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3대 천재 중 또 한 사람으로 가장 연장자인 벽초 홍명희(碧初 洪命憙, 1888~1968)는 ‘민족적 경륜’ 파문으로 이광수가 동아일보를 떠날 때 동아일보에 들어옵니다.
‘민족적 경륜’ 파문에 이은 ‘박춘금사건’으로 1924년 4월 25일 열린 임시 중역회의에서 사장 송진우, 전무 신구범, 상무 겸 편집국장 이상협, 취체역 김성수, 장두현이 물러나고 그 다음날 이광수가 떠난 뒤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 설립자이자 민족지도자인 남강 이승훈(南岡 李昇薰, 1864~1930) 선생을 사장으로 영입할 때 당시 오산학교 교장이었던 홍명희도 취체역 주필, 편집국장, 사회부장까지 맡아 동아일보와 인연을 맺습니다. 그의 나이 36세 때였습니다.
1924년 5월 16일자 1면
본사 임시주주총회
체취역 보결선거 결과 선임된 취체역
사장 이승훈
편집국장 홍명희
서무국장 겸 영업국장 양원모
취체역 허헌 윤홍렬
그러나 홍명희가 동아일보 지면에 처음 나타난 것은 1921년 6월 28일자 1면 입니다.
1921년 6월 28일자 1면
가인 홍명희 형님(1)
– 옛일을 생각하면 모두 다 꿈같소 –
동경에서 진순성(秦瞬星)
“가인(可人) 형님! 그것이 언제던가? 참 세월 가는 것이 빠르기는 하오. 그것이 벌써 8년 전 옛 일이로구려!
한 푼 없는 내가 한 푼 없는 형님과 역시 한 푼 없는 소앙(편집자 주- 조소앙<趙素昻>) 형님을 바라고 명덕리(明德里, 편집자 주- 상해 소재) 그 구석 집을 찾아갔을 때 참 그때 일을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고 꿈속 같기도 하오.
그때 우리의 생활, 형님의 꼴 누르스름한 데 줄이 죽죽 진 겨울 양복(겨울이나 여름이나, 낮이나 밤이나, 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통거리로 입는 단 한 벌의 그 양복)을 자리 속에서 툭툭 털고 ‘담배가 먹고 싶은데 어제 밤에 누가 먹다 남은 끄트메기도 없나! 어디 마룻바닥을 좀 찾아보아’하는 말이 그때 형님의 자고 일어난 첫 인사이었소.
그러면 소앙 형님은 담배 안 먹는 패라 ‘1년 가도 동전 한 푼 만져보지 못한 사람들이 담배는 무슨 담배야 그만 두오… 어이 추워!’하고 시커먼 벽난로를 들여다보나, 그야말로 1년 가야 불 한번 피워보았어야지! 연통을 지나 찬바람이 휙 불어 내려오면 별안간 모두들 어깨를 으쓱하고 소름질들을 치다가 김탁 군이 어디서 부서진 교의(交椅) 다리 하나 얻어온 것을 둘러싸고 금덩이 은덩이나 얻어온 듯이 ‘어디서 얻었어! 어디서 얻었어!’하고 별안간 활기들이 나서, 그것을 쪼인다, 불을 지핀다 해가지고 겨우 불이 붙어 오를까 말까 하는 교의 다리 하나를 바라다보며 사람이 없으면 곧 집어삼킬 듯이 박달학원(博達學院, 편집자 주- 상해 명덕리의 조선인학교. 박은식 신채호 문일평 정인보 홍명희 등이 교사) 식구들이 제각기 손을 내밀고 앉았던 광경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에 눈물이 돌고, 또다시 꿈같이 생각나오.”
