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조선의 것 되기를 바랄뿐입니다.’
동아일보를 통하여 조선민족에게
인도 간디 씨의 메세지
사랑하는 친구여
주신 편지는 받았나이다. 내가 보낼 유일한 부탁은 절대적으로 참되고 무저항적인 수단으로 조선이 조선의 것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뿐입니다.
26년 11월 26일(21일의 오기<誤記> – 편집자 주)
사바르마티에서
엠 케 간디
Sung Soo Kim
President
Dong-A Ilbo
Seoul, (Koera)
The Ashram,
Sabarmati, 21, 11, 26.
Dear friend,
I have your letter. The message I can send is to hope that Korea will come to her own through ways absolutely truthful and Nonviolent.
Yours Sincerely,
M. K. Gandhi
‘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1869~1948)가 보낸 편지가 동아일보 1927년 1월 5일자 2면에 실렸습니다. 김성수 동아일보 사장이 보낸 편지에 대한 답신 형식이나 그 내용은 간디 옹(翁)이 조선 민족에게 보내는 메세지였습니다.
‘조선이 조선의 것이 되기를 바랄뿐입니다.’
인촌 김성수 선생이 간디 옹(翁)에게 어떤 내용의 편지를 보냈는지에 대한 기록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간디 옹이 ‘내가 보낼 수 있는 유일한 메세지는 절대적으로 참되고 무저항적인 수단으로(absolutely truthful and Nonviolent)’ 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미뤄 인촌 선생이 간디 옹에게 식민지 조선을 위한 고언(苦言)을 청하지 않았나 추측됩니다.
이 편지는 1926년 11월 21일 인도 서부 사바르마티 아슈람(Ashram, 학교 농장 작업장이 있는 공동체)에서 보냈습니다. 간디 옹이 신병으로 감옥에서 풀려나 대부분의 시간을 아슈람에 머물 때입니다. 간디 옹은 거기서 지지자들에게 편지를 쓰고 독립운동에 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날자(1927년 1월 5일 2면) 동아일보는 간디 옹의 약력도 소상히 소개했습니다.
“간디 씨의 이름은 마하트마, 대령(大靈·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이라하며 인도 백성이 가장 숭배하는 위인이오 지도자인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현대의 성인으로 무저항 운동으로 인도의 자유를 회복하려는 인도 국민운동의 수령으로 세계에 이름이 높다.
본래 인도의 파라문(婆羅門) 고가의 후예로 일찍 영국에 유학하여 변호사의 자격을 얻었고 이내 남아프리카에 건너가 영국 사람에게 차별대우 받는 동포를 위하여 십수년 분투하다가 구라파대전이 일어난 1914년에 본국에 돌아와 ‘전쟁이 끝나면 자치를 주마’하는 영국의 약속을 믿고 전쟁 중에 영국을 돕기로 약속하고 민간에 말하여 일변 용병을 모집하고 일변 전시 공채에 응모하게 하여 영국을 위하여 크게 공헌함이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영국이 약속을 저버림에 1920년 간디는 분연히 ‘비협동’을 선언하고 수백만의 국민협회를 지휘하여 영국 황태자가 인도에 행계(行啓·출입)하는 것을 기회로 전국적으로 영국 배척, 인도 자주를 주장하여 비폭력 무저항을 표어로 전국적으로 대운동을 일으켰다.
그 까닭으로 간디는 영국 관헌에게 체포되어 6년 금고의 형을 받고 옥에 있다가 1925년에 방면되었다. 간디 씨는 네가지 큰 명세를 세웠으니
1. 거짓을 말자.
2. 살생을 말자. 동포를 미워하는 것도 살생이다.
3. 맛있는 음식과 좋은 옷을 입지 말자.
4. 독신생활을 하자. 나라 일하는 동안에 가족을 갖지 말자.
