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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명희가 동아일보사에 재직하고 있던 동안의 일로서 또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당시 중국에 망명 중이던 신채호의 조선사 관계 논문들이 그의 주선으로 동아일보에 연재된 사실이다…(중략)…신채호의 각별한 부탁을 받고 홍명희는 ‘이두문 명사 해석’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  ‘평양 패수고’ 등 신채호가 심혈을 기울여 집필한 조선고대사 관계 논문들을 동아일보에 게재하도록 주선하였다…(중략)…뿐만 아니라 이 논문들에 앞서 1925년 1월 2일자 동아일보에는 신채호의 유명한 평론 ‘낭객(浪客)의 신년 만필(漫筆)’이 실렸는데, 이 글은 민족해방운동에 부정적인 기능을 하는 신문예의 해독을 통렬히 비판하여 당시 문단에 충격을 주었다.” (강영주, ‘벽초 홍명희 연구’, 창작과비평사, 1999, 164~165쪽)






  홍명희가 왜 10개월 여 만에 동아일보를 떠났는지에 대한 분명한 자료는 없으나 이때부터 민족주의 좌파와 우파의 문제가 생기지 않았나, 추측됩니다.


  1925년 4월 2일자로 홍명희는 동아일보 떠나 시대일보로 자리를 옮겼으나 그에 대한 기사는 동아일보에 계속 보도됐습니다. 


  시대일보는 최남선이 간행하던 주간지 ‘동명’의 후신으로 1924년 3월 이름을 바꾸어 일간지로 창간된 신문. 그러나 점차 경영난에 봉착, 보천교로 경영권이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이를 반대하는 각계 인사들의 노력으로 새로이 재단을 구성해 새로운 출발을 맞게 되고 그 중심에 홍명희가 있었습니다.






동아일보 1925년 4월 5일자 2면






  재단을 완성한 시대보 –   충실한 재단으로 새로히 활동


  일반사회의 많은 기대와 환영을 가지고 육당 최남선씨의 주간하에 새로 발간되었던 동업 시대일보는 그동안 경영 곤란으로 많은 파란과 적지않은 곡절을 거듭하여 한때는 폐간의 운명에까지 이르렀으나 사회의 공기가 없어짐을 애석히 여기는 당국자들의 노력으로 오늘날까지 유지하다가 드디어 충실한 재단을 얻어 일체 경영을 양도하게되어 이로부터 시대일보는 새로운 활동으로 새로운 면목을 보이게 되었다는데 간부의 씨명은 아래와 같고 재단도 매우 충실하다더라.


  이범세 홍명희 이희종 정희영 윤희중 유진영 홍순필 정인보 한기악 이정희 김익동 신성호




  그러나 홍명희 역시 신문사의 경영난을 타개하지는 못하고, 시대일보는 1926년 8월 중순부터 휴간한 끝에 결국 폐간됐습니다. 시대일보 폐간 이후 홍명희는 정주 오산학교 교장으로 다시 부임하였다가 1927년 항일민족협동전선으로 발족한 신간회에 참여합니다. 






동아일보 1927년 1월 20일자 2면






  민족주의로 발기된 신간회 강령 발표 –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 –   창립총회는 2월 15일


  조선민족의 정치적 의식이 발달됨을 따라 민족적 중심 단결을 요구하는 시기를 타서 순 민족주의를 표방한 신간회 발기인 28인의 연명으로 작일 다음과 같은 3개조의 강령을 발표하였는데 책임자의 말을 듣건대 신간회의 목표는 모든 우경적 사상을 배척하고 민족주의중 좌익전선을 형성하려는 것이라며 실지 정책과 사업은 2월 15일에 열릴 창립총회에서 결정할 터이라더라.




  ◇강령◇


  1.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1.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1.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발기인씨명(가나다순)


  김명동 김준연 김탁 권동진 정재룡 이갑성 이석훈 정태석 이승복 이정 문일평 박동완 백관수 신석우 신채호 안재홍 장지영 조만식 최선익 최원순 발내홍 하재화 한기악 한용운 한위건 홍명희 홍성희  






  신간회 창립대회는 1927년 2월 15일 서울 종로 기독교청년회관 대강당에서 열렸습니다. 동아일보도 이를 상세히 보도했습니다.






