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1925년 8월 1일 동아일보의 촉탁기자가 된 육당 최남선은 사설, 칼럼, 역사기획물, 기행문 등을 신문에 쏟아냅니다.


  육당이 처음 쓴 1면 사설은 8월 4일 동화작가 안데르센(1805~1875) 50주기를 맞아 쓴 ‘동화와 문화’. 육당은 ‘동화의 교육적 효과와 문화적 가치를 고려할 때 조선에서도 프랑스의 페로, 독일의 하우프, 영국의 와일드, 덴마크의 안데르센이 나와야한다’고 했습니다.


1925년 8월 12일자 1면 사설 ‘동화와 문화’




  사설을 쓴 사람의 이름이 나와 있지 않지만 이 글은 고려대아세아문제연구소에서 육당의 글로 ‘인증’했습니다. 이 연구소는 6년여의 작업 끝에 육당 전집을 내놓으면서 ‘선생의 작품이라는 심증’이 뚜렷한 것을 제외하고 서명이 없는 것은 수록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고려대학교의 부설연구기관 아세아문제연구소는 이러한 뜻에서 때마침 1967년 10월 10일, 육당 최남선의 10주기에 영윤(令胤) 최한웅 박사로부터 선생의 애장본 2만2천여 책을 기증받은 것을 계제로 하여, 학계의 관계 인사로 육당전집편찬위원회를 구성하고 본격적으로 그 편찬사업에 착수하였던 것이다.…(중략)…선생의 그 방대한 업적이 폭넓은 연대에 걸쳐서 신문 잡지 혹은 단행본 등 수많은 간행물에 흩어져 수록되어 있는 까닭에, 그것을 남김없이 수집 정리하여 전 16권에 달하는 전집으로 편집하기까지 실로 만 6년 유여(有餘), 그동안 이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본 편찬위원회는 기술적으로도 실로 어려운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 짓지 않으면 안 되었다.…(중략)…무서명(無署名)의 글은 전집에 수록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선생의 작품이라는 심증이 뚜렷한 것은 열외로 하였다.” (김준엽 <고려대아세아문제연구소장·육당전집편찬위원회위원장>, ‘간행사’, 육당 최남선 전집 1권, 현암사, 1973, 7~10쪽) 


  이즈음 육당이 동아일보에 쓴 사설은


  – ‘비미(秘謎)의 일환멸(一幻滅)’(역사, 1925년 8월 15일자 1면)


  – ‘비스마르크를 회(懷)함’(전기, 1925년 8월 26일자 1면)


  – ‘가을이 왔다 새 세계의 전개를 보자’(수필, 1925년 9월 7일자 1면)


  – ‘자기망각증(自己忘却症)’(교양, 1925년 9월 8일자 1면)


  – ‘화중련(火中蓮)’(문화, 1925년 9월 26일자 1면)


  – ‘고산자(古山子)를 회(懷)함’(2회, 전기, 1925년 10월 8일자~10월 9일자 1면)


  – ‘유산(遊山)의 철’(2회, 교양, 1925년 10월 17일자~10월 18일자 1면)


  – ‘아사인수(我史人修)의 애(哀)’(2회, 역사론, 1925년 10월 21일자~10월 22일자 1면)


  – ‘참지 못할 일가(一呵)’(5회, 종교 사상, 1925년 10월 25일자~10월 31일자 1면)


  – ‘곡백암(哭白庵) 박부자(朴夫子)’(전기, 1925년 11월 5일자 1면)


  – ‘개천절’(종교 사상. 1925년 11월 18일자 1면)


등으로 그의 박학강기(博學剛氣)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특히 ‘개천절’을 통해서는 음력 10월 초사흗날을 맞아 개천절을 기념하자고 역설했습니다. 지금은 일제의 압박 아래 신음하고 있지만 언제나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말고 간직하자고 다짐하는 내용입니다.


