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의 날’ 4월 7일은 서재필(徐載弼, 1864~1951) 선생이 1896년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한 날입니다.
갑신정변에 참여했다 실패, 일본으로 도망갔다 미국으로 건너 간 서재필 선생이 동아일보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22년 9월 14일자 1면 입니다.
고국 동포에게 동아일보를 통하여
미국 비부(費府·필라델피아)에서 8월14일 서재필
“이 논문은 미국에 있어서 나이 늙도록 우리 조선 민족을 위하여 애쓰는 서재필 박사의 글인데 이 글을 읽어보면 그 노(老) 박사가 얼마나 얼마나 우리 조선 민족을 위하여 마음에 울고 있는지를 가(可)히 알 것이다.”
“나는 조선에서 출생한 한 사람이오 또 조선 민족의 진보 발전을 위하여 다년 노력하여 온 한 사람임으로 나의 마음은 조선 민족에 관한 모든 일에 대하여 실로 항상 긴장한 흥미를 감(感)하나이다. 그 중에도 특히 나에게 큰 만족을 주는 한 가지 일은 우리 조선 사람의 손으로 경영이 되고 발간이 되는 일간신문 동아일보 같은 것이 생겨난 그 것 이외다. 나로 하여금 족하에게 축의를 표(表)케 하라. 그 여러 가지 곤란을 다 이기고 족하가 영예스러운 사업을 진행하여 나가는 것을 나는 충심으로부터 축하하며 또 족하는 그 여러 가지 불편을 이기고 차후(此後)로도 계속하여 그 신문을 발간할 줄을 알고 족하로 말미암아 나는 일종의 득의를 감하나이다.”
“국한문에 대한 나의 지식은 능히 귀지(貴紙)에 발표되는 모든 기사를 독파할 만큼 풍부하지 못하나 그래도 나는 귀지를 접수할 때마다 힘써 귀 사설의 대의를 포착(捕捉)하려하나이다.”
“나의 이 단편 논문을 귀지에 게재하여 나의 사랑하는 고국 동포로 하여금 외국에 망명하여 있는 우리들도 그 고국에서 발간되는 가치 있는 신문을 구독하고 그로 인하여 고국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줄을 알게 하여주소서.”
“그러나 족하가 만일 이 논문을 발표함으로 귀지에 불리가 되고 또 검열관의 악감(惡感)을 징발(徵發)할 염려가 있다고 인정하거든 사양 없이 이 논문을 몰수할지라도 나는 조금도 개의치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결코 족하에게 불리한 일이 생(生)하거나 조선에서 신문을 검열하는 관헌 당국의 악감을 발(發)케 할 희망을 지(持)치 아니하나이다. 나는 오직 조선 민족을 사랑하고 또 사랑함으로 그와 말하고자 하나이다. 그러나 그 의사(意思)를 통하는 길이 오직 귀지를 통하는 수밖에 없음을 알기 때문에 이 논문을 보내어 게재하기를 청하나이다.”
“오직 나의 희망하는 바는 귀지 독자로 하여금 내가 아직 생존하여 우리 조선 민족이 민족으로서 또 민중으로서 근대 문명 생활에 발달되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을 알게 하는 것 이것뿐이외다. 민족이나 개인을 물론하고 그 진보 발달하는 유일한 길이 교육에 있는 것은 물론이며 따라 이 교육 입는 자의 필연한 운명이 노예적 처지가 될 것은 세인이 다 아는 바 아닙니까.”
1923년 12월 1일 영문란(英文欄)이 신설되자 서재필 선생은 또 한편의 글을 보내왔습니다.
‘조선문으로 써보려고도 하였으나 조선어 논문을 쓰기에 너무 부족함을 깨달았나이다’며 영어로 쓴 이 글은 ‘개인주의와 협동주의 – 조선 민족에게 중요한 끽긴사(喫緊事)’란 제목으로 1924년 2월 26일자 1면에 번역돼 실리고 이날 자부터 사흘간 3면에 연재됐습니다.
“여(余)는 조선에서 처음 신문을 발행한 자(者)어니와 1896년에 창간하여 2년간을 계속하다가 1898년에 여(余)가 조선을 떠나매 폐간이 되고 말았고 그로부터는 귀지가 창간되기까지에는 진정한 의미로 조선인의 신문이라 할 만한 신문이 없었나이다.”
“지금에 진정을 말하거니와 귀지도 그동안에 숙생숙멸(갑자기 생겼다 갑자기 사라짐)한 타 신문보다 얼마 더 계속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였사옵더니 귀지가 이렇게 여전히 번창하고 장성하는 것을 보오니 희부자승(喜不自勝·기쁨을 이기지 못함)하나이다. 원컨댄 귀지의 공헌 많은 수명이 영창(永昌)하시고 귀지의 노역이 풍요한 실과를 결(結)하소서 하나이다.”