동아일보 1927년 2월 17일자 2면






  新幹會 창립대회 –   2백여명 회원이 출석하여 –   대회 창립하고 부서를 제명


  신간회 창립대회는 기보한바와 같이 15일 오후 7시 15분부터 시내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홀에서 개최되었는데 당야 출석회원은 약 2백여인 그중에는 여자 회원도 7, 8인이 있었고 2층 방청석에는 방청인으로 대만원을 이루었는데 개회가 되자 즉시 신석우씨를 임시의장으로 추천하고 서기는 김준연 신현익 장지연 삼씨, 사찰은 권태석씨외 11인을 추천한 후 먼저 회원의 ○명(회원 총수 4백여인중 출석회원이 2백 2인)이 있고 곧 의사진행으로 들어가 신간회와 조선민흥회의 합동 경과보고와 회의명칭은 편의상 제3간판을 붙치지않고 신간회라고 하였다는 것과 기타 그동안의 경과 상황보고가 있고 규칙통과에 들어가 규칙심사위원으로 권동진 최익환 박래홍 송내호 리동욱 5씨를 선거하여 규칙을 심사케하여가지고 무수정(無修正)으로 통과를 시킨후 선언에 관한 것은 위원에 일임하기로 가결하였다. 장내의 공기가 더욱 긴장된 중에 임원선거가 있어 무기명투표로 회장 이상재 부회장 홍명희 양씨를 선거한후 다시 간사는 35인을 선거하기로 한후 전형위원으로 권동진씨외 11인을 선거하여 간사후보자 70인을 선발하여가지고 그중에서 35인을 전형케하기로 전형위원들에 일임하고 간사회에 대하여 회당이 소집하는 외에 정기대회가 있도록 세칙을 만들자는 결의가 있은 후 이튿날 오전 한시경에 폐회하였다.






  신간회가 창립되자 전국의 청년 · 사상 · 노동 · 농민단체들 가운데서는 신간회를 지지하는 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여성운동의 단일전선인 근우회(槿友會)도 신간회의 자매단체로 창립되었습니다.


  홍명희는 동아일보를 통해 근우회에 대해 각별한 기대를 표명하는 발언을 하였습니다.






동아일보 1927년 5월 29일자 5면






  근우회에 희망 –  홍명희씨 담


  오스트라리아 북방에 사는 어느 식인종은 주린 창자를 채울 것이 없으면 저의 아내를 통우로 구워서 뜯어먹는 일이 있다고 합디다. 소위 문명 한민족들의 사회에서도 여자가 간접으로 남자의 식료품이 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일종 자리제구로 알거나 그러치 아니하면 일종 장난감으로 여기는 것은 식료품으로 치는 것보담 무엇 나을 것이 있습니까.


  답지않게 상강을 세웠던 동양 몇나라는 고사하고 여존남비라고 동양 사람이 흉보듯 변보듯 말하는 구미 여러 나라에도 여자의 지위가 아무래도 남자만 못한듯 합니다. 요근래 새로 발견되었다는 몽고지방 여자국은 사실 있다면 예외의 사실이라고 할 것입니다.


  상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남자 혼자만이 사람이 아니고 여자도 사람이다 말합디다. 그러나 과학자의 말은 남녀를 합하여서만 사람이란 뜻이 완전하게 된다 합디다. 남자가 여자에게 첩노릇이나 종노릇한다는 여자국도 불완전한 인류사회라고 하겠지만 여자가 직접 간접식료품이나 자리제구 또는 장난감 노릇하는 사회도 완전한 인류사회는 아니겠지요. 완전한 합리적 인류사회에는 여자가 남자와 같이 정치 문화적으로 활동할 균일한 기회를 가질 것입니다. 그렇다고 남자더러 아이배게 되리라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우리 조선은 현금 세계 선진국에 비하여 후진이라 모든 것이 남에게 뒤진 중에 여성운동 같은 것은 더욱이 뒤진 것의 하나입니다. 지금 우리 조선에는 크롭스카야(레닌의 부인이자 러시아의 사회주의 여성운동가)가 꾸우지(프랑스 혁명기에 ‘여성권리선언서’를 기초한 여성운동가)나 크라프트(영국의 여성운동가)와 함께 활동하게 된 판입니다. 여권 선언의 꾸우지나 여권 주장의 크라프트가 크롭스카야와 함께 여성운동의 전위분자가 될 것이 현재 조선의 사정입니다. 이 여성운동의 전위분자가 가질 이론은 딴 것 없을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 민족운동의 이론이 세계 무산계급운동의 일부분인 것과 같이 우리 여성운동의 이론이 조선민족운동의 일부분이 될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의미로 우리는 새로 탄생할 근우회에 대하여 많은 바람을 가지게 됩니다.






  남녀평등에 대한 이런 발언은 홍명희의 진보적인 세계관을 잘 보여줍니다.


