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학살에 보복”
일왕의 궁성에 폭탄
재판서 日침략 통박
김지섭의 옥중 단식투쟁을 보도한 동아일보 1925년 1월 10일자.
《“김지섭은 한마디 할 말이 있다고 자리에 일어나더니 당당한 말로 일본 정부의 우리 조선에 대한 악정(惡政)을 론란(論難)하고 이어서 이번 자기가 취한 행동은 순전히 일본 관민을 각성식히기 위함이라는 의미로 진술하얏다더라.”
―동아일보 1924년 10월 13일자》
1923년 12월 하순, 중국 상하이를 떠나 일본 후쿠오카로 향하는 한 화물선. 여기 몰래 숨어든 30대 한국인이 비장한 각오로 시를 읊고 있었다.
‘만리창파에 한 몸 맡겨 원수의 배에 앉았으니 뉘라 친할고/ … /종적 감추어 바다에 뜬 나그네 그 아니 와신상담하던 사람 아니던가/평생 뜻한 바 갈 길 정하였으니 고향으로 향하는 길 다시 묻지 않으리.’
일본 미쓰이 물산의 석탄운반선에 몸을 숨긴 이 젊은이는 열흘간의 항해 끝에 1923년 12월 30일 후쿠오카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남의 눈을 피해 도쿄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추강 김지섭(1885∼1928).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한 김지섭은 1922년 의열단에 가입해 상하이, 베이징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는 1923년 간토(關東)대지진 당시 일제의 조선인 학살을 보복하기 위해 일본 정부요인을 암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제국의회에 참석하는 일본 총리 등 요인을 처단하기 위해 도쿄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김지섭은 “제국의회가 무기한 연기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따라 거사 계획을 바꿔 일왕의 궁성을 폭파하기로 결심했다.
1924년 1월 5일 관광객 틈에 몸을 숨긴 김지섭은 궁성의 니주바시(二重橋)를 향해 폭탄 3개를 던졌다. 폭탄의 불발로 거사는 실패했지만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는 현장에서 붙잡혔다.
1924년 9월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재판이 시작됐다. 김지섭은 신병을 이유로 연기를 거듭했다. 이는 항일 법정투쟁이었다. 첫 공판은 10월 11일 열렸다. 김지섭은 일제의 침략정책을 통박했고 자신의 거사가 “일본을 각성시키기 위함”이라고 외쳤다. 그는 이어지는 공판에서 “조선 사람은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항쟁할 것이다. 사형이 아니면 나를 무죄로 석방하라”고 밝혔다.
동아일보는 그의 법정투쟁을 지속적으로 보도했다. 1924년 10월 13일자 ‘일본 악정 통론(痛論)’. 1924년 10월 15일자 ‘공판 상보-최후까지 당당한 김지섭 태도’ 등의 기사를 통해 그의 당당한 법정 투쟁을 세상에 전했다. 김지섭은 1925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변호사가 상고하려 했으나 김지섭은 이를 말렸다. “죽음 아니면 무죄”를 주장했기에 구차하게 목숨을 구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김지섭은 1928년 2월 20일 뇌일혈로 지바(千葉) 형무소 독방에서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김지섭의 고향인 경북 안동엔 그의 애국정신을 기리는 추모비가 서 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