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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69>경제수탈

Posted by 신이 On 2월 - 22 - 2010

《“전라북도 익산군 함열면 와리에서 유력자의 발긔로 전북 도지사의게 청원서를 뎨출하얏는대 그 대략은 촌민에게 대하야 가마니와 수출미 등을 렴가로, 지명 매입함으로 촌민의 생활이 빈궁에 빠짐을 면치 못하는 것과 농가의 농긔를 고가로 매각하는 등 여러 가지 불평을 드러 탄원을 뎨출함이라더라.” ―동아일보 1922년 5월 21일자》

 東拓내세운 토지 늑탈
뒤주도 뒤진 식량공출
창업막아 성장 싹 잘라



 일제강점기 초기 전북 군산항에 쌓여 있는 쌀가마니. 호남과 논산평야에서 생산된 쌀은 ‘전군(전주∼군산)가도’를 따라 군산항에 모인 뒤 일본으로 반출됐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우리 근대의 잦은 풍경 중 하나는 ‘배고픔’이었다. 근대화의 꽃을 피우지 못한 식민지 국민이 겪어야 하는 아픔이기도 했다.

한일강제병합 후 일제는 곧바로 토지조사사업(1910∼1918년)에 착수했다. 토지소유권을 보호하고 토지세를 공정히 걷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토지는 국책회사인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를 비롯한 일본 토지회사와 일본인들에게 싼값에 매각됐다.


당시 신문에는 소작인이나 지주들이 동척을 상대로 소유권 반환소송을 제기했다는 기사가 자주 등장했다. 전남 나주에 있던 궁삼면(1914년 행정관할 구역 통폐합 이전의 전남 나주군의 지죽·상곡·욱곡면 등 3개 면) 토지 약 1200ha를 매입할 때는 권리를 주장하는 농민과 지주들을 헌병이 포위한 뒤 동척 소유임을 강제로 인정케 했다.

특히 무지주 무신고 토지는 그대로 총독부의 소유가 됐고 강제로 매입이 이뤄져 분란이 끊이지 않았다. 충남대 허수열 교수(경제학)에 따르면 1900년대 초반 일본인 소유 논밭의 면적은 전체의 10%대였지만 비옥한 토지를 주로 차지했기 때문에 쌀 생산량의 비중은 25%나 됐다.

1920년대 조선총독부는 산미증산계획을 펼쳐 천수답을 수리답으로 만들고 금비(화학비료) 사용을 강요했다. 1921년 1400만 석이던 쌀 생산량은 1928년 1700만 석으로 늘었지만 같은 기간 일본으로 빠져나간 쌀의 양은 300만 석에서 700만 석으로 늘어 증산량보다 많았다. 쌀의 보관과 수송에 필요한 가마니 확보를 위해 초등학생들에게 겨울방학 숙제로 새끼를 꼬고 가마니를 짜게도 했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뒤 총독부가 식량 강제 공출에 나서 식량 사정은 더욱 나빠졌다. 순사와 면서기를 앞세워 집 안에 숨긴 쌀 적발에 나서고, ‘조반석죽(朝飯夕粥) 운동’ ‘한 숟가락 덜 먹기 운동’도 벌였다. 쌀이 귀해지자 총독부는 밀가루와 메밀가루를 압착해 쌀알처럼 만든 면미(麵米)를 유통시켰다.

총독부는 또 회사령과 광업령 등으로 조선인들이 허가 없이 회사나 광산을 가질 수 없도록 해 산업화의 싹이 자라지 못하도록 했다. 허 교수는 “수탈의 개별 사건들은 겉으로 매입 등 합법적인 방식을 띠었지만 일제는 소작체제라는 거대한 사회시스템을 이용해 구조적으로 수탈을 했고, 조선 기업의 성장을 막아 근대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 자체를 빼앗았다”고 말했다.

올해로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에 나선 지 100년이 됐다. 광복 후 기업 운영의 자율권을 가지게 된 한국의 기업들은 오늘날 정보기술(IT)와 조선 등 여러 분야에서 일본을 앞지르고 있다. 한국 기업들이 독특한 경영 방식으로 세계화의 선두로 달려가는 ‘코벌라이제이션(코리아+글로벌라이제이션)’에도 해외 기업이 주목하고 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blog_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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