“귀지에서 영문란을 설(設)한 것은 여(余)의 주목을 끌었나이다. 조선의 사정을 외국에 알릴만한 무슨 기관이 필요하더니 이번에 창설한 귀지의 영문란이 일부분이나마 이 사명을 다할까하나이다. 여(余)도 당시의 여의 신문에 영문면을 발행한 일이 있었나이다. 금후로 가끔 영문 논설을 기(寄)하려하오니 만일 쓸만하거든 쓰시옵소서.”
“무론(毋論) 검열자에게 화를 당하지 않도록 주의하려하나이다. 여는 조선 민족을 위하여 무엇이나 하고자 하오나 현재의 형편으로야 귀지와 같은 언론기관을 통하여 충고하는 말마디나 드릴 것밖에 무엇을 하오리이까. 여는 조선문으로 써보려고도 하였으나 당하여 본즉 여의 조선어 논문을 쓰기에 너무 부족함을 깨달았나이다. 생각컨댄 귀지 독자 중에 영문을 해(解)하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하려니와 이들 극소수에게 말씀하는 것도 아주 아니하는 것보다는 나으리라고 생각하나이다.”
“여(余)가 이번 편지에 말하려하는 것은 조선 민족에게 가장 중요하고 끽긴(喫緊·아주 긴요함)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온데 귀지 독자 중에 다만 몇 분이라도 이것을 주의해주시면 행(幸)이겠나이다. 그 제목은 ‘개인주의와 협동주의’로소이다.”
‘개인주의와 협동주의’의 내용은 개인주의가 개인의 개성과 소질을 개발하는데 있어서 중요히지만, 우리 조선 민족은 협동 단결해야만 생존의 터전을 찾을 수 있으니,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시련은 협동단결이 부족함에 있음을 자각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문란에는 그에 대한 소개 기사도 게재됐는데 그를 ‘조선 최초의 신문기자’라 표현했습니다.
The First Korean Journalist(조선 최초의 신문기자)
Dr. Jaisohn is one of our elder statesmen of the new school. when still in his teens, he was an active member of a party headed by Kim Ok-kyun, one of the ablest leaders on modern Korean history.(서 박사는 개혁파 정치인이다. 그는 10대에 이미 근대 조선에서 가장 능력 있는 지도자의 한 사람인 김옥균이 이끄는 정당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It was in 1896 that he came back to the land of his birth. He started the first Korean newspaper in connection with the Independence Club which he founded. Our grand old man, Li Sang-chai was one of his early political converts, yet the Doctor himself now looks hardly over forty without a gray speck in his hair.(1896년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이 세운 독립협회와 연결해 조선 최초의 신문을 발행했다. 이상재 선생도 그때 함께 정치활동을 했는데, 서 박사 자신은 희끗희끗하게 센 머리만 없다면 40도 안된 얼굴로 보인다.)
…
창간기자 김동성(金東成)은 1921년 11월 11일 열린 열강들의 군축회의를 취재하기 위해 워싱턴을 방문했다 만난 서재필 선생의 인상을 아래와 같이 전했습니다.
“내가 박사를 대하기는 연전(年前) 화성돈(華盛頓) 회의 때 그때가 처음이엿슴니다. 엇지면 사람됨이 그러케도 기걸(奇傑)하고 기력차고 원만함니까, 그 화려한 안면, 우렁찬 목소리, 훨석 처다뵈는 키, 어느 것이 장부의 풍격을 뵈이지 안는 것이 업스며, 더욱이 그 물쏫듯하는 활변(活辯)이며 탁월한 의견은 확실히 당세일인(當世一人)인 감(感)이 잇습듸다.” (김동성, ‘이역풍상<異域風霜>에 기체안녕하신가, 조선의 선진<先進> – 서재필 박사’, 개벽 1925년 8월호 12쪽)
“아무리 가까운 사람한테도 ‘워싱턴’ 간다는 소리는 안하고 갔어요. 그것이 최대의 목적이었으니까…여담입니다만 그때 유명한 영국의 문호 ‘H G 웰스’도 만나 봤어요. 이 분은 그때 ‘뉴욕’에 내리면서 ‘미국은 백 년 안에 망한다’고 말해서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너희 하는 짓이 이렇게 하다가는 백 년 안에 망한다’고 말했어요…그래서 초대장이 4백장이 들어왔는데 다 거절하고 인도 대표와 한국 초대에만 응했어요. 그래서 그 때 각국 정객들을 초대하는데 이승만 박사, 서재필 박사, 작고한 황계환 씨, 정한경 씨, 나 이렇게 주인이 되고 외국 정객들을 많이 초대했어요. 그 때 H G 웰스씨도 함께 놀고 갔어요. 또 ‘돌푸’라는 변호사도 왔는데 이 분이 살아 있었으면 태극훈장 하나 탈 것인데…” (김동성, ‘창간 40주년 기념 좌담’, 동아일보 1960년 4월 1일자 5면)
그러나 워싱턴회의에서 조선의 문제는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이후 서재필은 조선의 독립이 단기간에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지금 조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이라고 더욱 굳게 믿게 됩니다.