창간기자였던 순성 진학문(秦瞬 秦學文)이 5회에 걸쳐 기고한 신변 잡문(雜文)같은 상해 시절의 어려웠던 이야기, 특히 조선 지식인 사회에서의 상징적 인물 중 한 사람인 홍명희를 내세운 글을 동아일보가 이례적으로 1면에 실은 것은 상해임시정부의 존재를 은연중에 조선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한 숨은 뜻이 담겨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창간 4주년(1924년 4월 1일)을 전후한 그 무렵 동아일보는 광화문 네거리에 새 사옥부지 4백여 평을 사들이고 새 윤전기 도입을 서두르는가 하면 지방판 발행을 단행하는 등 새로운 도약을 위한 의욕에 차있었습니다. 그러나 창간 이후 3년 동안 연평균 15회이던 압수건수가 1924년 한 해에만 무려 56회로 늘어나 ‘의욕’과 ‘감시 탄압’이 맞부딪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주필 겸 편집국장이 된 홍명희는 바로 그 다음날인 5월 17일자 사설 ‘독자 제위에게 고하노라’를 통해 간부진의 교체로 동아의 주의나 정신에 변동이 없을 것임을 선언했습니다.
1924년 5월 17일자 1면
독자 제위에게 고하노라.
一. 회고하면 본보의 창간이 근(僅)히 4주년이오 또한 일개월 반쯤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지내온 경로를 추억하면 파란이 중첩하였고 험준이 계속하였습니다. 혹은 신구(新舊)의 충돌로 평지의 풍파를 야기하던 때도 있었으며 혹은 고신척영(孤身隻影 · 외로운 신세)으로 수역동포(殊域同胞 · 멀리 떨어진 동포)의 화란(禍亂)을 부급(赴急 · 급히 전함)코저 하다가 검두(劍頭)의 원혼을 작(作)한 동지(편집자 주- 만주에서 일본군이 조선인을 대량 학살한 ‘훈춘사건’을 취재하러갔다 1920년 11월 일본인에게 살해당한 최초의 순직기자 장덕준<張德俊>을 말함)도 있었으며 혹은 정간(停刊)의 화를 피하여 위기일발의 경영난이 도래한 때도 있었습니다. 또한 본보의 신조가 확호(確乎)할수록 그만큼 시련의 충돌이 불절(不絶)하였으며 본보의 지반이 뇌호(牢乎)할수록 그만큼 물의(物議)의 비등(沸騰)이 불휴(不休)하였습니다. 과거를 회억(回憶)하고 현재를 응시하매 오인(吾人)의 감개가 어찌 제애(際涯 · 끝)가 있겠습니까.
二. 그러나 우리는 과거를 추억하는 것보다 능히 성찰의 념(念)을 절실히 할 것이며 또한 갱신의 책(策)을 강구할 것이며 이에 본보는 구(舊) 간부의 인책 퇴사를 기회로 하여 새로이 여러 간부를 맞게 된 것입니다. 이리하여 본보의 주의를 더욱 간명(簡明)케 하며 또한 만천하 독자의 기대를 고부(孤負 · 어긋남)치 아니하려하는 것이 본사의 미충(微衷 · 작은 속뜻)인 것을 양찰(諒察 · 헤아려서 살핌)할 것이로다. 본보의 주의와 정신은 결코 문장에만 있지 아니하며 또한 기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귀한 생명력이 항상 사라지지 아니하고 움직이는 것이 이곳 만천하 독자에게 굳센 믿음과 넓은 사랑을 받아온 까닭이라 합니다.
三. 물론 본사는 주식회사라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 제도 하에서 영리를 주안(主眼)으로 하는 회사조직과는 특수한 차이가 있는 것은 본사 창립의 동기와 역대 간부의 교체와 주주 각위(各位)의 고의(高義)가 이것을 증(證)하야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조선민족의 생명력을 발전하기 위하야 본보 창간의 필요가 생(生)하였으며 또한 본보의 유지 발전을 위하야 자본 모집의 방편으로 주식제도의 조직에 의하였을 뿐입니다. 그럼으로 만일 본사로 하여금 영업상 소득이 있고 양적(良績)이 있다하면 이곳 본보 유지의 소득이며 본보 발전의 양적이라 할 것입니다. 환언하면 본보의 유지는 조선 문화의 촉진을 의미하는 것이며 본보의 발전은 사회사업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본사의 존재는 결코 한두 개인의 영리욕을 만족키 위하여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곧 우리 사회의 공리공복(公利公福)을 위하여 존재한 것이며 따라서 본사의 간부도 우리 사회의 공복으로서 활동하여왔으며 이로부터서도 활동하여 갈 것을 확신합니다.
