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은 1년에 회견 3번 했다. 경향신문 폐간(1959년 4월)되면서 권오기, 이웅희가 동아일보로 왔다. 내 후임으로 온 이웅희가 기자회견 갔다가 ‘동아일보 이웅희 입니다’라고 자기 소개를 했다. 이 대통령이 이웅희 손 잡으면서 ‘우리 민족이 동아일보 신세 많이 졌다’고 말했다. 이후 이웅희가 이 얘기를 자랑 삼아 하고 다녔다. 그래서 나도 알게 된 것이다.” (이병천 전 동아일보 기자, 2006년 11월 26일 면담)
1928년 8월 23일 인촌 김성수 선생은 하와이에서 활동하던 이승만 박사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습니다. 그 전 해에 받은 서신에 대한 답장이었습니다.
東西落落 拜面相違 常切膽慕之私 客年白君之還 特賜惠贈
感悚交極 伏惟爾後年深 體侯百福 而秋月春風 尊懷果如何
遠外溯頌 實非尋常者可比
下生省事姑保 而至若所營 去益難澁 寧不欲一一具陳 今因朴兄之便
玆問紙上之候 而多小只希情領
八月 二十三日 下生 金性洙 再拜
동서로 떨어져 있어 뵐 기회가 없으나 늘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만은 간절합니다. 지난해 백군(白君, 白寬洙)이 돌아올 때 특별히 서신을 내려주시니 감사하고 송구함이 아울러 지극합니다. 생각건대 그 뒤로 세월이 오래 되었는데 체후(體候) 백복(百福)하십니까?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존장(尊丈)의 심회는 과연 어떠하십니까? 멀리에서 우러러 송축함이 실로 보통사람에게 비할 바가 아닙니다. 하생(下生)은 부모님을 모시는 일은 그런대로 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영하는 일에 있어서는 갈수록 어려워져 차라리 일일이 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박형(朴兄)의 편에 편지로 안부를 묻고 다소간에 보내드리오니 정으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8월 23일 하생 김성수(金性洙) 재배
이 편지의 한 구절 ‘다소간에 보내드리오니’는 독립운동 자금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우남 이승만(雩南 李承晩·1875~1965)은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기도 했습니다.
동아일보에 이승만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창간 다음해인 1921년 3월 5일자 3면 ‘상해의 3월1일’ 기사입니다.
동아일보 1921년 3월 5일자 3면
이 기사는 “임시 대통령 리승만의 축사는 더욱히 내빈을 격동케 하였으며 오후 네시에 조선 독립을 삼창한 후 폐회하였는데 또 확실히 들은 바에 의하건대 임시정부는 대통령 리승만이 미국에서 많은 돈을 모아가지고 상해에 돌아온 후 비상히 세력을 확장하였고 이미 정부의 내부를 개조를 하고 다시 조선과 내외가 서로 호응하여 극력으로 군비를 모으려 하는 중이오 임시정부에서 일 보는 사람은 현재 삼백명 이상이라더라.” 며 이승만과 임시정부의 활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921년 6월 22일자에는 이승만의 도미(渡美) 도중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동아일보 6월 22일자 3면
이승만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는 것은 상해 임시정부의 극심한 내분(內紛)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었지만 그해 11월 워싱턴에서 열리는 열강들의 군축회의에 참석할 목적도 있었습니다. 그는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우선 마닐라로 갔습니다.
1921년 7월 4일자 기사는 이러한 임시정부 내분의 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동아일보 1921년 7월 4일자 3면
양기탁 통령설(統領說)/ 전연무근(全然無根)이라고
대통령 리승만은/ 방금 미국가는 중
모처에 도착한 전보를 보건대 상해 조선임시정부의 대통령을 개선한 결과 양기탁(梁起鐸)이 당선이 되였다는 말은 어떠한 일파에서 거짓말을 지어내어서 선전한 사실이 확실하고 동 정부의 대통령은 여전히 리승만(李承晩)이오 그는 방금 미국으로 가는 도중에 있다더라.(동경전보)
1921년 8월 22일자 기사는 이승만의 샌프란시스코 도착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동아일보 1921년 8월 22일자 3면
다음날인 23일자에는 ‘이승만 일파의 선전’이라는 제목 아래 이승만이 워싱턴 회의에 조선 독립을 청원한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동아일보 1921년 8월 23일자 3면
이승만 일파의 선전
화성돈 회의에 청원을 한다고
조선대통령이라 하는 리승만(李承晩)은 상항『크로니클』이라는 신문기자에게 말하기를『나는 장차 열릴 화성돈 회의에 향하여 조선에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의 원칙을 적용하기를 요구할 터이라. 향자 법국 파리(巴里)의『벨사이유』에 열린 강화회의에서는 우리는 항상 일본 외교가(外交家)의 압박을 받아왔도다. 그러나 미국은 항상 적은 나라에게 동정하는 터이라 여러 가지 사정이 법국과 같지 아니할 줄 믿노라. 조선을 독립을 원하고 또는 미국과 같이 공화국이 되기를 원하노라. 내가 미국에 향하여 청할 것은 미국인은 중국과 조선을 도와서 그 독립을 확실히 보전케 하여 아세아에 여러 나라가 세력이 평등하게 되게 함이라』고 하였다는데 이에 대하여 미국 안에서 조선의 독립을 제창하고 최근『조선을 위하여』라는 저작을 발표한「헨리 츈」(鄭翰卿)과『필라델피아』에 있는 조선 선전부장「필립 제슨」(徐載弼) 두 사람도 리승만을 원조할 터인데 화성돈 회의가 열리기 전에 각처에서 선전 연설을 할 터이라더라. (심칠일 상항발 조일신문사 도착전보)
그러나 이 기사는 바로 발매금지 처분을 받았습니다.
