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1928년 12월 23일자 1면
최남선(崔南善) 명(命) 조선사편수회위원(朝鮮史編修會委員)
“12월에 조선사편수회 위원이 되자 식자 간에 큰 물의를 일으키니 ‘동아일보’에서는 게재를 중단하였다.” (고려대아세아문제연구소편, 육당 최남선 전집 2권, 현암사, 1973, 330쪽)
육당의 조선사편수회 참여와 관련해 조용만(趙容萬) 선생은 ‘육당 최남선’(삼중당, 1964, 348~351쪽)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육당은 돌연히 1928년 10월에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촉탁이 되고, 그해 12월에 조선사편수회 위원이 되었다. 이 돌연한 소식을 듣고 세상 사람들은 독립선언서를 집필한 사람으로 총독부에 머리를 숙이고 들어갔다고 하여 당시에 크게 물의를 일으켰다.
총독부에서는 1922년에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하여 조선 역사를 편찬할 계획을 세웠고, 다시 1925년에는 이것을 크게 확장해서 이름을 조선사편수회라고 고치고, 최고기관으로 위원회를 두어서 이 위원회에서 조선 역사의 편수 방침을 결정하고, 그 아래 수사관(修史官)이 있어서 그들이 이 방침을 실행하게 되었다. 고문으로는 일본의 역사학자로서 동경제국대학의 교수인 구로이다 핫도리 나이도가 이에 임명되었는데, 구로이다가 주장이 되어 이 사업을 실행하게 되었다. 위원에는 이왕직 차관인 시노다, 역사학자인 오다, 이마시니 등과, 한국 사람으로는 어윤적 이능화 이병소 윤영구 등이 참가하였다. 이리하여 십개년 계획으로 사업을 진행시키게 되었는데, 편집 방침은 신라 통일 이전으로부터 연대순인 편년제(編年制)로 편찬해 나가기로 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우리나라 역사학자 사이에는 총독부에서 조선 역사를 편찬하는데, 조선 역사를 일본 역사의 한 부분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비난이 떠돌았다. 이것을 막기 위하여 조선 사람 위원들이 활약하여야 할 터인데, 네 사람의 위원들은 이름만 늘어놓았지 강경하게 총독부 당국이나 일본사람 학자와 다툴 사람이 없었다. 이리해서 유력한 우리 측의 역사학자가 위원으로 들어가서 이 일을 맡아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떠돌게 되었다. 더구나 단군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서, 이 일이 더욱 시급하게 요청되었다. 일본 학자와 당당하게 이론으로 싸움을 할 사람은 육당 밖에 없고, 육당은 단군을 자신의 학문적 양심의 생명으로 주장하는 만큼 육당이 위원으로 들어갔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으나, 독립운동의 거두인 그에게 그것을 바랄 수는 없었다.
육당의 심경은 복잡하였을 것이다. 독립선언서를 썼고, 총독부와 대항해서 열렬히 독립을 투쟁하는 터에 조선사편수회 위원이 된다는 것은 적에게 항복하는 것이 되니, 처음부터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고, 물론 죽어도 들어가지 못할 일이다. 그러나 또 한편 적의 속에 들어가서 단군을 넣자고 주장하고, 일본 역사의 한 부분이 안 되도록 적극 투쟁하는 것도 생각해볼 일이 아니라고 아주 젖혀 버릴 것만도 아니다. 이밖에 또 여러 가지 복잡한 심경 속에서 육당은 퍽 오래 고민한 나머지 드디어 결심하고 1928년 10월에 조선사편수회 촉탁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당시에 있어서 육당의 명성은 너무나 컸었고, 따라서 그에 대한 기대가 컸었으므로 육당의 이 돌연한 행동에 대해서 세상의 식자들 사이에는 크게 물의가 일어났고, 그를 통렬하게 비난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점에 대해서 육당은 이 일이 있은 지 20년 후인 1949년에 반민법 때문에 문제가 일었을 때에, 육당 자신이 자열서(自列書)라는 것을 써서, 그때의 심경을 토로하였다. 공판정에서도 사생활에 대한 구구한 변명 같으므로 이 일을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어쨌든 여러 가지 점으로 보아 당시의 육당의 심경은 몹시 복잡하고 절박하고 침통하였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이 일에 대해서 육당의 가장 가까운 벗인 순성 진학문은 아래와 같이 술회하고 있다. ‘일인의 손에 왜곡개찬(歪曲改纂)되어 그의 정체를 잃게 된 우리 역사를 강인(强引)히 정통적으로 체계를 세워 진정한 우리 국사 연구의 길을 처음으로 우리들에게 열어준 것이 곧 육당이다. 그가 단군설을 굳세게 주장하여 굽힘이 없을 뿐만 아니라, 모든 방법으로 그의 학설과 주장을 관철하기 위하여 많은 탄압도 받았고 또 그로 인하여 뜻밖의 오해를 산 일도 있다. 그가 역사편수회위원이 된 것도 자기의 학설 – 단군론을 강경히 주장하여, 그의 반대 측인 관변의 단군말살론자를 논쟁 격파하려 하였음이언마는, 도리어 일시 세간의 오해를 받은 일도 있었으매, 당시 그의 심경이야 과연 어떠하였을 것인가’(현대문학 1960년 10월호).