四. 그러나 양마(良馬 · 좋은 말)도 백락(伯樂)이 불고(不顧)하면 경마(驚馬)에 등(等)하고 보옥(寶玉)도 장석(匠石)이 기지(棄之)하면 벽돌과 다를 것이 없으니 여하(如何)히 본사의 단성(丹誠 · 정성)이 곡진(曲盡 · 간곡함)하고 본보의 주의가 고귀하다 할지라도 만일 만천하 독자 제씨의 철저한 이해와 심후(深厚)한 동정(同情)이 없으면 어찌 현상(現狀)과 같은 발전을 도(到)하였으며 동시에 어찌 장래의 번영을 기(期)하릿가. 그동안 본보의 중요 간부의 퇴사로 인하여 만천하 독자 제씨의 의념(疑念)을 층생(層生)케 한 것은 실로 본사로서 미안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본보의 주의(主義)와 정신(精神)은 간부의 교체로 인하여 소호(小毫 · 아주 조금)도 변동될 것이 아니니 만천하 독자 제씨의 철저한 이해와 심후한 동정을 간구하여 말지 아니합니다.
홍명희가 벌인 첫 사업은 1924년 12월의 ‘2천원 대현상’과 1925년 1월 신춘문예작품 모집이었습니다. 1925년 1월 홍명희 학예부장 겸 편집국장, 주필이 시작한 ‘신춘문예작품 모집’은 1940년 폐간될 때까지 거의 매년(1926년과 1937년 제외) 이어져 오늘날의 신문, 잡지 등에서 연례행사로 행해 신인 등용문이 되고 있는 신춘문예의 출발점이 됐습니다.
1924년 12월 17일자 1면
2000원 대 현상
조선 신문계 초유의 대현상
논문, 소설 각제(各題) 천원 대현상
◇ 독자 제씨도 아시는 바와 가치 각종 신문계에서 여러가지 형식으로 현상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종래의 전례로 보면 그 소위 상품이란 몇 십원 몇 백원을 가지고 자가의 선전을 위주하거나 독자의 호기심을 사는 것이 보통이고 조금 체면있는 신문계에서라도 일시의 방편이나 독자에게 사례하는 뜻으로 하였을 뿐이고 그 현상하는 바 목적에 대하여 뜻깊고 보람있게 한 것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외다.
◇ 이제 본사는 심절히 느낀 바가 있고 통절히 깨달은 바가 있어서 논문과 소설 두가지 종류에 한하여 이천원이란 적은 돈을 내어놓고 ‘대현상’이니 무엇이니 하는 것이 너무도 허풍이 아니냐고 꾸중하시는 독자가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많지못한 현상이지마는 이만한 것도 조선 신문계에서는 처음이라 자랑이 아닌 것도 아니외다.
◇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대현상이라 하고 조선 신문계에 처음이라함은 이천원 상금 그것을 가르켜 하는 말이 결코 아니외다. 명일에 별항으로 자세히 발표하려니와 진실로 ‘대현상’의 의미는 모집하는 그것의 내용에 있다는 것이외다. 논문 자체가 진실로 조선민중의 운명을 좌우하는 대논문이며 소설 자체가 진실로 조선 문학계에서 처음으로 시험하는 일이라 이것이 이른바 대현상이라 하여 주저치 않는 바이외다.
이는 실로 ‘조선 신문계 초유의 대 현상’이라는 문구가 어색하지 않은 단연 1920년대 최대 규모의 현상 공모였습니다. 이어 다음날인 12월 18일 이에 대한 상세한 공모 규정이 발표되었습니다.
1924년 12월 18일자 2면
현상대모집
소설은 춘향전 개작
논문 내용은 신년호에
◇ 춘향전이란 무엇인지 조선 사람치고는 아마 모를 사람이 드물까 합니다. 아무리 내용이 보잘것 없게 된 것이라 하더라도 근세조선의 국민문학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이것 이외에 별로 없을 것이외다.