동아일보 1921년 8월 24일자 2면
1922년 12월 29일자는 이승만이 임시정부 대통령으로써 신년(新年)부터 적극 활동에 나선다는 소식을, 1924년 4월 6일자는 영국에 건너가 독립운동의 동정을 구할 것이란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동아일보 1922년 12월 29일자 3면 동아일보 1924년 4월 6일자 2면
그러나 이 시기 임시정부에서는 이승만을 내몰려는 움직임이 격화되고 있었습니다.
이승만은 ‘레닌자금사건’의 여파로 도미유학길에 오른 장덕수(張德秀) 동아일보 부사장 겸 워싱턴특파원이 1923년 5월 하와이에 들러 만났을 때 당시의 착잡한 심경을 털어놓았습니다.
“나더러 이 자리(임정 대통령)를 내놓고 물러가라는 사람도 없지 않소. 내가 물러가서 일만 잘되면 내가 죽기라도 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 어찌 아니 물러날 리가 있소…. 그러나 나는 내가 맡은 책임이 중한 줄을 압니다. 그 중한 책임을 함부로 내던지고 획 달아날 수가 있소?” (‘설산 장덕수’, 이경남, 동아일보사, 1981년, 216쪽)
동아일보 1924년 4월 22일, 23일자 영문란(英文欄)에는 ‘LIBERTY AND UNION’이라는 제목의 이승만 박사의 기고가 두 차례에 나눠 게재됐고 23일자에는 그 번역문이 실렸습니다.
동아일보 1924년 4월 22일자 3면 동아일보 1924년 4월 23일자 3면
동아일보 1924년 4월 23일자 1면
자유와 단결
철학박사 이승만
이 이십세기에 처하여 능히 자유권을 보전하는 민족은 문명부강에 나아가고 자유권을 보전치 못하는 민족은 남에게 밟혀서 잔멸을 면치 못하나니 이것이 지금 세계에 통행하는 소위 강권주의이라.
우리나라에도 선각자들이 있어서 수 십 년 전부터 붓끝과 혀끝으로 이 뜻을 우리 민족에게 알려주기를 시험하였지마는 기시 당국자들은 권리와 지위를 위하여 분쟁하기에 겨를 치 못하였고 전국 인민은 각각 혼자 살려고 하다가 마침내 그 화를 다같이 당한지라.
지나간 십수년래에 겪은 모든 참독한 경력이 다 한인들의 자취요 또한 상당한 벌이라. 하나님이 우리의 과거를 징계하며 우리의 장래를 개발하심이니 금일이라도 우리는 경성함이 늦지 아니하도다.
분쟁을 버려서 합동을 이루며 당파를 파하고 통일을 만들자. 나 하나를 희생하여 우리 여럿이 살게 하자. 개인의 영광과 권리를 잃어버려서 민족 전체의 복리를 도모하자. 이것이 한족의 사는 방법이며 한족이 살아야 한인이 살 수 있을 것이라.
자유가 본래 우리의 물건이오, 남에게 청구할 것이 아니니 가만히 앉아서 남이 가져다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일어나서 나아가 취할 것뿐이다. 남이 주지 않는다고 원망할 것이 아니오, 남에게 주고 앉은 우리를 자책할 뿐이다.
남의 군함 대포만 장한 세력이 아니오, 우리의 일심단결이 더욱 큰 세력이니 우리의 자유는 지금이라도 못 찾는 것이 아니오, 아니 찾는 것이다.
자유를 위하여 싸워라. 세상에 싸우지 않고 자유를 찾은 민족이 없나니 우리의 붓끝과 혀끝으로 남의 칼날과 탄환을 대적하며 우리의 배척과 비협동으로 남의 학형과 속박을 싸우자.
