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1월 이광수가 쓴 사설 ‘민족적 경륜’의 파문에 이어 그 해 4월, 이른바 ‘박춘금(朴春琴)사건’(또는 ‘식도원 권총협박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박춘금사건’이란 재일(在日) 조선인 깡패 보스 박춘금이 송진우 사장과 인촌 선생을 식도원(食道園)으로 유인, 권총으로 위협하며 ‘관민야합의 어리(漁利)운동’이라는 제하의 사설(1924년 4월 2일자 1면)을 통해 박(朴)이 조직한 친일유지(有志)조직 ‘각파유지연맹(各派有志聯盟)’을 비판한 것에 대해 사과할 것과 동아일보가 모금한 재외동포위문금 중에서 3000원을 자신들에게 내놓을 것을 요구한 것. 이 때 송 사장이 ‘사담(私談)’이라며 ‘주의 주장은 반대하나 인신공격한 것은 온당치 못한 줄로 인(認)함 – 대정(大正) 13년 4월 2일 송진우’라고 써 준 것이 친일지를 통해 먼저 공개되며 문제가 됩니다. (추후 상술)
매일신보 1924년 4월 13일자 5면
이 사건으로 1924년 4월 25일 열린 임시 중역회의에서 사장 송진우, 전무 신구범, 상무 겸 편집국장 이상협, 취체역 김성수, 장두현이 물러나고 그 다음날인 4월 26일 이광수는 동아일보를 떠납니다.
이광수는 그러나 1년 3개월여 뒤인 1925년 8월 1일 재입사, 1933년 8월 29일 조선일보로 갈 때까지 8년여 동안 병마(病魔) 속에서도 사설 소설 횡설수설, 4설을 쓰며 시, 시조, 동화, 수필, 평론, 서평, 기행문, 번역물 등등 하루 원고지 70장 이상을 써 지면에 쏟아 내는 열정적 활동을 펼칩니다. 그 시절 동아일보는 ‘가장 세력있는 신문’이었고 이광수는 ‘가장 세력있는 신문’에서 전성시대를 구가합니다.
김동인(金東仁)은 춘원연구(9) (삼천리, 1935년 9월호 242~244쪽)에서 “춘원이 병상에 넘어져 사무를 못 볼 때에도 춘원의 의자는 비워 두어서 후일 다시 나올 날을 기다리고 하였다. 그런지라 만약 춘원의 편에서만 동아일보를 배척치 않으면 언제까지든 동아일보는 춘원을 즐겨 맞았다. 이렇듯 서로 굳게 맺어진 동아일보가 점점 장성하였다. 다른 온갖 신문의 위에 군림하듯이 되게까지 되었다. 이 동아일보의 대성이라 하는 것이 춘원의 사회적 대성과 떼지 못할 큰 관계가 있는 것이다. 춘원은 동아일보 지상에 소설을 쓸 의무를 사(社)에서 지게 되었다. 사(社)와 춘원의 사이는 물론 소설을 쓰는 것이 「춘원의 의무」일 것이다. 그러나 한 개 문학자로서의 입장으로 볼 때에는 그것은 무엇에 비기지 못할 한 개 커다란 권리라 볼 수가 잇다. 대체 조선과 같이 출판계가 빈약한 곳에서는 자기의 작품을 활자화하기가 매우 곤란하다. 이러한 가운데서 무한히 활자화할 의무를 지게 된 춘원은 바꾸어 말하자면 무제한으로 창작을 발표할 기관을 얻은 것이나 일반일 것이다. 춘원은 쓰고 또 썼다. 연달아 동아일보 지상에는 춘원의 작품이 나타났다. 가장 세력 있는 신문 지상에 가장 많이 쓰기 때문에 가장 넓게 알려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광수전집 별권’(삼중당, 1976)과 ‘이광수와 그의 시대 2’(김윤식, 솔출판사. 1999, 562~575쪽) 연보를 참고해 재정리한 그의 문필 활동은 아래와 같습니다.
1923년(31세)
– 2월 12일 「가실(嘉實)」(단편), Y생이라는 익명으로 동아일보에 처음 연재를 시작, 23일까지 11회 연재. ‘가실(嘉實)’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라 진평왕 때의 설화(舌禍) 설씨여(薛氏女)를 바탕으로 한 것. 설화는 시골총각이 동네처녀(약혼녀)의 늙고 병든 아비를 대신해 고구려 원정에 나갔다가 포로가 돼 머슴살이를 하다 주인의 신뢰를 얻어 데릴사위가 될 수도 있었으나 신라로 돌아와 다른 곳에 시집보내려는 아비의 간청을 뿌리치고 기다리던 그 동네처녀와 6년 만에 결혼한다는 것이나 이광수는 ‘가실(嘉實)이 신라로 돌아가는 장면에서 소설을 끝내 미완(未完)의 여운을 남기는 창작력을 발휘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1923년 2월 12일자 1면, 가실 첫 회
– 3월 27일「선도자(先導者)」(장편), 장백산인(長白山人)이라는 아호로 연재 시작. 도산 안창호 선생을 모델로 한 이 소설은 총독부의 탄압으로 111회(7월 17일)로 중단됐습니다.