육당은 이름만 걸어놓았지 날마다 출근하는 것도 아니고, 위원으로서 1년에 한번 있는 위원회에 나가서 회장인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이하 총독부의 관리들과 일본의 유수한 학자 앞에서 당당히 역사 편수에 대한 의견을 말하고, 특히 단군을 뺀 데 대해서 얼굴을 붉히고 대들기도 하였다. 위원회에서 조선 사람으로 발언한 사람은 오직 육당 하나밖에 없고, 다른 위원들은 그저 앉아 있을 뿐이었다고 한다.
1938년(소화 13년) 6월에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발행한 ‘조선사편수회 사업개요’란 작은 책이 있는데, 그 제 4장, 제 3항에 ‘조선사편수회 위원회의 경과 및 그 중요 결의’라는 항목이 있어 그 위원회에서 위원들이 발언한 요지가 기록되어 있다.”
최남선, ‘자열서(自列書)’, 자유신문 1949년 3월 9일자
(전략)…나의 생활이 약간 사회적 교섭을 가지기는 12, 3세경의 문필 장난에 시(始)하지마는 그 때로부터 3·1운동을 지내고 신문 사업에 부침(浮沈)하기까지에는 이 논제에 관계될 사실이 없다. 문제는 세간의 이르는바 변절로부터 시(始)하며 변절의 상은 조선사편수위원(朝鮮史編修委員)의 수임(受任)에 있다. 무슨 까닭에 이러한 방향전환을 하였는가. 이에 대하여는 일생의 목적으로 정한 학연(學硏) 사업이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에 빠지고 그 봉녹(俸祿)과 및 그리로서 얻는 학구상 편익을 필요로 하였었다는 이 외의 다른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이래 십수년간에 걸쳐 박물관 설비위원, 고적·보물·천연기념물 보존위원, 역사교과서 편정(編訂)위원 등을 수료하여 문화사업의 진행을 참관하여 왔는데 이 길이라고 반드시 평순(平順)하지 아니하여 역사교과서 위원 같은 것은 제1회 회합에서 의견 충돌이 되어 즉시 탈퇴도 하고 조선사편수 같은 것은 최후까지 참섭(參涉)하여 조선사 37권의 완성과 기다(幾多) 사료의 보존시설을 보기도 하였다. 이 조선사는 다만 고래의 자료를 수집 배차(排次)한 것이요 아무 창의와 학설이 개입하지 아니한 것인 만큼 그 내용에 금일 반민족행위 추구(追究)의 대상될 것은 일건 일행(一件一行)이 들어있지 않을 것이다. 조선사 편수가 끝남에 그 임직자들이 이리저리 구처(區處)되는 중에 내게는 어느 틈 중추원 참의라는 직함이 돌아왔다. 그런지 1년여에 중추원 대문에도 투족(投足)한 일 없고 소위 만주국립건국대학 교수의 초빙을 받아서 감에 중추원 참의는 자연 해소되었다. 만주대학으로 갈 당초에는 인도에서는 간디, 러시아에서 트로츠키, 중국에서는 호적(胡適)을 민족 대표 교수로 데려온다 하는 가운데 나는 조선 민족의 대표로 가는 셈이었지마는 조선의 일본 관리는 민족 대표란 것이 싫다 하여 백방으로 이를 방해하고 일본의 관동군은 그럴수록 대표의 자격이 된다 하여 더욱 잡아 끌어가는 형편이었다. 저희들 사이의 이상파와 현실파의 갈등은 건국대학의 최초 정안(定案)을 귀허(歸虛)하게 하였지만 나는 그대로 유임(留任)하여서 조선 학생의 훈도와 만몽문화사(滿蒙文化史)의 강좌 기타를 담당하고?조강(祖疆)의 답사와 민족 투쟁의 실제를 구경하는 흥미를 가졌었다. 건국대학의 조선 학생을 어떻게 훈도하였는가는 당시의 건대 학생에게 알아봄이 공평한 길일 것이다.…(후략)
만주건국대학의 제자인 강영훈 전 국무총리의 증언(2006년 9월 21일)
“영변에서 농업학교를 다녔는데 3학년 때 조선어 독본이 없어졌다. ‘조선 사람이 조선어 독본도 못 배우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이 ‘조선총독부 지시이다. 조선어 독본은 꼭 교실에서만 배우는 게 아니다. 밖에서도 얼마든지 배울 수 있다’고 해 영변 책방에서 조선문학전집 열 몇 권짜리를 사 열심히 읽었다. 그러면서 민족에 대한 생각을 조금씩 하게 됐다. 왜 우리 조선 민족은 일본 사람에게 얽매여 살아야 하느냐. 왜 이렇게 됐는지 알고 싶었다. 농업학교 가지고는 안 되겠다, 대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5학년 때 어느 제국대학을 가느냐 하고 있을 때 9월에 만주건국대학 입시요강이 붙었다. 5족(族) 혁파를 한다며 조선 민족 대표 교수로 육당 최남선이 있었다. 