1925년 11월18일 1면 사설 ‘개천절’


  ‘시월상달’ 은 우리 조상이 5천년, 아니 1만 년 전 부터 일 년에 한 번씩 조선심(朝鮮心)을 깨끗이 하고 가다듬고 반성하는 성스러운 날로 기념하는, 단군 성조가 조선을 이 땅에 세운 기원절이다.…(중략)…각인(各人)의 생명은 짧다. 그렇지만 각 조선인(各 朝鮮人)의 사명은 길다.…(중략)…조선인 우리가 ‘동방의 빛’의 사도이기는 아득한 옛 날 옛 적에서나 4천3백년  전쯤으로 끊어 말하는 단군의 개천 기원 당시에서나 해모수 때에나 을지문덕 때에나 화랑 때에나 동학(東學) 속에서나 똑같고 털끝만큼 다를 리 없는 것이다.




  육당은 벽초 홍명희가 시작한 동아일보의 인기칼럼 ‘학창산화(學窓散話)’의 필자로도 활약합니다. 8월 14일 ‘사고전서(四庫全書)’가 ‘육당(六堂)’이란 필명으로 나간 뒤 무기명으로 ‘백색(白色)’(8월 29일~10월 1일, 22회) ‘추석’(10월 2일~11월 1일, 17회) ‘중양’(重陽, 10월 27일) ‘상달’(11월 21~24일, 2회) ‘되무덤이(고인돌이란 뜻)에서’(12월 6~31일,13회) 등을 썼습니다.




  다음해인 1926년 병인년은 동아일보는 물론 조선 사회에서 ‘육당의 해’로 불릴만한 한 해였습니다. 일 년 내내 계속된 육당의 ‘단군론(檀君論)’과 ‘백두산근참(白頭山覲參)’ 연재는 육당을 단군 연구의 1인자이자 당대의 역사가로 자리매김하게 만듭니다. 또 이들 연재로 동아일보는 민족지로서의 성격을 뚜렷이 합니다.




  먼저 신년호에 민족의 정체성과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육당의 특집기사가 실립니다. ‘조선 사상 세계적 사실(事實)’이란 제목의 이 3회 연재물에서 육당은 ‘조선 역사상 세계에 자랑할 만한 세 가지 조선 민족의 역사적 보배’로 ‘고려 선종 3년에 간행한 팔만대장경, 조선 세종조 28년에 훈민정음을 완성한 것, 고종 3년에 조선이 세계와 처음으로 접촉의 문을 열게 된 병인양요(丙寅洋擾)의 발발’을 들고 있습니다.


1926년 1월 1일자 기(其) 4-2면 


 


   바로 옆 ‘호랑이-조선 역사 급(及) 민속 지상의 호(虎), 건국 초두(初頭)이래 구원(久遠) 조선의 표상’이란 기사도 호랑이의 해를 맞아 쓴 육당의 글입니다. ‘중국의 용처럼, 인도의 코끼리처럼, 이집트의 사자처럼, 로마의 이리처럼, 조선에서의 신성한 동물은 첫째 호랑이라 할 것’이라고 시작되는 이 글은 모두 7회 연재됩니다.


  동아일보가 총독부 산하 조선교육협회 월간 일본어 기관지 ‘문교(文敎)의 조선’ 2월호에 실린 경성제국대학 예과부장 오다 쇼고(小田省吾) 교수의 논문 ‘소위 단군 전설에 대하여’를 반박한 것도 육당을 통해서 입니다.


  오다 교수의 글은 제목부터 ‘소위’ 라 하여 단군 전설을 비하하고 부인하는 내용으로 민족감정상 묵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육당은 2월 11일과 12일 양일에 걸친 사설 ‘단군 부인(檀君 否認)의 망(妄)-문교의 조선의 광론(狂論)’에서 이 논문의 이면에는 단군을 조선의 역사에서 제거하려는 일제의 계획적인 조선정신말살음모가 숨어 있다고 통박했습니다.


1926년 2월 11일자 1면 사설 ‘단군 부인(檀君 否認)의 망(妄)-문교의 조선의 광론(狂論)


  “조선의 역사로서 단군을 삭거(削去)하려 함은 일본 학자의 전통적 유견(謬見·잘못된 견해)일 뿐 아니라 또 일본 위정자들의 조선 정신을 잔학(殘虐)하는 그의 일 필요(一 必要) 수단을 삼는 바니 여기 대하여 곡학첨관(曲學諂官·학문을 곡해하여 관에 아첨함)의 추학구(醜學究·추한 학문 연구)가 학문의 탈을 씌운 비학문의 꼭두각시를 만들어 낸 것은 일(一), 이(二)에 그치지 않는다.”


