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조선인사람이 깃브게 부를 조선의 놀애를 가지고 싶습니다. 조선의 땅과 사람과 그의 힘과 아름다움과 그의 빛난 장래에의 약속과 희망. 이런 것을 넣은 웅대하고 장쾌하고도 숭엄한 놀애. 과연 조선의 놀애라고 하기에 합당한 놀애를 구하는 것은 아마 조선인 사람 전체의 생각이라고 믿습니다. 본사에서는 이러한 건성(虔誠)으로 만천하에 조선의 놀애를 모집합니다.
―신춘 대현상모집 사고(社告) 동아일보 1930년 12월 20일자》
―신춘 대현상모집 사고(社告) 동아일보 1930년 12월 20일자》
1930년대 들어 일본은 만주 침략을 준비하며 조선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세계공황의 충격파는 식민지 조선에도 전해져 국민의 생활은 궁핍해져만 갔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등불을 밝힐 노래가 필요했다. 동아일보는 민족에게 희망을 고취할 ‘조선의 노래’를 공모했다. 1930년 4월 3차 무기정간을 당했다가 그해 9월 속간된 직후였다. 언론사가 나서서 국민 창가를 모집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애국애족 사상을 담은 10여 개의 창가가 있었지만 온 국민이 애창할 만큼 널리 불리는 노래는 없었다.
창가 공모에 1등 30원, 2등 20원, 3등 10원의 상금을 내걸었다. 가사를 제출하되 작곡 첨부는 선택 사항이었다. 공모 기간은 비교적 짧았다. 사고가 나가고 닷새 후인 25일까지 작품을 제출하도록 했다.
안타깝게도 당선작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동아일보는 심사위원이었던 시조 시인 이은상에게 의뢰해 공모된 여러 작품 중에서 좋은 구절을 하나씩 뽑아 새 가사를 만들도록 했다. 1931년 1월 21일자 지면에 익명생(匿名生)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의 노래’가 발표됐다.
‘백두산 뻗어나려 반도삼천리/무궁화 이동산에 역사반만년/대대로 예사는 우리이천만/복되도다 그이름 조선이로세/삼천리 아름다운 이내강산에/억만년 살아갈 조선의자손/길러온 재조와 힘을모두세/우리의 앞길은 탄탄하도다/보아라 이강산에 밤이새나니/이천만 너도나도 함께나가세/광명한 아침날이 솟아오르면/깃븜에 북받혀 놀애하리라’
이듬해 작곡가 현제명이 이 가사에 곡을 입혀 노래가 완성됐다. 1932년 4월 1일자 동아일보에는 ‘조선의 노래’ 악보가 실렸다. 장엄한 분위기의 가사와 아름다운 멜로디가 어우러진 이 노래는 국가(國歌)가 없던 시대에 사실상 국가 역할을 했다. 일본은 1938년 ‘조선의 노래’를 금지시켰지만 노래는 입에서 입을 타고 퍼져나갔다. 광복 후 ‘조선의 노래’는 ‘대한의 노래’로 제목을 바꾸고 가사를 약간 손질한 뒤 본격적으로 널리 불리게 됐다.
1930년 동아일보 대현상모집에는 ‘조선의 노래’ 이외에도 여러 가지 주목할 만한 항목이 있었다. ‘조선의 아들딸이 주야로 스스로를 교양하고 훈련하는데’ 길잡이가 될 수 있는 ‘조선청년의 좌우명’을 모집했다. 생활혁신, 민족보건, 식자운동 등 3개 분야에서 ‘우리의 슬로건(표어)’도 공모했다. 식자운동은 동아일보가 1930년대 크게 벌인 문맹퇴치운동, 한국철자 정립사업과 연결되는 것이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창가 공모에 1등 30원, 2등 20원, 3등 10원의 상금을 내걸었다. 가사를 제출하되 작곡 첨부는 선택 사항이었다. 공모 기간은 비교적 짧았다. 사고가 나가고 닷새 후인 25일까지 작품을 제출하도록 했다.
안타깝게도 당선작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동아일보는 심사위원이었던 시조 시인 이은상에게 의뢰해 공모된 여러 작품 중에서 좋은 구절을 하나씩 뽑아 새 가사를 만들도록 했다. 1931년 1월 21일자 지면에 익명생(匿名生)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의 노래’가 발표됐다.
‘백두산 뻗어나려 반도삼천리/무궁화 이동산에 역사반만년/대대로 예사는 우리이천만/복되도다 그이름 조선이로세/삼천리 아름다운 이내강산에/억만년 살아갈 조선의자손/길러온 재조와 힘을모두세/우리의 앞길은 탄탄하도다/보아라 이강산에 밤이새나니/이천만 너도나도 함께나가세/광명한 아침날이 솟아오르면/깃븜에 북받혀 놀애하리라’
이듬해 작곡가 현제명이 이 가사에 곡을 입혀 노래가 완성됐다. 1932년 4월 1일자 동아일보에는 ‘조선의 노래’ 악보가 실렸다. 장엄한 분위기의 가사와 아름다운 멜로디가 어우러진 이 노래는 국가(國歌)가 없던 시대에 사실상 국가 역할을 했다. 일본은 1938년 ‘조선의 노래’를 금지시켰지만 노래는 입에서 입을 타고 퍼져나갔다. 광복 후 ‘조선의 노래’는 ‘대한의 노래’로 제목을 바꾸고 가사를 약간 손질한 뒤 본격적으로 널리 불리게 됐다.
1930년 동아일보 대현상모집에는 ‘조선의 노래’ 이외에도 여러 가지 주목할 만한 항목이 있었다. ‘조선의 아들딸이 주야로 스스로를 교양하고 훈련하는데’ 길잡이가 될 수 있는 ‘조선청년의 좌우명’을 모집했다. 생활혁신, 민족보건, 식자운동 등 3개 분야에서 ‘우리의 슬로건(표어)’도 공모했다. 식자운동은 동아일보가 1930년대 크게 벌인 문맹퇴치운동, 한국철자 정립사업과 연결되는 것이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