이것이 참말일까. 아아, 이것이 참말일까. 오늘 신문에 난 상항(桑港) 전보가 참말일까. 한번 다시보자!
“조선민족의 지도자 리항목은 작일 당지 국민회관에서 연설하고 돌아오는 길에 어떤 조선 사람의 육혈포에 가슴을 맞아 시립병원에 입원하였으나 금조에 사망하였는데 가해자는 곧 미국 관헌에 체포되였다더라.”
이 전보가 과연일까. 아아, 과연일까. 그렇다 하면 진실로 조선 백성은 그의 참 지도자를 잃어버렸구나!
극적 요소를 앞세워 관심을 끈 ‘선도자’는 “종래 1면에 게재하여 오든 소설 ‘선도자’는 쓰는 이의 사정에 의하야 작일 중편 종결로써 아직 중지하고 후일 적당한 시기를 기다려 하편을 게재하겠습니다” 는 사고와 함께 111회로 중단됩니다.
1923년 3월 27일자 1면
1923년 7월 18일자 1면 선도자 중단 사고
– 5월 16일 촉탁기자로 입사.
– 9월 9~17일 기행문 「초향록(草香錄)」연재(7회).
– 12월 1일 임(任) 기자, 소설 「허생전」연재 시작.
1924년(32세)
– 1월 2~6일「민족적 경륜」사설 연재.
– 3월 21일「허생전」111회로 연재 완(完).
– 3월 22일「금십자가(金十字架)」연재 시작.
– 4월 26일「민족적 경륜」 파문으로 퇴사.
퇴사 후 그는 비밀리에 북경 중앙호텔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과 8일간 같이 지내며 흥사단 운동의 방략과 동포들에게 전하는 도산의 어록을 필기해 돌아옵니다.
– 5월 11일 신병으로 「금십자가」연재 49회로 중단.
-11월 9일「재생」연재 시작(1925년 9월 28일자까지 218회 연재).
1925년(33세)
– 1월 1일 「조선 문단의 현상과 장래」(평론).
– 1월 12일 「타고르의 원정(園丁)에 대하여」(서평).
1924년 4월 퇴사 후 비밀리에 북경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나 기록해온 도산어록을 1925년 1월 23일자 동아일보를 통해 전합니다. 그러나 동아일보를 통하여 국내 동포에게 드리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글은 총독부의 게재금지조치로 1월 26일자 4회분 전문이 깎은 채 나가며 중단됐습니다.
1925년 1월 23일자 1면
1925년 1월 26일자 1면
– 3월 21일「척추카리에스」로 백인제의원에서 수술 받고 100여일 입원했다 신천으로 정양을 떠나「재생」 집필.
– 7월 1일 「재생」연재 계속.
– 8월 1일 재입사.
– 9월 28일 「재생」218회로 연재 완(完).
– 9월 30일 「대춘향(大春香)」연재 시작(1926년 1월 3일까지 96회).
병마(病魔)에 시달리면서도 1925년 9월 28일 「재생(再生)」을 218회로 끝내고 이틀 뒤인 9월 30일 “이바라 방자야”로 시작되는 「대춘향(大春香」을 계속하고 「대춘향」을 1926년 1월 3일 96회로 마치고 이틀 뒤인 1월 5일「천안기(千眼記)」의 연재를 다시 시작하는 초인적인 작업을 계속합니다.
1925년 9월 30일자 6면과 1926년 1월 3일자 8면
– 10월 9일 「꿈」육당께, 「古時調」(시조) 게재.
– 10월 10일 「중추월(中秋月)」(시조).
– 11월 2~12월 5일 「신문예의 가치(新文藝의 價置)」(평론) 24회 연재.
– 11월 5일 「곡 백암선생(哭 白巖先生)」 (조시).
1926년(34세)
– 1월 1일 부록 동아일보 사가(이광수 작사 김영환 작곡)
– 1월 1일「줄리어스 시이저」제2막 제3장 번역 시극(詩劇).
– 1월 2~3일 「중용과 철저」- 조선이 가지고 싶은 문학(평론) 2회 연재.
– 1월 3일「대춘향」96회로 연재 완.
– 1월 5일「천안기(千眼記)」연재 시작.
1월 2~3일 동아일보에 2회 연재한 ‘중용과 철저 – 조선이 가지고 싶은 문학’에 대해 양주동이 조선일보에 반론을 제기하자 이광수는 문필생활 중 처음으로 논쟁을 벌입니다.