◇ 하루밤 언약을 죽음으로 지킨 춘향의 뜻을 단순한 정조관념 이외에 보다 열렬함 보다 심각한 의미로 해석할 수가 없지 않으며 죽어서 사당에 들지 못한다 함을 불고하고 지존한(당시에) 관권의 총아로서 기생의 딸을 정부인으로 삼은 몽룡의 태도는 일시의 풍정으로 인한 부득이의 결과라고만 해석할 수가 없을 것이외다.
◇ 이 두 주인공을 뼈로 하고 그 사이로 흐르는 그 시대 그 인물 그 풍속의 정조를 만일 솜씨 있는 현대문사의 손으로 고쳐놓는다 하면 그 소득이 얼마나 크릿가? 이것이 이번 본사가 대담하게 계획한 동기외다.
◇ 투고요령 및 현상규정 ◇
一. 개작범위 : 시대, 인물 등을 일절 수의(隨意)로 개작하되 재래 춘향전의 경위를 손상치 말일
一. 문체장단 : 문체와 장단도 일절 수의로 하되 되도록 장편에 순언문으로 할일
一. 용지 기한 : 용지는 반드시 원고지로 하고 오는 3월 말일까지 본사에 도착하도록 할일
一. 등급 상금 : 1등 1인 5백원
2등 1인 2백원
3등 3인 각 백원
(원고는 당선 여하를 물론하고 일절 반환치 아니하며 출판권도 본사에 있음)
동아일보사
신춘문예 공모 사고는 1925년 1월 2일자에 났습니다.
1925년 1월 2일자 2면
박사진정(薄謝進呈, 사례로서 얼마 안 되는 돈이나 물품을 준다는 뜻)
신춘문예모집
문예란 · 부인란 · 소년란
◇ 종래의 문예란 부인란 소년란 등으로 힘이 자라는데 까지는 보다 충실하게 하여 조금 조금씩이라도 보람있게 하여보려고 본사 편집국장 홍명희씨의 학예부장 겸임 아래에서
一. 문예란계
二. 부인란계
三. 소년란계
의 세 가지 부문을 따로따로 독립시키고 각계에 책임자를 두어 힘과 정성을 다하려 합니다.
◇ 어떻게 하여 나가는지는 장차 사실로써 보여드리려 하거니와 우선 아래의 규정으로 일반 신진작가의 작품을 모집하오니 우리의 시험을 도와주시려는 유지는 많이 투고하여 이 세 가지란으로 하여금 금상첨화의 꽃밭을 이루게 하여 주시읍.
◇ 문예계 모집작품
一. 단편소설 1등 1인 50원
2등 2인 각 25원
3등 5인 각 10원
二. 신시 1등 1인 10원
2등 2인 각 5원
◇ 부인계 모집작품
一. 가정소설 1등 1인 50원
2등 2인 각 25원
◇ 소년계 모집작품
一. 동화극 1등 1인 50원
2등 2인 각 25원
二. 가극 1등 1인 50원
2등 2인 각 25원
三. 동요 1등 1인 10원
2등 2인 각 5원
입선 5인 각 2원
◇ 이상 각계에 대하여 투고하시되 내용을 모두 각계에 특색이 나도록 부인계 투고는 부인들이 읽기에 알맞은 것으로, 소년계의 투고는 반드시 소년소녀에게 적당한 내용을 가져야 합니다. 이밖에 주의하여 주실 것은
▲ 투고기한은 금월 말일까지
▲ 원고의 수는 무제한
▲ 원고는 각계 모집을 별봉하여 문예계면 문예계, 부인계면 부인계로 보내시되 주소 씨명을 분명히 쓰실 일
▲ 원고는 당선 여부를 물론하고 일절 반송치 아니함
“편집국장에 취임한 이후 홍명희는 문예 방면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 이듬해 연초부터는 학예부장을 겸임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동아일보에서는 우수한 문학작품과 훌륭한 신인 발굴에 힘을 기울여, 1924년 12월에는 ‘2천원 대 현상’을 걸고 ‘춘향전’을 현대소설의 수법으로 개작한 작품을 공모했으며, 이듬해 1월에는 한국 신문 사상 최초로 ‘신춘문예’를 공모하였다. 그 중 전자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신춘문예 제도는 그 뒤 동아일보 뿐 아니라 다른 신문들에서도 채택되어, 그 이후 오늘날까지 수많은 문인들을 배출한 중요한 통로가 되어왔다.” (강영주, ‘벽초 홍명희 연구’, 창작과비평사, 1999, 161쪽)