  그의 문재(文才)는 1928년 11월부터 조선일보에 연재된 대하장편 역사소설 ‘임꺽정’을 통해 꽃을 피웁니다.






조선일보 1928년 11월 21일자에 실린 ‘임꺽정’ 1회






  홍명희의 ‘임꺽정’ 연재와 관련된 일화들은 동아일보에도 소개됐습니다.






동아일보 1928년 12월 22일자 3면






  서재인(書齋人) 방문기(12) 벽초 홍명희 –  심각한 학자 생활 –  제일 주창이 검박과 겸손 – 부인기자 최의순 –


  시계가 열두시를 바라볼 쯤이었습니다. 항상 복작복작하는 종로 사정목 네거리 근처에서도 더욱이 빽빽이 들어선 상점들 틈에 있는 듯 없는 듯이 끼여 있는 좁은 골목 안에서 기자는 홍명희 씨 집을 찾았습니다. 씨가 누구에게든지 ‘군자님’이라는 별호를 받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기자는 문안에 들어서자 눈에 띄우는 모든 것마다에 뜻있는 해석을 아니 부칠 수 없었습니다. 몇 대째 전해 내려온 듯이 보이는 서적만으로 모여진 듯한 마루에 우뚝이 서있는 책탁자, 아주 고물로 보이는 방에 놓은 문갑, 많지 않은 세간 틈틈이 자리를 잔뜩 차지한 후락한 책들, 어느 것치고 값나가 보이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옛 학자의 살림살이 모형을 고대로 그리지 않고 있는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씨의 겸손한 태도와 부드러운 듯 하고도 엄한 기운이 도는 음성에는 옆에 있는 자로서 많은 느낌을 일으키는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서재 사람이 무엇입니까 아무 값없는 사람으로서 날마다 되는대로 생활을 계속하고 있을 뿐이니 어디 사는 의미가 있으며 서재인의 자격이 무엇에 있겠습니까. 이 무서운 추위에 멀리 찾아오신 손의 대접은 아닙니다마는 나는 서재인 방문기 틈에 끼지 마십시요. 과연 부끄럽습니다”하는 씨의 진정에서 우러난 듯한 첫말이 기자에게는 더한층 보배롭게 고상하게 감촉되었습니다. 이때에 기자는 다만 “선생께서 그렇게 사양하신다면 사실 어떤 분을 찾아뵈어야 옳습니까. 한마디 선생님과 이야기 하고 가면 만족하겠습니다” 할 뿐 “글쎄요. 참 망단한 생각만 납니다. 평시에 너무 어지러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요사이는 더욱이 그렇습니다. 유행하는 말로 ‘타락’했다고 할런지요. 도무지가 여의치가 못해서 순전히 돈 한 가지에 즉 생활난에 오로지 정신을 뺏기고 있으니 기막힙니다. 전일과 같이 ○를 잇게 독서도 못할 뿐아니라 오랫동안 내 품에 두었던 좋은 책들도 무수히 팔아먹었습니다. 겨우 선조어른들의 필적이나 인(印)배킨 것쯤 남겨두고 앉았지요. 요사이 신문에 기재되는 ‘임꺽정전’도 내 취미와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쓴다는 것보다는 먹기 위해서 매일 쓴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과연 한심한 세태를 만났지요. 너나 할 것 없이—”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더한층 푹 숙이는 씨의 감개무량한 표정! 씨는 현 조선인 학자의 설움을 철저히 맛보고 있는 것 같이 살펴졌습니다. “그러나 소위 예술가 즉 문학가 그리고 철학자들의 생활은 예로부터 물질적으로는 궁하지 않습니까”하고 기자는 이야기를 감돌리자 씨는 “과거 역사가 증명하는 것과 같이 공부하는 자가 물질에 빈궁한 것은 필연적 사실이라 하는 것도 과히 망말은 아니겠지요”하며 다시 침묵상태에 잠기는 듯 여기서 기자는 목소리를 변하고 어조를 바꾸어 “선생님 소설 써나가시는데 대한 감상을…”하고 안타깝게 조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에 씨도 저윽이 침울한 기분에서 빠져난 듯 “감상이랄 것은 별로 없습니다마는 소설을 세상에 내놓으면 왜 흔히 연애서찰이 여기저기서 들어 다 혹은 그 소설 모델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로 독자들이 서로 떠든다고 하지요. 그런데 나로 말하면 아름다운 글에 솜씨 익은 젊은 소설가와는 다름으로 그러한 재미는 못 봅니다마는 그 대신 집에서 은근히 웃음을 참지 못할 지경에 있습니다. 소시 때에 당해보도 못하던 연애장면을 땀을 빼다시피하고 이리궁리 저리궁리해서 쓰는 것인데 그것이 집안사람들은 물론 일가에서도 일종의 웃음거리가 됩니다 그려! 아 어느 날인가 내가 이방에서 듣자니까 우리 집 작은 아들놈이 하는 말이 ‘어머니, 아버님이 집에서는 대범하시기 짝이 없으시지만 밖에서는 실없는 일을 많이 하시는 모양이지오!’ 합디다 그려. 그때에 내 아내의 급히 나온다는 대답이 걸작입니다. ‘아 참 그렇더라 얘. 아마 다른 여자와 그렇게 해보신 일이 있어 그럴듯하게 잘 쓰시는 것이지?’하는 것이 매우 의심 쌓인 말투이었어요. 내가 밖에 나간 줄들만 알고 크게 맘 놓고 떠들다가 고만 내 기침 소리에 혼들이 낫지요.”하며 씨가 점잔케 웃을 때 기자 역시 말보다 솟치는 웃음이 먼저 앞섰던 것입니다. 이러한 눈물겨웁도록 심각하고 재미있게 어우러져가던 씨와의 대화가 별안간 ‘신문사에서 원고 가질러 왔습니다’하는 거치른 애 녀석 목소리에 무참히 깨어지며 기자는 씨의 공손한 거동과 유한 목소리를 뒤에 남기고 돌아서게 될때 “아- 남을 높이고 자기를 낮추시는 분! 어디까지 서재인 타입! 참 학자의 집!” 이렇게 가만히 혼자 중얼거릴 뿐이었습니다.