  이어 1926년 2월 17일자 1면에는 이 망언을 논박하기 위해 육당의 ‘단군사론’을 곧 연재할 것이라는 사고가 뒤따랐습니다.


1926년 2월 17일자 1면 사고


  사고는 “단군이 우리 조선 민족의 혈육의 조(祖), 정신의 조(祖), 문화의 조(祖)로 우리 민족의 숭앙의 표적이요, 조선 역사의 근원이요, 중심 문제임은 물론이어니와 육당 최남선 씨의 심혈을 뿌린 연구의 결과로 단군 문제는 일본 역사, 중국 역사, 일반 동양 제 민족의 역사 문제의 관건인 것이 분명히 되었다. 육당의 단군 연구로 하야 조선사, 일본사 및 동양사는 근본적으로 개조되리라고 한다.”면서 “최 육당이 ‘이 글을 쓴 뒤에 붓대를 내어 던져도 좋다’는 결의를 보였다.”고 전합니다. 육당은 옥중에서 착안했던 ‘밝’과 ‘당굴’을 토대로 3월 3일부터 7월 15일까지 무려 77회에 걸쳐 ‘조선을 중심으로 한 동방문화연원연구(부제)’를 설파합니다.




  1926년 3월 3일자 1면 단군론 (1)


  조선이 동아(東亞) 최고(最古)의 일국(一國)으로 단군이 그 인문적 시원(始源)이라 함은 조선인이 오래전부터 전신(傳信)하는 바이다. 유문(遺文·남겨진 문헌)이 간략하야 그 상(詳)을 얻기 어려우나 조선 민족의 연원과 문물의 내력을 오직 여기에서 징고(徵考)할 밖에 없을진대 독일(獨一)한 유주(遺珠·잃어버린 구슬)이기에 더욱 그 보배로움을 볼지니…(중략)…더욱 조선은 동아에 있어서 중국 이외에 수천년 통관(通貫)한 국토와 문물의 유일한 보유자요, 겸하야 그 인문지리적 위치가 민족 및 문화 유동의 간선(幹線)에 당(當)하야 사방의 풍우(風雨)가 대개 흔적을 여기 머물렀으니 단군이 어찌 조선사만의 문제며 조선이 어찌 동앙사만의 문제랴.…(후략)




    
                                 단군론 (1)                                                                           단군론 (11)






  1926년 4월 29일자 1면 단군론 (11)


  일본인이 조선의 권력을 잡으매 무엇보담 먼저 애쓴 것이 어떻게 하면 조선심(朝鮮心)을 억제하고 전멸(剪滅)할 것인가의 문제였다.…(중략)… 이렇게 함에는 군인과 관리의 머리와 손만으로는 만만히 되지 않을 줄 깨달음에 자기네의 형편에 합당한 몇몇의 학자를 데려다가는 ‘어용(御用)’을 사명(使命)하려고 하였다.…(중략)…그래서 생겨난 것이 ‘반도사편찬회(半島史編纂會)’란 것이다.…(후략)


  이 연재물이 끝나기 전, 동아일보와 육당은 또 다른 기획물을 준비합니다. 민족의 성산(聖山)으로 민족의 신화가 얽혀 있는 백두산을 참근(參覲)하기로 한 것입니다. 동아일보는 6월 22일 ‘백두산 참근대 파송’이란 제목의 사고로 육당과 박한영(朴漢永) 두 사람이 7월 중순에 등정함을 알립니다. 육당은 이어 22일부터 24일까지 쓴 사설 ‘백두산의 신비’에서 백두산의 신비한 실체를 발견해온 조선인의 총명을 내세우면서 ‘백두산은 분명히 인간에 있는 천국의 분토(分土)요, 여기에 생긴 신시(神市)는 민족의 연원이고, 이곳에 탄육(誕育)된 단군은 국권의 남상(濫觴)이요, 진토(震土)에 있는 일체의 민족 문물은 총(總)히 이 대원(大原)으로부터 분파만연(分派蔓延)된 소류세조(小流細條)라고 믿어온’ 우리 선조의 사상을 풀이하고 있습니다. ‘한국잡지백년 1’(현암사, 2004)을 엮고 쓴 최덕교 씨는 “‘근참(覲參)’이란 위대한 인물이나 존경하는 이를 찾아뵙는다는 뜻이니, 이 경우 백두산을 오르는 그의 정신 자세를 헤아리게 한다.”고 평했습니다.