눈이 번쩍 띄었다. 3·1독립운동 선언문을 만든 육당 선생이 거기 있다면 그 곳으로 가야 하겠다고 마음먹고 조선 학생 7명이 갔다. 육당 선생의 첫 마디가 ‘우리는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조선 사람이다. 내선일체 얘기하는데, 말도 안 된다.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했다. 이런 소리는 이 때 처음 들었다. 역사에 관해 환하고, 불교에 대해 환하고 말을 잘했다. 주말에는 5, 6명이 선생님 댁에 갔다. 민족, 불교, 역사에 관한 것 등 말씀 듣고 사모님이 점심해 주는 것 잘 먹고 했다. 그렇게 3년을 다니니까, 선생님에게 푹 빠졌다. 선생님에게 기미독립선언문 작성하고 인쇄했는데 왜 33인에 들어가지 않았냐고 물어봤다. 선생님은 ‘내가 왜 안 들어가려 했겠나. 죽기를 각오하고 하는 것인데. 이름이 들어가려 하니까 노인들이 이름 넣지 말라, 젊은 사람은 이갑성 한 명만으로 족하고 다 붙잡혀 갈 테니 빨리 도망가라고 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래도 붙잡혀서 옥살이를 했다. 만주건국대학 본과에 올라갔을 때 학병문제가 나왔다. 육당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하니 육당이 ‘나가라. 일본 천황과 군대를 위해 나가라는 것이 아니다. 조선 민족을 위해 나가라. 조선은 힘이 부족해서 이렇게 되지 않았나. 우리가 왜 이 기회를 놓치냐. 전쟁 가면 생명 위험한 것 다 안다. 반드시 살아오는 사람이 동료의 시체를 넘어 이 민족을 위해 일하게 된다’고 했다. 이 말씀 듣고 만주건국대학생은 다 나갔다. 해방 후 이북에서 넘어오자마자 육당에게 인사갔다. 1년에 몇 번은 찾아뵀다.”
그러나 아래와 같은 비판적 시각도 있습니다.
“조선총독부의 조선인사학가 포섭공작은 여전히 계속되었으며, 그리하여 최남선이 위협과 유혹에 견디지 못하여, 1928년 12월 20일 ‘조선사편수회의 위원으로 임명한다’는 일본국 내각의 임명장을 받게 되었다. 최남선의 이 변절에, 사가(史家) 정인보 등은 최남선이 죽었다는 조문을 썼으며, 한편 ‘익살스러운 일부 사학가들은 종로 명월관에 모여들어, 굴건제복(屈巾祭服)의 차림으로써 제상을 벌여 놓고, 최남선이 죽었다고 방성대곡하면서, 최남선의 장례를 지냈다.’는 풍문이 조선인사회에 널리 떠돌았다.” (문정창, ‘일본군국조선강점 36년사-중권’, 백문당, 1966, 460쪽)
“조선사편수회는 총독 직할의 독립 관청으로서 식민사학의 총본산이었다. 여기에서는 『조선사(朝鮮史)』37권, 『조선사료집진(朝鮮史料集眞)』3질, 『조선사료총간(朝鮮史料叢刊)』22권 등을 편찬하였다. 이는 일제가 통치 목적상 유리한 것만을 취사선택하여 채록하고 한국의 민족 등 본질적 문제와 불리한 것은 제외한 당시 이용될 수 있는 유일한 식민사학사료집이었다. 이와 함께 1924년 경성제국대학을 설립, 일본의 저명한 역사학자를 교수로 초빙하여 조선사편수회와 함께 한국사 왜곡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 두 식민지 통치기구는 한국사 왜곡의 양대 조직이었다. 일제는 이에 그치지 않고 양대 조직의 구성원, 즉 조선사편수회의 위원·수사관·촉탁 및 경성제대 교수들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역사연구 단체를 조직하여 식민사학의 체계를 수립, 정형화하고 조선총독부 권력의 후원으로 이를 일반에 보급시켜 나갔던 것이다.” (박걸순<朴杰淳> 충북대 사학과 교수, ‘1920년대의 민족주의사학’,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34권 국학운동, 독립기념관, 2009, 219쪽)
‘단군과 삼황오제(三皇五帝)’ 73회가 게재돼야할 동아일보 1928년 12월 17일자 3면에는 오세창(吳世昌) 선생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대한 육당의 서평과 함께 부인기자 최의순의 육당 인터뷰기사가 실렸습니다. 육당의 조선사편수회 참여가 논란이 되기 전에 인터뷰한 것입니다.