조선일보 1월 22~23일자 ‘현하(現下) 조선이 가지고 싶은 문학, 이광수씨의 중용과 철저란 글을 비평하여 자가(自家)의 의견에 급(及)함’ – 양주동.
– 1월 27일 양주동씨의 ‘중용과 철저’를 읽고(1회)
– 1월 28일 양주동씨의 ‘중용과 철저’를 읽고(2회)
– 1월 29일 양주동씨의 ‘중용과 철저’를 읽고(3회)
– 1월 30일 양주동씨의 ‘중용과 철저’를 읽고(4회)
양주동의 반론에 이광수는 네 차례에 걸쳐 반박을 했고 양주동은 조선일보 2월 19일자 석간 3면에 ‘이광수씨의 중용과 철저를 읽고 그에 답하야’를 기고했습니다.
논쟁 요지는 이광수가 ‘중용(中庸)’의 ‘무과불급(無過不及 ·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음)’을 인용하며 우리 민족에게 주고 싶은 문학은 밥이나 물과 같은 ‘상적(常的) 문학’ 즉 ‘평범한 문학’, 윤리적 문학이어야 한다고 한 반면 양주동은 ‘상적(常的) 문학’에는 동의하나 문학의 영구성을 논하기 전에 당대의 시대정신을 먼저 담아야한다며 헤겔의 변증법을 인용, 조선이 가질 문학은 양극화되는 ‘은둔’과 ‘혁명’, 즉 정(正)과 반(反)이 대립하여 합(合)이 되는 중용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34세의 조선 천재 이광수의 고전적 문학론에 23세의 신예 양주동이 반기(反旗)를 든 것입니다. 양주동은 이후 문단의 주목을 받고 모르는 것이 없는 박학다식(博學多識)한 박사가 돼 ‘국보(國寶)’라는 호칭을 듣게 됩니다.
그는 동아방송(1966년 4월 10일 방송)의 ‘유쾌한 응접실’에 출연해 “맹자란 책에요, 옛날에 내가 어렸을 때 읽었던 책인데 ‘성문과정 군자치지(聲聞過情 君子恥之)’라 소문이 사실보다 지나치다는 것을 군자가 부끄러워한다, 그랬습니다. 사실 내가 국문학도 좀 하고 한문학은 물론 뭐 상당히 많이 알구요. 영문학이니 불문학이니 또 역사학이니 약장사를 많이 벌여서요, 달변이고 뭐 소위 박식이라고 그래서 학생들이 날 ‘국보’니 뭐 이러는데 참 송구스러운 얘깁니다. 그런데 ‘국보’란 이름은 누가 만들어 줬냐하면 손기정 씨 마라손, 그 이가 날 ‘국보’라고 해서 그 이가 한 그 말을 고맙게 지금도 생각합니다. 때는 1.4후퇴(1951년 1월 4일) 땐데 다른 권세 있는 사람, 세력 있는 사람들은 말짝 다 미리 갔어요. 자동차 타고 다 갔는데 나는 그런 편의가 없어서 동아일보 사장실(편집자 주 – 당시 사장은 최두선 선생임)로 이렇게 갑니다. 가서 어리적 어리적 하고 앉을라니깐 그 왠 사람이 앉아 있어요. 그래서 통성명을 했죠. 누구냐 그러니까 “제가 손기정이올시다.” 그래, 난 누구냐고 묻길래 내가 양주동이라니까 손기정 씨가 눈을 껌뻑 껌뻑 하더니 ‘국보’ 두 사람만 여기 남았군요. 다른 사람은 다 그러면… ‘국보’ 두 사람만 남았군요. 그래요. 그래서 내가 일평생 잊지 못해요. 다른 사람들이 날 ‘국보’라 해가지고 우습게 여기지만은 그 이가 그랬던거만은 내가 고맙게 생각합니다”고 ‘국보’라는 명칭의 유래를 설명했습니다.
– 3월 5일「동생」(동화).
– 3월 6일「닭」(동화), 「보낸 뒤」(시조).
– 3월 7일자로 2차 무기정간처분을 당해 「천안기」61회로 중단.
– 4월 21일 속간.
– 5월 1일「봄의 설움」(수필).
– 5월 10일「마의태자(麻衣太子)’」연재 시작(1927년 1월 9일까지 227회 연재).
– 6월 1일「육당의 근작 ‘심춘순례(尋春巡禮)’를 읽고」(평론).
– 6월 신병 재발로 경의전병원 입원.
-11월 8일 1차 편집국장 취임.
그러나 이광수는 이듬해(1927년) 1월 9일 소설 「마의태자」를 227회로 끝낸 뒤 1월 16일 「유랑」연재를 시작해놓고 편집국장 취임 2개월여 만인 1월 28일 다시 각혈하고 쓰러져 「유랑」은 1월 31일 16회로 중단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