  홍명희는 1929년 12월 광주학생사건과 민중대회 사건으로 인해 여러 동지들과 함께 검거되어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동아일보는 이 모든 과정을 상세히 보도했습니다.






동아일보 1929년 12월 13일자 2면(압수기사)






  신간회를 비롯 각 단체 엄중경계 – 삼륜(三輪) 수사계주임 동분서주 – 종로서 전원 비상출동을 준비, 대표 소환해서 경고


 경기도 경찰부 수사계 삼륜 주임은 상오 여덟시경부터 오토바이를 달려 전중(田中) 부장 외에 몇몇 고관을 방문하고 어떤 중대사건에 대한 양해를 구한 것 같았는데 상오 열시경 종로경찰서에 그가 나타나자 동시에 동서의 공기는 돌연 긴장하는 한편 전서원에게 비상출동 준비를 지시하면서 시내 요소와 각 사상단체에는 정사복경찰을 배치하고 엄중 경계하는 한편 낮 열두시경에 이르자 신간회 대표 홍명희(洪命憙)씨와 김항규(金恒奎)씨를 호출하여 시국에 대한 간담적 경고를 했다 한다. (정진석 편, ‘일제시대 민족지 압수기사 모음Ⅰ’, 602~603쪽)






동아일보 1930년 1월 7일자 2면






  결의문사건 관계자 금 6일에 최종 訊問 – 여섯사람만 불러 심문중 – 수뇌자 협의로 결정


  사회 각 방면의 중요인물을 망라하여 모종의 결의문을 발표하는 동시에 일대 민중운동을 일으키려다가 미연에 발각이 된 결의문 사건의 권동진, 허헌, 홍명희, 조병옥, 주요한, 한용운, 이관용, 이원혁, 손재기, 김무삼(이상 구속) 등과 불구속 네명 모두 열다섯명에 대한 사건은 기보한바와 같이 연말연시의 관계로 금 6일에야 기소 불기소 여부가 결정될 터임으로 동일 경성재판소 검사국은 이상한 긴장미를 띠고 사건을 담임한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전문 이등 검사는 동일 아침 10시부터 형무소로부터 사건의 피의자정 허헌, 조병옥, 홍명희, 이관용, 이원혁, 김무삼(一名 김동준) 등의 여섯명을 또다시 검사국으로 소환하여 사건의 최종심문을 하는 한편으로 고등법원 검사장실로 송사 검사장과 구수밀의를 하는 등 어쨌든 동일로 사건의 기소여부를 결정하는 동시에 사건을 공판으로 넘기든지? 그러치아니하면 예심으로 넘기든지? 양단간 결정될 것으로 이는 사건이 사건인만큼 검사국에서도 신중한 태도를 가지는 모양인데 이에 대하여 고등법원 검사국 송사 검사장의 말을 들으면 당일로 전기 여섯명의 최종 취조가 끝나는 대로 동 검사장을 비롯하여 복심검사장 지방검사 등이 충분한 협의로써 각각 ○하리라더라.