  “행정(行程)은 겨우 3주간이었습니다. 이 동안에 장백의 일만 척 정상을 극하며 압록의 이천리 유역을 내리는 것이매, 관찰의 주도(周到)와 고험(考驗)의 심밀(深密)을 기할 수 없음은 물론이요, 또 맥진(驀進·좌우를 돌볼 겨를이 없이 매우 기운차게 나아감)과 노처(露處)로 군대하고 행동을 한 가지 하매 연사탁문(練思琢文)은 본디 생심(生心)도 할 수 없는 일 이었습니다 마는, 백두산 있어 온 뒤로 아직 문적(文籍)다운 것이 하나도 없고, 또 변변치 아니한 문자라도 백두산 의식을 환성(喚醒)하는 일 자극이 되지 말란 법도 없을까하여 혹 군마(軍馬)의 티끌을 뒤집어쓰고 혹 노영(露營)의 겨를을 훔쳐서 행중(行中)의 실력(實歷)과 도상(途上)의 만감(漫感)을 약간 기록하여, 우편 닿는 대로 ‘동아일보’로 보내었습니다.” (최남선, ‘백두산 근참기 권두에’, 육당 최남선 전집 6권, 15쪽)


1926년 7월 28일자 1면


 


  백두산근참 (1) -광명은 동방(東方)에서


  순일(旬日)에 걸친 음우가 겨우 거치고 오래 피신하였든 태양이 다시 위용을 내놓건마는 찌는듯한 무더위가 오히려…(중략)…한양 5백년의 찌든 산하와 궁예 천년의 묵은 자최의 감흥은 벌써 더위의 아가리로 쏙 들어가 버리고…(중략)…겨우 명상의 길목을 얻어서 비로소 이것저것을 다 잊어 버리는 기회를 얻었다. 백두산을 가다니? 손바닥만한 조선 반도가 도모지 백두산 하나가 하늘을 뚫고 우뚝 솟는 통에 생겨난 주름살이오, 터진 금인 것들이어늘 이제 따로 간다는 백두산이 어디란 말인가…(후략) 




  이날(7월 28일)부터 다음해 1월 23일까지 모두 89회에 걸쳐 동아일보 1면을 장식한 ‘백두산 근참기’는 ‘심춘순례’와 함께 민족 사상을 연면히 엮은 육당의 대표적 기행문으로 꼽힙니다. 지리산 일대의 백제 지역을 답사한 ‘심춘순례’는 조용만 선생의 착각(육당 최남선, 삼중당, 1964, 232쪽)과 육당 최남선 전집의 착오(6권 389쪽)로 동아일보에 연재된 것으로 일부 알려져 있지만 육당이 동아일보에 들어오기 바로 전, 시대일보에 실렸습니다.




  육당이 이해 말 내놓은 근대 이후 최초의 창작 시조집 ‘백팔번뇌’(동광사)엔 동아일보에 실었던 ‘속닙나는 잔디’(4월 29일자 3면) 같은 시조가 들어있습니다. 양주동은 ‘육당 최남선’(344~345쪽)에 기고한 ‘육당 선생과의 학연’이란 글에서 “‘백팔번뇌’는 그때 그가 ‘조선’이란 님에게 바친 뜨거운, 뿌리 깊은 ‘사랑’과 괴로움의 노래로써 엮어진 그의 대표적 시조집으로, 조그만 책자이나 시조 사상의 한 중흥기념탑이 될 만한 역작”이라며 “거기는 춘원 위당 벽초 등 당시 문단의 거벽들의 서(序) 발(跋)이 즐비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으로 15,6년 전부터 육당과 지금 벽초인 그때 가인과 나와 삼인집(三人集)을 하나 내어보자고 여러 번 이야기가 되었었다.” (이광수의 발문-육당과 시조) 