“서재필은 1922년 뉴욕에서 개최된 3·1운동(1919) 제3주년 기념식 행사에서 재미한인들이 나아갈 방향을 밝히고 이후 자신의 활동 방향을 예시하였다. …(중략)… 이러한 그의 제안은 한국의 독립이 단기간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판단에서 근거한 것으로, 향후 교육과 훈련을 통해 차분히 실력을 길러 한국 독립을 위한 인재양성에 매진할 것을 바라는 실력양성론적인 태도라 하겠다. 이후 그는 각종 강연 활동에 참여하거나, 동아일보, 조선일보, 신한민보 등을 통한 기고 활동을 통해 한국을 위한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고자 하였다.” (홍선표, ‘서재필 생애와 민족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7, 200쪽)
1925년 2월 16일자 2면
해외 명사를 망라한 구미위원부의 최근 소식
삼일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에 미국 워싱턴에 설치된 구미위원부에서는 이번에 새 방침으로 활동을 개시하고자 얼마 전에 일부의 진용을 변경하였는데 그 씨명은 …(중략)…그밖에 서재필 박사는 연전에 개최된 군비축소회의에 참석한 이후로 계속하여 고문의 요직에 있어 활동 중이며 그 외 여러 지면의 인사들도 망라되어 있는데 서 박사는 근근 ‘하와이’에 재류하는 동포의 정황을 시찰하고자 출발하리라 하며 더욱 구미위원부의 재정적 기초도 확립이 되어 미국 각지에 있는 동포와 ‘하와이’ ‘큐바’ 등지에 산재한 형제의 해마다 내이는 세비(歲費) 십원 외에도 여러 가지로 수입의 길이 많이 있어서 모든 일을 뜻대로 활동하게 되었다더라. (하와이에서 김영기 씨) ◇사진은 구미위원부 사무실(제9층)
서재필 선생의 동아일보 기고 글
게재일 |
제 목 |
국한문 영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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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1922-9-14 |
고국동포에게 동아일보를 통하야 |
국한문 |
2 |
1924-2-26 |
조선민족에게 중요한 끽긴사(喫緊事) |
국한문 |
3 |
1924-2-26 |
INDIVIDUALISM AND CO-OPERATION(개인주의와 협동주의) |
영문 |
4 |
1924-2-27 |
INDIVIDUALISM AND CO-OPERATION(개인주의와 협동주의) |
영문 |
5 |
1924-2-28 |
INDIVIDUALISM AND CO-OPERATION(개인주의와 협동주의) |
영문 |
6 |
1924-5-13 |
COURAGE AND CO-OPERATION(협력과 용기) |
영문 |
7 |
1924-5-14 |
COURAGE AND CO-OPERATION(협력과 용기) |
영문 |
8 |
1924-5-15 |
COURAGE AND CO-OPERATION(협력과 용기) |
영문 |
9 |
1924-5-16 |
COURAGE AND CO-OPERATION(협력과 용기) |
영문 |
10 |
1924-5-17 |
COURAGE AND CO-OPERATION(협력과 용기) |
영문 |
11 |
1925-1-1 |
서재필 박사 기서(寄書) |
국한문 |
12 |
1926-6-12 |
좀 더 잘 살길은 정신물질(精神物質)의 합작(合作)에서 |
국한문 |
13 |
1927-1-1 |
신년을 당(當)하야 고국동포에게, 깃브라 일하라 배호라 서한(1) |
국한문 |
14 |
1927-1-2 |
신년을 당(當)하야 고국동포에게, 깃브라 일하라 배호라 서한(2) |
국한문 |
15 |
1935-1-1 |
회고 갑신정변 서재필박사수기(1) |
국한문 |
16 |
1935-1-2 |
회고 갑신정변 서재필박사수기(2) |
국한문 |
17 |
1935-1-3 |
체미오십년(滯米五十年) 상 |
국한문 |
18 |
1935-1-4 |
체미오십년(滯米五十年) 하 |
국한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