“본보에서는 일찍부터 현상모집 형식으로 문예작품을 공모하고 있었지만, 홍명희 편집국장이 취임된 뒤로는 특히 이 방면에 크게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 자신이 후일 ‘임꺽정’ 등 장편소설을 남기기도 했지만, 좋은 문예작품과 훌륭한 신인의 발굴에 힘을 기울여, 1924년 12월에는 ‘2000원대현상’을 걸고 우리의 고전 ‘춘향전을’ 현대소설의 수법으로 개작하는 일과 1925년 1월에 ‘신춘문예’를 공모하였던 것이다. 특히 후자는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각 신문사들이 다투어 신인의 등용문으로 매년 실시하여 큰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이 ‘신춘문예’야 말로 본보가 창안한 것으로, 우리 문단에 역량 있는 신인을 보내왔고, 또한 좋은 작품 수확을 거둔 행사의 하나다.” (동아일보 사사 1권, 246~247쪽)
社告
지나간 3월 말일까지 모집한 ‘경제논문’과 ‘춘향전 개작’은 지금껏 고선(考選) 중으로 금월 하순에는 발표되겠사오니, 강호제현(江湖諸賢)은 이리 알아주시기를 바랍니다.
1925년 7월 3일자 부록 2면
1925년 8월 15일자 1면
현상경제논문발표
논제-경제파멸의 원인 현황 및 대책
◇ 3등 당선 경성 배수성씨
현상논문 모집에는 20편 정도가 들어 왔으나 1, 2등 없이 3등작만 뽑았고 ‘춘향전 개작’에는 당선작이 없자 홍명희는 동아일보를 떠난 이광수에게 의뢰해 1925년 9월 30일부터 소설 연재가 시작됐습니다.
1925년 9월 24일자 2면
소설 예고
춘향전 개작
– 춘향 –
춘원 작(春園 作)
춘향전은 심청전과 아울러 조선국민문학의 대표를 이룬 것이다. 심청전은 효도를 중심으로 한것으로, 춘향전은 정절을 중심으로 한것으로 귀족계급으로부터 초동목수에 이르기까지 이 이야기를 모르는 이가 없고 이 이야기중에 한두 구절을 부르지않는 사람이 없다. 진실로 우리 조선 사람이 부르는 노래의 대부분이 이 두가지 이야기를 재료로 한것이라고 할수가 있다. 그러나 불행히 춘향전 심청전은 아직도 민요의 시대를 벗지 못하여 부르는 광대를 따라 사설이 다르고 심지어 인물의 성격조차도 다르고 더구나 세속의 낮은 취미에 맞게 하느라고 야비한 재담과 음담패설을 많이 섞어 금보다도 모래가 많아지게 되었다. 춘향전이 더욱 그러하니 이는 춘향전이 심청전보다 더욱 백성의 환영을 받는 것과 또 그것이 연애담인 까닭에 잡담과 음담패설이 더많이 붙게 된 것이다. 언제나 한번 춘향전 심청전은 우리 시인의 손을 거치어 알리고 씻기고 정리되어서 참된 국민문학이 되어야 할 운명을 가진 것이다.
이 때문에 본사에서는 일천원의 상금(그리 만흔 것은 아니나)을 걸고 우선 춘향전의 개작을 모집하였더니 수십 편이나 되는 힘들인 원고를 얻었으나 불행히 국민문학으로 추천할만한 것이 없음으로 응모하신 여러분께는 심히 미안한 일이나 춘원 리광수씨에게 청하여 춘향전을 쓰기로 하였다.