  “육당과 나는 20년 전부터 사귄 친구다. 성격과 재질에는 차이가 없지 아니하지마는, 사상이 서로 통하고 취미가 서로 합하여 가로에 어깨 겯고 거닐며 세태를 같이 탄식도하고 서실(書室)에 배를 깔고 엎드려 서적을 같이 평론도 하였었다. 내가 남의 집에 가서 자기 시작한 것이 육당의 집에서 잔 것이며, 육당이 북촌 길에 발 들여놓기 시작한 것이 내 집에 온 것이었었다. 이와 같이 교분이 깊던 우리 두 사람이 세변(世變)을 겪은 뒤에 서로 흩어져서 오랫동안 서로 만나지 못하였고 서로 만나지 못하는 동안에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차이는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그러나 통하던 것이 막히지는 아니하였고 합하던 것이 떨어지지는 아니하였다. 지금이라도 육당의 일을 말하여 그 장단득실을 바르게 판단함에는 근년 육당의 주위에 모였다 헤졌다 하는 사람들보다 내가 나으리 라고 자신하니,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 두 사람이 집안에서 곱게 자란 채로 적어도 깊이 세상에 물들기 전에 사귄 까닭이다.” (홍명희의 발문) 




  “나와 춘원과 홍모가 주로 ‘소년’에다 글을 쓴 셈이다.” (최남선, ‘한국 문단의 초창기를 말함’, 육당 최남선 전집 4권<역락, 2003>, 107쪽 ; 1955년 1월 ‘현대문학’ 창간호)




  1928년에도 육당은 신년호부터 단군에 관한 글을 싣습니다. 단군이 나라를 세운 무진년 72갑주(甲週)를 맞아 단군 신전의 의의를 짚은 ‘조선 문화의 일체 종자(種子)인 단군 신전의 고의(古義)’가 2월 28일까지 39회 연재된데 이어 6월초 ‘조선유람가’가 10회 실리고 다시 8월 1일부터 ‘단군과 삼황오제(三皇五帝)’가 12월 16일까지 실리다 72회로 돌연 중단됩니다.




1928년 1월 1일자 기(其) 2-3면


                                                


  조선 문화의 일체 종자인 단군신전의 고의(1)  


  무진년(戊辰年)을 역사적으로 회고하면 그것이 단군 건국이라는 조선사 탄생이 대 사실로써 절대한 감격을 자아내게 됩니다. 신라의 삼국 통일도 무진년(21주갑전·甲前)의 일이며 이 태조의 위화도 회군도 무진년(9주갑전·甲前)의 일입니다. 단군의 해라 할 무진년을 기념함에는 오직 순일한 마음으로 단군을 기념하며 단군 원리를 흠구하며 단군 실적을 정해(正解)하여 단군과 그 사실로부터 오는 우리의 전통 생명에 자윤(滋潤)과 새 흥분을 줌이 아무것보다 적절한 일일 것입니다.




동아일보에 실린 최남선 글 

(전집은 고려대아세아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육당 최남선 전집’, 현암사, 1973년을 말함)


번호

게재일

제목

글 성격

기명·무기명

전집

1

1925-08-12

童話와 文化

1면 사설

무기명

9권 303쪽

2

1925-08-14

四庫全書 학창산화

무기명

9권 602쪽

3

1925-08-15

秘謎의 一幻滅

1면 사설

무기명

9권 35쪽

4

1925-08-26

비스마르크를 懷함

1면 사설

무기명

10권 82쪽

5

1925-08-29~


1925-10-01

白色(22회)

학창산화

무기명

2권 445쪽

6

1925-09-07

가을이 왔다 새 世界의 展開를 보자

1면 사설

무기명

5권 435쪽

7

1925-09-08

自己忘却症

1면 사설

무기명

10권 216쪽

8

1925-09-26

火中蓮

1면 사설

무기명

9권 305쪽

9

1925-10-02~


1925-11-01

秋夕(17회)

학창산화

무기명

9권 546쪽

10

1925-10-08~


1925-10-09

古山子를 懷함(2회)

1면 사설

무기명

10권 84쪽

11

1925-10-17~


1925-10-18

遊山의 철(2회)