동아일보 1930년 1월 8일자 2면오른쪽 맨 위 사진이 홍명희






  보안법이 제령위반으로 – 문제되는 적용법률 – 석방된 사람은 기소 불기소 미정, 결의문사건 관계자


  학해(學海)에 일대 파문을 일으킨 광주 학생사건의 발발을 전후한 결의문사건의 허헌 홍명희 조병옥 리원혁 김무삼 리관용 등의 여섯명은 6일 경성고등법원 이등 검사의 손에서 대정 8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동 법원 제1예심으로 회부하는 동시에 그밖에 불구속자 네명은 물론, 구속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어 있던 권동진 주요한 한룡운 김항규 손재기 등은 당일로 석방하였다함은 작보와 같거니와 경찰부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송국한 것을 동 검사국에서는 제령위반으로 죄명을 고치어 예심에 회부한 그이유는 전기 6명에 대한 법률 적용문제가 일반 법조계에까지 말썽거리가 되어 장차 종결될 예심결정이 자못 주목거리가 되는바 6일 석방된 5명과 불구속 4명에 대한 불기소 혹은 기소유예의 확실한 결정은 없다고 하여 동 사건을 담임한 이등검사의 금후 태도는 더욱 주목된다.






동아일보 1930년 1월 11일자 2면




  결의문사건 –  예심에 착수 –  협예심판사의 손으로 – 감옥에 출장취조중


  경성지방법원 사상전문 제2예심협(脇) 예심판사는 수일전에 동 예심으로 회부된 결의문 사건의 ▲허헌 ▲조병옥 ▲홍명희 ▲이관용 ▲이원혁 ▲김동준(일명 김무삼) 등 6명에 대한 대정 8년 제령 제7호위반사건의 예심취조를 하기 위하여 동예심괘형(邢)서기를 대동하고 10일 서대문형무소에 출장하여 이미 심문에 착수하였는데 사건이 워낙 경찰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검사국에서는 죄명을 달리하여 제령위반으로 예심에 회부하여 일반법 조계에서는 매우 주목하는터인데 예심은 의외로 속히 진행될듯 하다.




 

동아일보 1930년 9월 2일자 2면






  허헌등사건 금명간 종료 –  방금 조서정리에 분망 중 – 주목되는 기소여부


  작년 학생 만세사건을 전후하여 신간회 경성중앙간부가 중심이 되어 모종의 중대사항을 질의하는 동시에 민중대회를 개최코자 하다가 미연에 경찰에 발각된 허헌 변호사 이하 조병옥 홍명희 이관용 이원혁 김무삼 등 6명에 대한 사건은 그동안 경성지방법원에서 심리를 하여오던 중 작금에 심리가 끝나 금명일 중에 사건의 예심종결이 되리라 하는바 유죄냐 혹은 면소결정이냐 주목을 끌고 있다.






동아일보 1930년 9월 7일자 2면오른쪽 맨위 사진이 홍명희

 




  허헌 등 사건 예심종결 –  6인 전부 유죄결정 – 반년을 끌다가 금일 결정 – 죄명은 보안법 위반


  작년 11월 광주학생사건 발생을 전후하여 경성시내에서 각단체 중요간부들의 검거를 보게 되었던 소위 민중대회 결의 사건 관계자 허헌 이관용 홍명희 이원혁 조병옥 김동준(일명 김무삼) 등 6명에 대한 대정8년 제령7호위반 피고사건은 루보한 바와 같이 금년 1월 사건이 경성지방법원에서 사상전문 이등(伊藤)검사의 손을 거쳐 예심으로 회부된 이래 팔구개월동안 제일심 협(脇)예심판사의 담임으로 심리를 진행하여오던 중 작6일부로서 피고 6명이 검사의 기소한 죄명과는 달리 모두 보안법위반으로써 유죄결정이 되어 동법원 형사합의부 공판에 부치게 되었다.




  민중대회 계획 중 – 미연에 발각 – 광주학생사건에 대하여 – 허헌 가(家)에서 수차 회합


  사건의 경위는 학생사건 당시 신간회의 중앙상무집행위원장이던 허헌 변호사와 당시 신간회 경성지회 상무집행위원장이던 조병옥 등은 이 사건에 대하여 당시 역시 신간회 간부로 있던 피고 홍명희 이관용 등으로부터 모의한 결과 조선의 각 단체가 서로 연합하여 광주학생사건대책강구민중대회를 하기로 결의한 후 작년 12월 9일 이래 연일 피고 허헌의 집에서 중요회의를 거듭하여오던 중 사건은 경찰에 발각되어 13일 새벽부터 경찰부고등과의 활동으로 그와 같이 검거된 것이다.