춘원의 춘향전은 얼마나 재미있을까 얼마나 우리 조선 사람의 가슴을 울리고 조선 사람의 전통적 정신을 전할까. 우리는 반드시 춘원의 춘향전이 만천하 독자를 만족케 할것을 믿는다. 아직 재래의 춘향전을 못본 이에게는 물론이어니와 재래의 춘향전을 보고 듣고 잘아는 이에게는 더욱 흥미가 깊을 것이오 춘향전을 여러 백번 노래한 명창 광대에게는 더욱 흥미가 깊어 참춘향전을 이제야 보네 그려 하는 탄식을 발하리라고 믿는다. 또 춘원의 춘향전은 남녀학생이 보아도 좋을만치 고상하고 주사청루에서 읊어도 좋을만치 보편성이 있을 것을 믿는다. 우리는 만천하 독자로부터 춘원이 필생의 정력을 다하여 그리는 위대한 우리 문학을 괄목하고 보려한다.
춘향전 개작 현상공모는 성공하지 못했으나 춘향전을 근대적으로 해석해 보려고 했던 시도는 시대를 앞선 발상이었고 ‘신춘문예’는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약 한달 정도의 응모 기간을 가진 첫 신춘문예는 두달 후인 3월 2일 지면을 통해 당선자를 발표했습니다.
1925년 3월 2일자 부록 1면
당선된 문예 발표
이번 당선된 작품과 씨명은 여하
소설
2등 오빠의 이혼사건(최자영)
3등 방랑의 광인(최풍)
선외(選外) 출교( 黜敎) (이영근)
시
3등 봄(김창술)
3등 농부(기환)
선외(選外)
바람(유기춘)
거짓말슴(노양근)
동요
1등 소곰쟁이외 4편(한정동)
2등 연꽃(장석전)
3등 가마귀(유택관)
선외(選外) 가작 14편
가정소설
3등 시집살이(이문옥)
선외(選外)가작 의문의 Pㅅ자(字) (유민성)
동화극
선외(選外) 가작
날개없는 비둘기(연은용)
올빼미의 눈(윤석중)
비밀의 열쇠(마태영)
표백소녀(신필희)
1925년 3월 2일자 부록 1면. 응모된 신춘문예 원고
1925년 신춘문예에서 아동문학가 윤석중(尹石重)이 동화 ‘올뺌의 눈’으로 공식 등단했고 황순원(黃順元)은 1933년 시 부분에서 ‘우리의 새 날을 피바다에 떠서’가 가작으로 뽑혔으며 1936년에는 김동리(金東里)가 단편소설 ‘산화(山火)’로 당선작, 정비석(鄭飛石)이 ‘졸곡제(卒哭祭)’로 가작, 서정주(徐廷柱)가 ‘벽(壁)’으로 시부분에 당선, 세 거목이 동아일보를 통해 같이 문단에 나왔습니다.
신춘문예와 관련 기사를 쓰면서 저도 발견하게 된 것인데 이라거나 는 표현은 과장된 것입니다. 신춘문예공모는 1914년 한글신문이지만 총독부 기관지 격이었던 매일신문이 처음 시작했고 신춘문예란 표현도 1919년 12월부터 이 신문에서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에서 민간신문 중에 최초로 도입했다’는 표현이 정확하며 본보가 창안했다거나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이라는 표현의 사용에는 신중을 기해야한다고 생각됩니다.
Comment by 권재현 — 2010/08/02 @ 7:12 오후
매일신보는 ‘현상소설모집’ ‘신춘문예제’ ‘소설현상제’등의 용어를 썼고 ‘개벽’등의 잡지에서도 ‘신춘문예’라는 말을 썼습니다. 동아일보가 최초라는 의미는 신문사에서 시행하고 있는 ‘신춘문예’라는 제도와 용어로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신춘문예의 효시라는 뜻입니다.
Comment by 신이 — 2010/08/03 @ 10:46 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