그러나 간디는 이미 혼인한 사람임으로 넷째 맹세는 지킬 수가 없으나 다른 맹세는 꼭 지켜 극단의 극기 생활을 한다고 한다. 또 간디는 전 국민에게 두 가지 표어를 주었으니 그것은 수와라지(自主)와 수와데시(國産愛用)다. 바꾸어 말하면 정치적 자주와 경제적 자주라 할 것이다. 그리하되 비폭력을 수단으로 하는 것이 그의 특색이다.”
인도는 조선과 같은 식민지였기 때문에 동아일보는 창간 초부터 인도에 관한 문제를 관심있게 다뤘습니다.
“영국이라는 ‘쥐’가 인도라는 ‘식고(食庫)’ 에서 곡(穀)을 탐하고 또 그 식고를 어디까지든지 물고 놓지 않으려고 전력을 다하여 노력함은 실로 가관일 뿐 아니라…”
1920년 8월 30일자부터 9월 25일자 까지 14회에 걸쳐 1면에 ‘대영(大英)과 인도(印度)’ 라는 시리즈를 연재, 제국주의 영국의 인도에 대한 횡포를 통렬히 비난하며 조선에 대한 일제의 폭압을 간접 고발했습니다.
이같은 은유적 비판은 일제가 1920년 창간 그 해 9월 25일 동아일보에 1차 무기정간처분을 내리며 그 이유서에서 “동아일보는…(중략)…단지 표면상 독립을 선동하는 일을 피하되 항상 인례(引例)를 타국에서 취해 교묘히 반어음어(反語陰語)를 사용하여 독립사상의 선전에 기우는 형적이 현저한 바…(중략)…혹은 라마(羅馬·로마 )의 흥망을 논하며 은근히 조선의 부흥을 설(說)하고…(중략)… 영국에 대한 반역자를 상양(賞揚)하여 반역심을 자극하는 등…(후략)” 이라고 밝혀 동아일보의 숨은 의도를 그들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일제가 1차 무기정간 이유서에서 인도의 간디 옹을 ‘영국에 대한 반역자 ’라고 표현하며 ‘동아일보가 이를 상양(賞揚·칭찬하여 높임)하여 반역심을 자극했다.’고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인도의 지도자 간디 옹에 대한 기사를 끊임없이 보도했습니다.
1921년 10월 24일자 부터 30일자 까지 6회에 걸쳐 ‘인도의 문제’를 또다시 다루며 간디를 ‘새로운 인도의 구세주’라고 칭하고 ‘스와라지의 구세주로, 2억5천만 인도인의 숭경갈앙(崇敬渴仰)을 한 몸에 받는 통솔자’라고 소개했습니다.
“이 무렵 동아일보의 제목을 통해 조선인에게 내재된 독립에 대한 욕망이 어떻게 간디와 접점을 이루는지 알아보자. ‘간디, 봄베이 가로에서 군중에게 연설하는 광경(1921.10.27)’, ‘전 인도인이 갈망하는 깐디(1922.1.1)’ ‘간디의 주창으로 인도 소요 맹렬(2.4)’, ‘인도 독립당 수령 간디, 인도의 자치를 확장하라(2.5)’, ‘간디의 강경 도전(2.9)’, 이런 제호 아래 간디가 주도한 반영(反英)운동이 지면을 장식했고, 먼 이방의 지도자 간디는 인도의 대표적 지도자로 알려졌다.” (이옥순, ‘식민지 조선의 희망과 절망, 인도’, 푸른역사, 2006년, 95쪽)
인도(印度) 수아라지 운동의 발전
비매동맹(非買同盟)에서 완전 독립으로
“…독립운동의 실현 방법으로는 인도 전 민족의 대동단결을 역설하여 재래의 계급적 분열과 종교적 대항을 일소하고 인도 독립운동의 최고 목적을 달함에는 일치 단결하자는 주의 주창이 기(起)하는 동시에 국민운동의 지도자 간디 씨의 노력으로 수(遂)히 일치단결의 실천을 거(擧)하였도다. 이것이 위대한 성공이 아니고 무엇이리요. 비록 간디 씨의 일신은 영국 관헌에게 집(執)한바 되어 방금 7년의 금고로 영어의 고초를 당하는 바이나 간디 씨의 입옥(入獄)으로 점차 그 기세를 증대하여 일방으로 인도 재래의 수직방적을 부활케하여 국산 장려에 전의(專意)하고…” (동아일보 1923년 1월 6일자 1면)