1928년 12월 17일자 3면
서재인(書齋人) 방문기 육당 최남선씨
반날을 서재에서만 (부인기자 최의순)
세계 문화를 연구하는 첫 걸음으로 우선 상고사(上古史)인 단군 중심의 원시 문화에 관한 결론을 맺으려고 주야 연구 중에 있는 육당 최남선 씨의 서재를 기자는 고이 두드렸습니다. 낙산 위 높이 올라앉은 듯한 서재는 옛 이야기에 나오는 세속을 멀리한 고적한 수양 터 혹은 정소한 초당과 같이 보일뿐이어서 별안간 은은한 기분에 에워싸이는 듯하였습니다.…(중략)…“요사이 내 생활을 이야기하라고 하십니다만 별 신통한 것이 있겠습니까. 특히 좋아하는 책이란 없습니다. 항상 읽는 것이 역사에 관련되는 서적이며 그 외에 과학편의 것도 참고할만한 것은 늘 봅니다. 과연 날이 가고 새날이 올수록 연구하는 넓이가 좁아질 따름인 동시에 깊이만 깊어진다고 할는지요. 요사이 집필 중에 있는 것은 ‘삼황오제’입니다.”하며 씨는 묵묵히 무슨 생각에 잠긴 듯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루에 어느 때 제일 많이 쓰시게 됩니까” “대개 아침입니다. 나는 새벽에 깨어 쓰기를 시작하여 오전 동안은 될수록 고대로 계속합니다마는 열시쯤만 되면 객들이 많이 방문함으로 자연히 중단되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면 아침식사 같은 것은 어느 틈에 하십니까” 씨는 이 대답을 주기 전에 우선 웃음을 펴놓으며 “나의 아침밥은 항상 열두시 이후입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두 때만 먹게 됩니다. 그리고 좀 부끄러운 소리지만 세수하는 것도 오정이 ‘뗑’쳐야 합니다. 나의 나쁜 버릇이라고 할지요”하고 다시 한 번 크게 웃으며 “그러나 본시 게을러서 그렇다고는 못할 듯합니다. 그 대신 책과 붓하고 옆도 아니 보고 정신노동을 하니까요.”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한 이후 육당이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은 ‘조선역사강화(朝鮮歷史講話)’가 유일합니다. 1930년 1월 14일부터 3월 15일까지 51회에 걸쳐 연재되기 전 육당은 이 글을 게재하게 된 경위에 대해 직접 설명합니다.
1930년 1월 12일자 4면
조선역사통속강화는 어떻게 쓴 것인가 (최남선)
(전략)…이 소저(小著)는 작년 중에 단행본을 내자 한 것이러니, 아직껏 내지 못하고, 이제 동아일보의 간촉(懇囑)을 인(因)하여 우선 지상(紙上) 보급의 길을 한번 밟기로 한 것이며, 또 이것보다도 더 간단히 하여 학교의 교과에 적용하도록 한 별저(別著)도 불원에 부인(付印)하기를 준비하고 있다. (1월 10일 야<夜>, 일람각에서)
육당은 또 이 글에서 “조선인의 자주적 입장에서 민족 사회 문화를 인과적, 체계적으로 서술하고자 했다”며 “학자나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을 대상으로 일관적(一貫的)이고 연기적(緣起的)으로 쉽게 쓰려고 했다”고 밝혔습니다.