정의와 인도에 위반되는 일은 남에게 행치도 말고 남에게 받지도 말자. 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욕되이 사는 이보다 영광이오, 당당한 자유민의 기상으로 목숨을 버리는 것이 노예로 사는 이보다 귀하다.
공산당 사회당 등 명의로 의견을 나누지 말고 자유의 목적으로 한족당을 이루라. 오늘날 우리의 제일 급한 것이 자유라. 자유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우리의 원대로 할 수 있으되 자유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것도 할 수 없으리니 세계적 주의가 비록 크고 좋으나 우리는 민족이 먼저 살고야 볼 일이다.
금일 세계대세가 날로 변하여 우리의 희망을 성취할 좋은 기회가 앞에 많이 오나니 우리는 마땅히 서로 복종하며 서로 애호하여 대단결을 이루어서 기회가 올 때에 이용하기를 준비하리니 내지외양의 모든 동포는 이에 한 번 더 결심하라.
1924년 5월 11일자에는 하와이에 있던 이승만이 미국 각지를 돌며 연설하고 독일로 향했다는 소식을 보도했습니다.
7월 5일자에는 미국 이민법안에 대하여 이승만이 임시정부 대통령으로서 워싱턴에서 발표한 성명을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이 성명은 군데군데 많은 부분이 삭제되었습니다.
동아일보 1924년 7월 5일자 2면
미국 이민법안에 대하여
미국이 일본이민법안 통과한 것은 우리가 냉정한 태도로 볼 뿐이다.
백인이 황인을 구별하니 황인이 합동하여 백인을 대항하는 것이 옳다는 말은 진정으로 우리의 인종동등권을 위하여 하는 말이 아니오, 다만 일시에 인종적 악감을 선동하여 이용하려는 것뿐이니(삭제)
영미국 각 신문에 크게 선전되는 것을 보건대『한인들이 미국이민법을 반항하여 한성에 있는 영미 영사관을 폭탄질하려는 음모가 발각됨으로 일본 관리들이 영사관을 극히 보호한다』하는지라. 이것이 다 사실이 아니오, 악선전에서 나온 줄로 아는 사람도 적지 않지마는 남이 백계로 이용하려는 것을 모르고 그 선동에 빠지는 한인이 한 둘이라도 있으면(삭제)
우리는 동양에서 먼저 남과 같이 살자는 것이 제일 급한 문제라.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한 후에야 서양인과 관계가 어떠한 것을 의논할 계제가 있을 것이오, 만일 그렇지 아니하여 우리가 다 희생하고라도 다른 동양인이 세계에 상등대우를 받게 하자 할진대 이는 (이하 55자 삭제) 하물며 이번에 미국이민법이 우리에게 조금도 관계가 없는 것이라. 우리 이민은 막힌 지가 오래고 다른 사람만 특별한 대우를 받다가 지금에 이것이 막힌 것이니 우리에게는 조금도 상관이 없는 지라. 아주 냉정히 볼 것이다.
갑자년 유월십일 미경에서 리승만
1925년 3월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은 결국 이승만 대통령 탄핵안을 통과시켰고 곧이어 탄핵심판위원회는 대통령 면직안을 가결하고 박은식(朴殷植)을 후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습니다. 워싱턴 회의에서 한국 문제가 상정되지 못한 외교 실패에다 오랫동안 임지(任地)인 상해를 떠나 있었다는 게 주요 이유였습니다.
동아일보 1926년 5월 28일자는 대통령에서 면직된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양로원(養老院)을 세울 계획이라는 소식을 잠시 귀국한 하와이 성공회 목사 조광원의 말을 빌어 전하고 있습니다.
동아일보 1926년 5월 28일자 2면
다음해인 1927년 4월 2일자는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선생 별세에 이승만 박사가 조전(弔電)을 보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동아일보 1927년 4월 2일자 2면
이후 이승만 박사의 동정은 1932년 2월 10일자에야 전해졌습니다.
이례적으로 그의 사진을 2단에 걸쳐 크게 곁들인 이 기사는 “뉴욕타임스에 의하면 미령(米領) 하와이에 있던 리승만 박사(李昇晩 博士)는 재만동포문제(在滿同胞問題)를 협의키 위하여 워싱톤에 도래하여 체재 중이라 한다”는 아주 짧은 것이었습니다.
동아일보 1932년 2월 10일자 2면
일제하 동아일보에 그의 이름이 마지막으로 등장한 것은 1938년 9월 4일자였습니다.
경기도 경찰부의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사건 수사결과 발표를 보도하면서 ‘이승만 지령에 의해 비사(秘社) 조직코 활동’이란 제목을 큰 활자로 뽑은 것입니다.
흥업구락부는 경찰 발표대로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만든 동지회의 국내 지부격으로 1925년 3월에 결성된 단체였습니다.
동아일보 1938년 9월 4일자 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