“보도기사와 더불어 간디의 경험과 사상을 분석한 글도 동아일보에 많이 실렸다. 1922년 10월 31일부터 5회에 걸쳐 감옥에 들어가기 전 동지에게 넘겨준 간디의 수기가 연재되었다…이보다 앞서 8월에는 ‘간디 사상의 연구’라는 글을 5회 연재(편집자 주 – 1922년 8월 16일자~8월 21일자)하였다. 간디가 석방되고 정계를 은퇴한 뒤에는(편집자 주 – 1924년 7월 11일자~7월 16일자) ‘Mahatma Gandhi, Maker of New India’라는 영문 연재물을 받아 싣다가 ‘불가피한 사정으로 이 글이 방해를 받았다.’라는 해명과 함께 중단한 적도 있었다.” (이옥순의 위의 책 98쪽)
간디는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사건에 대해 “민중의 진정한 복리를 가슴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반드시 ‘사티아그라하(satyagraha, 진리파악) ’의 길로 이들을 인도해야한다.” (간디 전집 10권, 델리, 인도정부출판부, 1963, 108쪽)고 썼습니다.
“간디는 이토가 일본의 용감한 무사이기는 하지만 그릇된 애국심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판카즈 모한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간디와 인도의 독립운동’,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등 주최 ‘아시아 민족독립운동과 건국지도자’ 국제학술대회, 2009년 10월 9일)
‘조선이 조선의 것 되기를 바랄뿐입니다.’ 라는 간디 옹의 메세지가 동아일보에 실린데 이어 중국 상하이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인도 사람 샤스추리의 강연 ‘인도 성인 정치가 – 마하트마 간디’가 그 해(1927년) 3월 10일부터 14일자 까지 연재됐습니다.
1930년 그 유명한 소금법 반대행진(단디 마치) 때, 사바르마티 아슈람에서 단디 해안까지 24일간 367km를 걷는 전 과정을 상세하게 보도했고 ‘세계 평화와 간디’ (4회) ‘성웅 간디의 생애와 사적(事蹟)’ (11회·1930년) ‘간디 사상 연구, 자아로 초월하야 애타주의에’ (12회·1931년)와 같은 기사가 이어졌습니다.
“동아일보의 정치면 지면을 보시면 아시려니와 우리 신문은 ‘움지기는 그 세계 정계의 초점’ 을 반영하여 노키에 힘씀니다…간디-움지기든 4,5년 전에는 영인관계(英印關係)의 보도에, 만주사변, 국제연맹 등등 모다 그 일파(一波)가 세계정국에 미치는 것이라면 특히 역점을 너허, 기복하는 시간적 광경(光景)은 물론, 원인 결과를 알리기 위하야 해설로, 뉴-쓰 로, 사진으로, 확대적 또는 집약적으로 보도하야 독자로 하야곰 철저히 그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도록 하기에 노력하엿습니다…우리가 가장 관심을 가지는 초점은 어듸에 잇는가? 그것은 민중이 잘 아는 것임니다. 신문기자는 오히려 민중의 암시를 (어느 점에 관심을 가진다는) 밧어가지고 자가(自家)의 판단을 세우는 것임니다.” (설의식 동아일보 편집국장, ‘조선 문화와 민중과 신문, 3대 신문 편집방침론’, 삼천리 1935년 7월호 43쪽)
김일성 회고록 4권 113쪽에는
“나도 길림시절에 ‘조선일보’(편집자 주 – ‘동아일보’의 착오) 지상에서 간디의 편지를 읽고 박소심과 함께 무저항주의를 론평한 적이 있다. 그 편지의 원문은 아래와 같은 것이였다.