‘조선역사강화’는 ‘육당 최남선 전집’ 첫 권 첫머리에 실릴 정도로 육당의 대표작일 뿐 아니라 한국통사에서도 획기적인 저술이라는 평 입니다. 이 연재물은 1931년 ‘조선역사’라는 제목으로 발간됐는데 당시에도 ‘조선문으로 쓰여진 대표적 통사’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조선역사’는 출간 당시 ‘조선 민족과 조선 문화의 발전과정을 과학적 방법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조선문으로 쓰여진 대표적 통사’로 평가되었을 뿐 아니라(신석호, ‘조선역사 서평’, 청구학총 5, 1931, 182~184쪽), 근래에도 ‘현채(玄采)의 ‘중등교과 동국사략’ 이래 한국사 저술의 소성’으로 사학사에서 획기적 저술로 평가되고 있다(이기백, ‘한국사 연구에서의 분류사 문제’, 한국사학의 방향 5, 81쪽). 즉, 계몽사학에서 근대사학으로 전이하는 분기점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박걸순, ‘1920년대의 민족주의사학’, 268~269쪽)
‘조선역사’는 그럼에도 책 말미에 붙인 부록 ‘역사를 통하여서 본 조선인’이라는 논문이 해방 후 비판을 받습니다. “미지근하고 탑작지근하고 하품 나고 졸음까지 오는 기록의 연속이 조선 역사의 외형”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나라의 하나이고 문화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오래도록 민족적 응집과 국가적 성립, 역사적 단락이 똑똑하지 못한 점” 등의 내용이 조선 역사와 조선인을 비하했다는 것입니다. 이 논문은 동아일보에는 실리지 않았는데 동아일보에 게재된 것으로 일부 잘못 알려져 있습니다.
만주건국대학 교수 시절 육당은 만선일보(滿鮮日報)의 편집고문도 맡았습니다.
“당시 건국대학 교수로 초빙되어 있었던 육당 최남선 선생이 편집고문이었었다.…(중략)…새로 출발하는 신문인데다가 그나마도 만주에서의 우리말의 유일한 신문이라는 점에 서로 그런 말은 자질구레하게 하지 않으나 어떤 사명감 같은 것을 느꼈음에 틀림이 없을 것이었다. 편집국의 분위기가 지극히 화목했고 협조적이었다. 그것은 간부급의 인품 때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떻든 나는 이 시기처럼 직장에서 맡은 일에 열중한 기억이 드물다. 그걸 것이 고문(최남선), 국장(염상섭), 부장(박팔양)이 평소 존경해마지 않던 분들이었고…(중략)…이 시기의 잊혀 지지 않는 것은 편집회의였다. 자주 있은 것은 아니었으나 육당 선생도 참석하는 이 회의는 편집회의라기보다 육당 선생의 강의시간 같은 느낌이 짙었다. 신문 제작에 대한 것을 대강 이야기한 뒤에 어떻게 화제가 번지면 육당께서 그 해박한 지식과 견해를 숨김없이 피력했다. 그것도 학문상의 딱딱한 것이 아니고 지나간 생생한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는데 가령 신문학 초창기의 숨은 일화 같은 것, ‘광수가 이렇게 주장하는 걸 나는…’ 이런 식의 화법이었었다.” (안수길, ‘육당의 강의시간 같은 편집회의’, ‘언론비화 50편’, 한국신문연구소, 1978, 368~369쪽)
“1957년 10월 10일 세상에서 이르기를 ‘말하는 사전’이라던 그는 일생의 염원이던 역사 사전을 마치지 못한 대로 깊이 잠들었다. 그와 필자는 50년의 교분이 있다. 일제가 한창 강성하고 이 나라가 암흑기에 있을 1917년경 그에게 ‘우리 전도가 어찌될 것인가, 절망인가’ 물었더니 그는 웃으며 ‘그렇다고 일 아니할 수야 있나요. 일하여야지요’ 하였었다. 어떤 절망 속에서도 그는 일해야 한다는 견해였다. 그의 좌우명은 ‘태양같이 빛나게, 냇물같이 꾸준히, 부지런히 부지런히, 게으름으로 평생의 적을 삼자’는 것이다. 그도 역시 불행한 세대에 나서 그의 이상인 ‘태양같이 빛남’에는 몇 번이나 구름이 덮여서 흐릴 때도 있었으나 냇물같이 꾸준히 일하였다. 그의 사업기념전시회에 늘어놓은 유적을 지난 10월 10일 그의 돌아간 날에 보니 연대별로 늘어놓은 것이 길고 긴 줄을 이루었다. 한 개인으로 이만한 문화 공헌을 하고도 만년에는 대체로 실의의 날을 보낸 것을 회고하면 형언할 수 없는 감상이 가슴을 덮는다.” (유광렬, ‘한국의 기자상 17 – 최남선 선생’, 기자협회보 1967년 11월호, 4면)
1954년경 한국사를 강의하는 육당 최남선 (사진제공 노양환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