  판결에 보면 대부분 무죄


  그같이 사건이 보안법으로 예심결정이 되고 그에 대한 관계검사도 이의가 없으나 동사건을 담임한 변호사측에서는 동사건의 성질이 보안법을 적용하여 처벌할만한 것이 없다는 해석을 가지고 벌써부터 사건변론에 대한 준비를 급히 하는 중인데 변호측에서는 무엇보다 대정 8년 6월 9일 경성고등법원의 판결례를 가지고 무죄를 주장하는 중인데 동판결례는 다음과 같다.




   ◇판결례◇


  보안법 제7조에 규정한 치안방해의 죄가 있다고 하는데 정치에 관하여 불온의 언론동작을 위하였는가 또는 타인으로서 불온의 언론동작을 위한 事를 선동교사한 것인가 또는 불온의 언론동작을 하기때문에 타인을 사용하였는가 또 타인의 행위에 關涉한 행위가 있는 事를 요하는 것은 물론 차등의 행위가 一地方의 정밀을 해할 정도에 달한 것을 요하는 고로 가령 多衆과 공히 차등의 행위를 위한 事를 기획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또는 준비적 행위를 위하여 그 일이 불온의 언론동작기타에 해당한 경우라 할지라도 그 행위로서 비밀리에 행하여 일지방의 정밀을 해할 정도에 달치 않을 때에는 동건에 문의하여 처벌할 事를 부득함(대정 8년 6월 9일 판례)






  1931년 4월 선고공판에서 홍명희는 허헌, 이관용 등과 함께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여 옥살이를 한 뒤 ‘임꺽정’ 집필에 전념했습니다.




  해방 후 그는 정치일선에 나서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제(諸)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참가 차 북으로 갔다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자진 월북한 홍명희와 북으로 끌려간 이광수, 두 조선의 천재 사이에 아래와 같은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다큐멘터리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 2006년 제작 증언 중)






  “홍명희 선생 그분은 일본에서 중국에서 서울에서 친한 형님사이니까 편지 쓰면서 이 이상 걷지 못하니 도와주세요 하니 홍명희 씨가 아버님을 자기 집에 모셔 가셔서 병구완을 해주시고 병이 악화되니까 인민군 병원으로 보내시고 거기서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광수의 차녀 이정화)






  “53년인가 홍명희 선생 방에서 얘기하는데 홍명희 선생이 그런 얘길 해요. 춘원 선생을 자기가 한번 모신 바 있다고 얘기해요. 어떻게 모셨는가 하니까 그때 납북인사들을 전부 자동차도 아니고 걸어서 강계로 끄집어 가는데, 홍명희 선생이 김일성 수상하고 얘기해서 앓는 사람이 있는데 한번 자기 집에 와서 조금 휴식하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래서 허가해서 춘원 선생을 보름동안 15일간 자기 집에서 치료하고 의사 치료하고 보냈다. 이런 말씀이세요.” (정상진 전 북한 문화성 부상 1953~1956)






  홍명희는 월북할 때 둘째 아들 홍기무를 데리고 갔는데 그는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선생의 둘째 사위였습니다.   다음  위당 선생의 자제분인 정양모(鄭良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증언,




  “아버님과 벽초 선생이 절친해 벽초의 둘째 아들 홍기무와 둘째 누이의 혼사가 이루어졌다. 벽초가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가며 둘째 아들을 데리고 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 둘째 매형(홍기무)이 남파간첩으로 내려왔다 붙잡혔다. 당시 아버님은 감찰위원장이었다. 6·25가 나자 형무소를 탈출, 서울이 점령당하자 큰 차를 타고 우리 집에 왔다. 장인에게 큰 절을 하더니 ‘장인께서도 저와 같이 혁명 사업을 하시지요’라고 했다. 그랬더니 아버지께서 ‘너는 유물론자고 나는 유심론자인데 어떻게 같이 혁명 사업을 하느냐’고 반문했다. 그러자 다시 큰 절을 하더니 ‘장인이 절개를 지키는 건 존경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인민정부에 협력 안하시면 반동입니다’라고 하고 갔다. 그 며칠 후 보안서원 몇 명이 와서 아버지를 데리고 갔다.”