사랑하는 친구여!
나는 당신들의 편지를 받았나이다. 내가 보낼 유일한 부탁은 절대적으로 참되고 무저항적인 수단으로 조선이 조선의 것으로 되기를 바란다는 것뿐입니다.
1926년 11월 26일 사바르마티에서.
엠. 케이. 간디
편지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간디는 조선 사람들에게 무저항적인 방법으로 독립을 이룩할 것을 설교하고 있다. 아마 간디의 사고방식에 매력을 느낀 어떤 무저항주의자가 그에게 편지를 보낸 것 같았다. 길림의 교포 청년들 속에서는 간디의 사상을 자기의 신앙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게재일 |
면/단 |
제목 |
1920-05-23 |
2/2 |
對土講和條約과 印度回敎徒 |
1920-05-24 |
3/2 |
新來한 救世軍司令官 스티분쓰氏, 인도의 경험으로 조선인을 가르처(肖) |
1920-06-07 |
4/5 |
川基督敎靑年會講演: 印度事情談(꼬힌氏, 印度農工業專門學校長) |
1920-06-08 |
2/1 |
全印度國會議員, 「암리쌀」地方騷擾에 軍事的手段을 採用한 將官의 裁判及 印度總督召還要求 |
1920-06-10 |
2/1 |
印度政府策反對, 印度人及回敎代表者會議에서 |
1920-06-22 |
2/3 |
印度에 過激宣傳, 人心不穩 敵視英國 |
1920-06-29 |
2/1 |
國際勞○會議에서 印度에 民族自決主義를 適用할 것을 要求하는 決議案通過 |
1920-07-02 |
1/1 |
印度에 民族自決主義 適用 決議 |
1920-07-18 |
2/1 |
英下院, 昨年四月의 印度騷擾에 關한 報告를 들은 후 對印度策 討議 |
1920-07-19 |
2/2 |
市加古에서 開催된 第三黨政綱起草委員會, 印度代表陳述聽許 |
1920-07-23 |
2/1 |
印度 「가차가리」驛에서 英國憲兵과 群衆衝突 인도 |
1920-07-25 |
2/1 |
「따이아」將軍處罰問題, 英領印度 「빠지야뿌」에서 武裝하지 아니한 群衆에게 發砲하여 |
1920-07-29 |
2/4 |
一九一九年 四月 「암릿살」部에서 發生한 印度人 虐殺事件 |
1920-08-06 |
3/6 |
印度의 靑年志士 朝鮮을 訪問한 感想, 조선을 연구하고자 멀니멀니 인도학생 「씽구」씨가 왓다(寫: 인도의 청년지사 「지, 싸, 씽구」씨) |
1920-08-07 |
2/3 |
度過激派首領 빨강가달튿락氏死去 |
1920-08-13 |
2/7 |
印度回敎徒活動; 中央 「카리팟트」委員會에서는 對土講和條件에 强硬抗議, 英國政府保障에 反對, 印度의 平和와 民衆의 滿足을 爲해 講和條件을 政府當局의 保障과 回敎徒의 要求에 適合하게 改正할 事를 要求 |
1920-08-29 |
2/3 |
印度行政改革結果, 總督府參事會員에 印度人增加 |
1920-08-30 |
1/2 |
大英과 印度(一) 印度의 通路와 英國外交 (一記者) |
1920-08-31 |
1/2 |
大英과 印度(二) 印度의 安全保護 |
1920-09-01 |
1/2 |
大英과 印度(三) 印度接境의 獨立國 |
1920-09-01 |
3/12 |
印度靑年 「씽구」氏 餞別會, 조선불교회 주최로 |
1920-09-02 |
1/3 |
大英과 印度(四) 印度의 兩翼 「아후가니스탄」 |
1920-09-03 |
1/3 |