1면 사설

무기명

10권 218쪽

12

1925-10-21~


1925-10-22

我史人修의 哀(2회)

1면 사설

무기명

10권 482쪽

13

1925-10-25~


1925-10-31

참지 못할 一呵(5회)

1면 사설

무기명

9권 175쪽

14

1925-10-27

重陽

학창산화

무기명

9권 559쪽

15

1925-11-05

哭白庵 朴夫子

1면 사설

무기명

10권 87쪽

16

1925-11-18

開天節

1면 사설

무기명

9권 200쪽

17

1925-11-21~


1925-11-24

상달(2회)

학창산화

무기명

9권 561쪽

18

1925-12-06~


1925-12-31

「되무덤이」에서(13회)

학창산화

무기명

9권 480쪽

19

1926-01-01~


1926-01-03

朝鮮史上 世界的 事實(3회)

역사-단군·고조선·기타

최남선

2권 463쪽

20

1926-01-01~


1926-02-11

朝鮮歷史 及 民俗史上의 虎(7회)

역사-단군·고조선·기타

육당한인

2권 471쪽

21

1926-01-23~


1926-01-24

久遠한 明星(2회)

1면 사설

무기명

9권 182쪽

22

1926-02-06

朝鮮心·朝鮮語

1면 사설

무기명

9권 190쪽

23

1926-02-11~


1926-02-12

檀君 否認의 妄(2회)

1면 사설

무기명

2권 77쪽

24

1926-03-03~


1926-07-25

檀君論(77회)

역사-단군·고조선·기타

최남선

2권 79쪽

25

1926-04-29

속닙나는 잔듸

시조(백팔번뇌)

육당

5권 462쪽

26

1926-06-10

純宗孝皇帝輓

시가

최남선

5권 475쪽

27

1926-06-10

숨어가는 銘旌

시가

최남선

5권 476쪽

28

1926-06-22~


1926-06-24

白頭山의 神秘(3회)

1면 사설

무기명

9권 80쪽

29

1926-07-28~


1927-01-23

白頭山覲參記(89회)

기행문

최남선

6권 11쪽

30

1926-11-07

開天節

1면 사설

무기명

9권 197쪽

31

1926-12-02~


1926-12-04

古蹟保存의 要諦(3회)

1면 사설

무기명

9권 491쪽

32

1926-12-09~


1926-12-12

壇君께의 表誠(3회)

1면 사설

무기명

9권 192쪽

33

1927-01-01~


1927-02-04

토끼타령(27회)

신화·설화

최남선

5권 94쪽

34

1927-02-11

처음 보는 純朝鮮童話集

서평

육당학인

9권 617쪽

35

1927-03-24~


1927-03-25

朝鮮의 原始相(2회)

1면 사설

무기명

10권 227쪽

36

1927-03-29

朝鮮史學의 出發點

독서계

최남선

9권 37쪽

37

1927-04-07

月南先生輓

시가

최남선


38

1927-06-04

한번 새로워야할 조선의 오늘의 새여자

1인1화(話)

최남선

10권 234쪽

39

1927-10-29~


1927-10-30

開天節(2회)

논설-종교·사상

최남선

9권 198쪽

40

1927-11-11~


1927-11-12

朝鮮의 久遠相(2회)

논설-교양

최남선

10권 230쪽

41

1928-01-01~


1928-02-28

檀君神典의 古義(39회)

역사-단군·고조선·기타

최남선

2권 190쪽

42

1928-06-01~


1928-06-10

朝鮮遊覽歌(10회)

장가(長歌)

최남선

5권 373쪽

43

1928-08-01~


1928-12-16

檀君과 三皇五帝(72회-중단)

역사-단군·고조선·기타

최남선

2권 251쪽

44

1928-12-17~


1928-12-19

吳世昌氏 ‘槿域書畵徵’ (3회) 서평 최남선 9권 619쪽

45

1930-01-12

朝鮮歷史 通俗講話는 어떻게 쓴 것인가

역사-통사

최남선

1권 15쪽

46

1930-01-14~


1930-03-15

朝鮮歷史講話(51회)

역사-통사

최남선

1권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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