  홍명희(위키백과) 


  출생 1880년 5월 23일 조선 충청북도 괴산


  사망 1968년 3월  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  대한제국,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별칭 호 벽초(碧初)


  직업 독립운동가, 정치가, 소설가




  홍명희(洪命熹, 1880년 5월 23일~1968년 3월 5일)는 일제강점기의 소설가이자 독립운동가, 정치가이다. 해방 후 1948년 월북하여 북조선의 정치인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생존 당시 일제강점기 시대 동안 이광수, 최남선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었으며, 소설 《임꺽정》의 작가로 유명하다. 호는 벽초(碧初)이다. 일생동안 소설 창작, 언론활동, 정치활동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생애와 사상


  학창시절과 독립운동 활동


  홍명희는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태생이며, 근처 제월리로 이주했다. 제월리에는 그의 일가가 살던 생가가 존재하고 있다. 1910년 그의 아버지 홍범식은 대한제국의 관료로 경술국치에 치욕을 느껴 자결하였다. 당시 일본에서 공부하던 홍명희는 아버지의 자결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학업을 포기하고 조선에 돌아온다. 그는 항일의식을 자결로 실천한 아버지가 남긴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지 말고 저항하라’는 유언을 그대로 받들어 실천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괴산에서 충청북도 최초로 참여하였다. 상하이로 건너가서는 이광수를 다시 만나기도 했다. 이때 그는 이광수와 친밀하게 지내며 그에게 톨스토이를 권했다고도 한다. 홍명희는 조소앙, 이광수 등과 함께 상하이에서 궁핍한 생활을 계속하였는데, 이광수는 ‘도저히 상하이 생활을 못 하겠다’고 선언하고는 귀국길에 오른다. 하지만 홍명희는 이광수를 버리지는 않았다. 항일 독립운동으로 수차례 옥고를 치루면서도 그는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시대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또한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오산학교 교장 근무, 아들 홍기문과 함께 참여한 신간회 결성 등의 업적도 남겼다. 1927년 《현대평론》이 창간되자, 그 창간호에 이관용(李冠鎔) 안재홍 김준연 이순탁(李順鐸) 백남운(白南雲) 이긍종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작품 세계


  그는 생존 당시 이광수, 최남선과 더불어 ‘조선을 대표하는 3재(三材)’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문학가였는데,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소설 창작이다. 사회주의자이자 반일인사였던 벽초 홍명희는 1928년 조선일보에 소설《임꺽정》을 연재하였는데, ‘민중의 삶을 탁월하게 재현한 역사소설’이라는 문학가들의 긍정적인 평가와 임꺽정은 도적에 불과한데, 사회주의자인 홍명희가 의적으로 미화시켰다는 역사학자들의 부정적인 평가 등 모두 존재할 정도로 의미가 큰 작품이다. 하지만, 소설《임꺽정》은 홍명희 혼자 모두 지은 것은 아니고, 손자 홍석중이 할아버지의 작품을 마무리하였다는 견해가 있다.






  광복 이후


  사회운동


  1945년 해방 뒤, 벽초는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을 했는데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박헌영, 여운형 등이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아서면서 반탁운동에서 탈퇴하였다. 1947년 7월에 여운형이 암살된 이후 홍명희가 근로인민당의 당수가 되어 활동하였으나 홍명희의 인기는 여운형에 댈 것이 못 되었다. 홍명희는 소설가, 문학가로 정평 나있지 정치적 입지로는 어울리지 못했다. 김구·김규식등과 함께 1948년 4월 남북 연석회의에 참가하기도 했다. 남북협상이후 당시 벽초는 남한에 돌아가지 않았고, 북한에 남아 월북인사가 되었다. 그의 북조선 잔류 원인으로는 ‘친일파들과 결탁하여 단독정부 수립운동을 강행 추진하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실망감’이 월북의 원인이었다는 견해가 있다.




  북조선에서의 정치활동


  북조선에 잔류하던 홍명희는 이후 노동당 군사위원회 위원. 내각 부수상 등으로 주요정치활동을 하였으며, 한국전쟁에 반대한 인물들 중 한명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 전쟁 때 피난오던 도중 이광수가 심한 동상과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매자, 그는 직접 이광수를 찾아 왔다. 그는 김일성의 재가를 얻어 평안북도 강계군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자기 숙소에 데려갔다가 인민군 병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이광수는 폐결핵의 악화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홍명희는 한국전쟁 후 공직에서 추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문화선전성 제1주상을 맡았던 고려인 정상진은 홍명희와 최승희 등을 옹호했다가 소련으로 추방당하였다. 1948년 북한 부총리에 선출 되었다. 1968년까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사후


  1968년 3월 5일 사망하였다. 사후 북조선에서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현재 그의 생가는 충북 괴산군에 의해서 보전되어 있다.






