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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83> 서울 남산

Posted by 신이 On 2월 - 23 - 2010

《“작일 남산 방면의 대폭성(大爆聲)은 경성 시내의 남쪽 하늘노부터 밋지 못하겟다만 별똥이 동북간을 흘너 떠러지며 큰 소리가 나고 경성 부근에는 잠깐 디동(地動)이 잇섯는대 이에 대하야 경성측후소에서는 말하되 성학(星學)에 대한 설비가 업슴으로 자세한 대답은 못하겟소 하더라.”―동아일보 1920년 6월 30일자》

일제가 봉수대 철거
장충단 공원화하고
조선신궁도 세워



일제강점기 서울 남산 조선신궁 진입로의 모습. 분수대로 통하는 지금의 돌계단은 조선신궁 참배로 계단을 확장한 것이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조선시대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인경산(引慶山·상서로운 일을 끌어들이는 산)’으로 지칭한 서울 남산은 풍수로 따지면 안산(案山·집터나 도읍의 맞은편에 있는 산)에 해당한다. 봉우리 서쪽 바위의 생김새가 누에를 닮았다 해서 ‘잠두봉(蠶頭峯)’이라고도 불렀다. 천재지변의 침입으로부터 도시를 보호하는 안산을 길러야 한다는 이유로 주변 지역에 널리 뽕나무를 심었다. 지금의 잠실(蠶室), 잠원동(蠶院洞)은 그 흔적이다.


조선 도읍의 남방을 지키는 주작(朱雀)의 현신으로 여겨진 남산은 일제의 통치 기간 중 여러 차례 아프게 훼손됐다.

태종 때부터 전국 봉화를 받아 변경의 상황을 병조에 알리던 5개의 봉수대가 철거되고, 1905년 왜성대(倭城臺)로 불리던 남산 북쪽 기슭 지금의 중구 예장동 자리에 통감부가 설치됐다.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이 부근에 ‘녹천정’이라는 정자를 만들고 아침저녁 휴식처로 삼았다. 1939년 경무대 총독 관저가 새로 지어진 뒤 통감부 건물은 역대 통감의 초상화와 유품을 전시하는 기념관으로 쓰였다.

동아일보는 1924년 4월 23일 ‘세력자와 철창인-왜성대와 서대문형무소’ 기사에서 “녯 도읍터 서울 남산 왜성대에는 빗 고흔 사구라가 조흔 봄철을 혼자 맛난 것가치 그 검은 충충한 총독부도 꼿 속에 들어 잇고… 서대문형무소에는 현재의 이 사회와 이 환경에 대하야 불가튼 불평을 품고 울분한 마음으로 속절 업는 세월을 보내고 잇는 사람도 잇다”고 전했다.

청일전쟁에 승리한 뒤 1898년 왜성대 공원에 남산대신궁을 세웠던 일제는 1916년부터 남산 전체의 공원화를 추진하고 1925년에는 조선신궁을 완공했다. 1900년 고종황제가 임오군란과 을미사변 때 죽은 신하와 장병의 넋을 기리기 위해 산 동편 기슭에 세운 장충단도 1919년 공원으로 바뀌었다. 남산 정상에 태조가 만들어 놓았던 국사당은 인왕산 서쪽 기슭으로 쫓겨났다. 분수대로 오르는 지금의 남산 돌계단은 조선신궁을 오르던 계단을 확장한 것이다.

광복 후 조선신궁이 철거된 자리에는 1956년 광복절에 이승만 전 대통령이 자신의 동상을 세웠다. 이 동상은 1960년 4·19혁명을 계기로 철거됐다. 5·16군사정변 후에는 장충단공원 용지 일부에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자유센터(1964년)와 타워호텔(1969년)이 건립됐다. 남산 케이블카가 운행을 시작한 것도 이해부터다. 현대 서울의 상징 중 하나로 자리 잡은 높이 236.7m의 남산 정상 N서울타워는 1975년 8월 종합전파시설 및 관광전망대 용도로 완공돼 1981년 10월 일반에 공개됐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blog_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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