大英과 印度(五) 印度의 兩翼(續) 「아후가니스탄」 |
1920-09-04 |
1/2 |
大英과 印度(六) 印度의 兩翼 「아후가니스탄」 |
1920-09-07 |
4/1 |
佛敎와 東方藝術, 印度人 「씽그」氏 講演要旨 |
1920-09-10 |
3/4 |
殊常한 印度士官(가란자)秘密히 東京에 潛入, 어느나라의 부탁을 바다 일본 요색 디대의 사진을 비밀히 박히고자 동경에 |
1920-09-15 |
1/1 |
過激派와 回回敎徒, 英國의 窮境은 自作自取 |
1920-09-16 |
3/4 |
全球를 赤化할 大活動; 젼셰계의 큰운동이 미구에 이러나라는가, 과격파의 세계정복 계획이 매우 굉장하다, 過激派를 中軸삼아 去來하는 低氣壓//印度의 形勢重大; 세계점쟁이 또 이러날위험, 인도의혁명은 영국에 큰일//世界 征服의 大計; 과격주의로 션젼방법을 세워 |
1920-09-17 |
1/2 |
大英과 印度(七) 印度의 兩翼(續)「아후가니스탄」 |
1920-09-17 |
2/3 |
印度攻擊過激派司令官에 「엔버파샤」氏 被任 |
1920-09-18 |
1/3 |
大英과 印度(八) 印度의 兩翼(續) 西藏(티벳트) |
1920-09-19 |
1/3 |
大英과 印度(九) 印度의 兩翼(續) 西藏(티벳트) |
1920-09-20 |
1/3 |
大英과 印度(十) 印度의 兩翼(續) 西藏(티벳트) |
1920-09-21 |
1/2 |
大英과 印度(十一) 印度의 兩翼(續) 西藏(티벳트) |
1920-09-22 |
1/3 |
大英과 印度(十二) 印度의 兩翼(續) 西藏(티벳트) |
1920-09-24 |
1/2 |
大英과 印度(十三) 二十世紀의 印度 |
1920-09-25 |
1/2 |
大英과 印度(十四) 二十世紀의 印度 |
1921-10-24 |
2/1 |
問題의 印度(一) 新印度의 救世主 「깐듸」氏(肖) |
1921-10-26 |
2/1 |
問題의 印度(二) 英貨排斥의 狼煙 (寫: 最近 「뽐베이」市에서 外國綿布를 燒棄하는 當時의 光景) |
1921-10-27 |
2/1 |
問題의 印度(三) 非協同派의 活躍 (寫: 「깐듸」氏 「뽐베이」街路에서 群衆의게 演說하는 光景) |
1921-10-28 |
2/1 |
問題의 印度(四) 「물레로부터 自主」 (寫: 示威行列의 一部가 首都 「뗄니」의 街路를 通過하는 光景) |
1921-10-29 |
2/1 |
問題의 印度(五) 最近의 動亂 (寫: 「모풀라쓰」族의 亂黨이 其居住地方의 中心都會되는 「말나프람」市街에 殺到하는 光景) |
1921-10-30 |
2/1 |
問題의 印度(六) 英國의 最後信賴(寫) |
1922-01-01 |
3/1 |
全 印度人이 渴望하는 「깐듸」氏(肖) |
1922-02-04 |
2/3 |
印度騷擾猛烈; 「깐듸」氏의 主唱으로, 目的은 租稅不納 |
1922-02-05 |
2/1 |
印度不穩善後策, 「印度의 自治를 擴張하라」고, 印度獨立黨首領 「간디」氏가 「타임스」紙에 寄書 |
1922-02-09 |
2/1 |
「깐듸」氏의 强硬挑戰, 政治犯의 解放을 强要 |
1922-03-01 |
2/1 |
全印度國民大會委員會開會, 「간디」氏가 提議한 法津無視의 集團的運動 中止를 決議 |
1922-03-16 |
1/1 |
帝國主義의 煩悶, 印度形勢益重大, 깐듸氏 逮捕決定 |
1922-03-16 |
2/1 |
印度獨立主唱者 「깐듸」氏 遂히 就○(肖: 「마하트마 깐듸」氏) |
