연방법원에서 오랫동안 법관으로 일한 분이었다. 그는 밤마다 입법과 법정에서의 자기 경험을 말해 주었는데, 미국 생활과 제도를 알기에 목마른 나에게는 유익하고도 견줄 데 없이 흥미있는 일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듣는 것이 정규학과에서 배우는 것보다 더 많다고 생각했다. 미국 학생들은 자기 부형들이나 나이든 친척들로부터 학과 이외의 여러 가지 훈련과 교육을 받지만, 천애일각의 고독한 신세였던 나에게는 그만한 연령, 그만한 경험의 인물과 그다지도 친밀한 관계를 가진 것이 참으로 희귀한 기회였던 것이다.”
1935년 1월 4일자 1면
체미오십년(滯米五十年) 하-서재필 박사 수기, 변영로 옮김
“신문은 항간에 대호평을 사서 사회각처에 널리 읽혀졌다. 공정을 기하려 나는 불편부당주의로 어느 편 어느 패에도 쏠리고 기울지를 아니하였다. 나는 친아(親俄), 친일(親日)할 것 없이 두 편 정객들을 모두 매도하였다.-까닭은 그 두편이 너나없이 외적세력의 괴뢰노릇을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공석에서나 글로나 말로나 조선의 민리민복(民利民福)만을 위하여 일하고 남의 굿에 놀지않음이 조선위정자의 의무임을 역설하였다.”
“어느 날 미국공사는 내가 황제와 모모세력에 적대적 태도를 취함은 가장 불현명한 일인즉, 위해가 신변에 미치기 전에 가족동반하여 미국으로 다시 가라고 권하였다. 하나 얼마동안은 더 계속하여 보다가 “내가 종자를 뿌렸은즉, 내가 떠난 뒤에라도 거둘 이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품고 나는 하릴 없이 미국으로 건너가기를 결심하였다.”
“내가 미국에서 다시 돌아와 보니 3년간이나 의학과 인연을 멀리하고 있었던 만큼 그 길에 낙후된 느낌을 금할 수 없었다. 나는 다시 대학의 연구생이 되든지 아니면 다른 일을 해야만 했다. 그 때 마침 펜실베니아에 사는 한 학교 친구가 인쇄업을 경영하니 같이 해 보자고하여 나는 그와 함께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기고문은 1935년 한 해 조선 사회에 서재필 선생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0년전 고종 건양 원년 병신 4월 7일 서재필씨가 조선문과 영문 두 가지로 독립신문을 격일(隔日)하야 발행하다가 1년 뒤에 윤치호씨가 계승하야 일간을 만드니 이것이 일간 신문의 시초이다.…대한매일신보 하나만 남겨서 단(單)히 매일신보라는 일홈으로 총독부 기관지를 삼엇고 기타 민간의 경영은 일률로 금하엿으니 사내(寺內)총독으로부터 장곡천(長谷川)총독까지 약 10년간을 ‘뿔랙에이지’라고 할 수 밧게 없다. 기미운동 후에 재등(齋藤)총독은 부임하자 곳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10년동안 막엇든 언론의 자유를 어느 정도까지 용허하게 되어 탄생한 것이 민간의 3신문이다.” (황태욱, ‘조선 민간신문계 총평’, 개벽 1935년 3월호 14쪽)
“혁명은 대체로 격렬한 행동을 청하는 것이니…” (서재필, ‘재류오십년간<在留五十年間>- 미국사회의 동태’, 중앙, 조선중앙일보사 발행, 1935년 4월호 516쪽)
“서 박사한데서 그때 나는 갑신정변의 자세한 유래를 들을 수 잇섯다. 그리고 모든 문제에 대하야 복장(腹藏)이 업는 이약이를 드를 기회가 잇섯다. 지금은 모르겟지만 그때는 해외에 동지회(同志會)와 흥사단(興士團)의 파쟁(派爭)이 심하엿다. 나는 양(兩) 박사더러 안도산(안창호)의 흥사단과 이박사(이승만)의 동지회를 마저서 한 단체를 만드시오하고 권하엿다. 두 분은 이 말에 귀를 기우려 주엇다. 그래서 그 구체안까지 이야기되다가, 그때 나의 입장이 해외에 나와서 정치운동한다는 소문이 들니면 큰일이겟지, 더구나 회의 일자가 끗낫기 그만 귀국하고 말엇지만. ” (송진우, 교우록<交友錄>, 삼천리 1935년 6월호 54쪽)
“서재필 씨는 현대 조선의 신문인으로서 대선배의 한 분이다. …서재필 씨는 당년 21세의 청년생도로서 훈련원에서 교련되는 사관생도들의 반장이엇섯고 갑신운동에는 정령관으로 임명되여 전위대 총지휘의 요무(要務)를 받엇든 인물이니 간접으로 성기(聲氣)가 통하엿든 터이오.…그보담 앞서 ‘독립신문’의 창간자 겸 주재자로 그 신문이 순 ‘한글’로 발행한 대중적인 민간신문의 개조(開祖)로 되엇스니 서재필 씨가 현대 조선신문인의 대선배요 또 그 개척자인 것은 논의할 여지가 없다. 이제 이분의 일생을 대략으로 적기로 한다…조선현하의 인물들은 그 선구적 봉사(奉仕)로서 심대한 희생을 치른 데서 바야흐로 그 찬연한 광채를 놋는 것이니 서씨의 일대일문(一代一門)에서도 그 전형적인 전말을 볼 수 잇다. 서씨의 고향은…” (안재홍, ‘미국에 기려하는 서재필씨를 회<懷>함’, 삼천리 1935년 10월호 84~8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