  기념문학비 건립


  1998년 10월 17일 벽초문학비건립추진위원회에 의해서 홍명희 선생의 문학가로서의 업적을 기리는 문학비가 건립되었다. 하지만, 홍명희의 월북사실을 문제 삼은 괴산 재향군인회 등의 우파단체들의 반발 때문에 1948년 월북했다는 문구가 삽입된 새로운 비문이 2000년 6월 12일 건립되었다.






  일화


  일화로 홍명희가 어느 날 집으로 오다가 그의 선산에서 몰래 도벌을 하는 사람을 보게 되었다. 그러자 벽초는 평소에 다니던 길을 버리고 일부러 먼 길을 돌아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후에 그 이유를 말하기를, 그 사람 눈에 자신이 띄면 미안해 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 외에도 아들 홍기문과 함께 맞담배를 피운 개방적인 일화로도 유명하다.






  가족


  증조부 : 홍우길, 이조판서 역임


  할아버지 : 홍승목((1843~1925), 병조판서 역임


  고모 : 홍정식(洪貞植, ? ~1945년 2월)


  고모부 : 조완구(1881~1952 ?)


  아버지 : 홍범식(1871~1910), 경술국치 때 자살


  생모 :


  계모 : 조씨(?~1950), 한국 전쟁 중 월북자의 가족이라 해서 사살되었다.


  동생 :


  제수 : 김씨(?~1950), 한국 전쟁 중 월북자의 가족이라 해서 사살됨.


  처 : 민씨


  아들 : 홍기문


  며느리 : 정경완(鄭庚婉), 정인보의 둘째 딸






  친일행각 홍승목 재산 국가 귀속 (충북일보, 6,14.)


  대하 역사 소설 ‘임꺽정’의 작가인 벽초 홍명희(1888~1968)의 조부 홍승목의 명의로 되어있는 괴산군 괴산읍 제월리 289∼17 등의 157필지 재산에 대해 국가 귀속이 결정됐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위원장 김창국)는 벽초의 조부인 홍승목(1847~1925)의 명의로 돼 있는 이 곳 제월리 땅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 등에 따라 국가 귀속 결정했다.


  14일 이 위원회에 따르면 “홍승목 명의의 재산은 지난해 3월 친일재산 국가 귀속 조사 개시가 결정·통지됐고 같은 해 6월 재산관리인으로부터 이의 신청이 접수됐지만 올 2월 국가 귀속이 최종 결정됐다”고 밝혔다.


  재산 관리인은 홍승목의 재산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선산’이란 명분을 들어 위원회의 국가 귀속을 위한 조사활동에 대해 이의를 신청했으나 위원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홍승목 명의의 재산은 이에 따라 위원회가 국유재산을 총괄하는 기획재정부장관에게 권리 보전에 필요한 자료를 첨부·통지하고 기획재정부장관은 관리청을 지정하게 되고 관리청은 의결서와 토지대장등본 등을 첨부해 ‘국’ 명의로 등기촉탁, 국가귀속 조치된다.


  이번에 국가 귀속이 결정된 홍승목 명의의 재산은 아들 홍범식 전 금산군수의 자결과 일제강점기의 시대적인 상황에서 법적 상속 절차를 밟지 못하고 숨진 지 85년 동안 홍승목의 명의로 남아 있었다.


  홍승목은 친일 행각으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조선시대 참판(종2품)까지 오른 홍승목은 친일유교단체인 대동학회 부회장을 맡았고 아들 홍범식이 경술국치에 울분을 토하고 자결 순국한 뒤에도 조선총독부 자문기구인 중추원 찬의를 지냈는가 하면 1912년 일제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는 등 친일행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친일파로 분류된 홍승목의 재산이 언제부터 형성됐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그의 조부 홍정주와 부친(양부) 홍우길(1809~1890)의 묘가 괴산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생존한 1800년대 중반 괴산에 터를 잡은 뒤로 상당한 재산이 모아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홍승목의 부친 홍우길은 판돈령부사(종1품)와 한성부판윤·이조판서(이상 정2품) 등 요직을 지낸 인물이다. 한편 ‘임꺽정’의 저자 홍명희는 1948년 남북연석회의 때 북으로 갔다가 내려오지 않고 북한 정권에서 내각 부수상을 지냈으며, 그의 장남 홍기문(1903~1992)은 김일성종합대학 교수와 사회과학원장을 지냈고 ‘조선문화론선집’을 저술했다. 또 홍명희의 손자 홍석중(69)은 소설 ‘황진이’를 쓴 북한의 대표적인 소설로 널리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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