1922-08-16 |
1/3 |
깐듸思想의 硏究(제1회, 全5回) |
1922-08-17 |
1/2 |
깐듸思想의 硏究(제1회, 全5回) |
1922-08-18 |
1/2 |
깐듸思想의 硏究(제2회, 全5回) |
1922-08-19 |
1/3 |
깐듸思想의 硏究(제3회, 全5回) |
1922-08-20 |
1/2 |
깐듸思想의 硏究(제4회, 全5回) |
1922-08-21 |
1/2 |
깐듸思想의 硏究(제45회, 全5回) |
1922-10-31 |
1/2 |
逮捕下獄前後에 同志에 與한 印廣革命家 「간듸」의 手記 (一) |
1922-11-01 |
1/2 |
逮捕下獄前後에 同志에 與한 印廣革命家 「간듸」의 手記 (二) |
1922-11-03 |
1/3 |
逮捕下獄前後에 同志에 與한 印廣革命家 「간듸」의 手記 (三) |
1922-11-06 |
1/2 |
逮捕下獄前後에 同志에 與한 印廣革命家 「간듸」의 手記 (四) |
1922-11-07 |
1/2 |
逮捕下獄前後에 同志에 與한 印廣革命家 「간듸」의 手記 (四) |
1922-11-08 |
1/2 |
逮捕下獄前後에 同志에 與한 印廣革命家 「간듸」의 手記 (五) |
1922-11-29 |
3/3 |
獄門前에 生日祝賀, 인도독립수령 「간디」의 비장한 생일축하 |
1923-01-06 |
1/1 |
印度「수아라지」運動의 發展, 非買同盟에서 完全獨立 |
1923-06-28 |
1/1 |
「깐듸」와 「몰데칼」, 印度民族運動의 雙一幅 |
1923-10-29 |
3/1 |
印度의 聖雄 「깐듸」, 금년말안으로 출옥된다, 그러나 본인은 출옥을 불긍 |
1923-10-31 |
1/1 |
「깐디」을 懷하고 |
1924-07-11 |
3/1 |
新印度建設者「간디」<제1회, 全4回·英文欄> ‘Mahatma Gandhi, Maker of New India’ |
1924-07-12 |
3/1 |
新印度建設者「간디」<제2회, 全4回·英文欄> ‘Mahatma Gandhi, Maker of New India’ |
1924-07-13 |
3/1 |
新印度建設者「간디」<제3회, 全4回·英文欄> ‘Mahatma Gandhi, Maker of New India’ |
1924-07-16 |
3/1 |
新印度建設者「간디」<제4회, 全4回·英文欄> ‘Mahatma Gandhi, Maker of New India’ |
1925-07-03 |
1/6 |
「간디」氏 令息 國民運動次로 「요하네스불그」에 到着 |
1926-01-03 |
2/5 |
「깐듸」와 印度白丁 |
1927-01-05 |
2/1 |
「朝鮮이 朝鮮의 것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東亞日報… |
1927-03-10 |
3/2 |
印度 聖人 政治家「마하트마 깐디」[제1회, 全5回] |
1927-03-11 |
3/2 |
印度 聖人 政治家「마하트마 깐디」[제2회, 全5回] |
1927-03-12 |
3/4 |
印度 聖人 政治家「마하트마 깐디」[제3회, 全5回] |
1927-03-13 |
3/4 |
印度 聖人 政治家「마하트마 깐디」[제4회, 全5回] |
1927-03-14 |
3/3 |
印度 聖人 政治家「마하트마 깐디」[제5회, 全5回] |
1929-03-09 |
1/1 |
「깐듸」氏의 放逐 |
1929-04-01 |
1/10 |
[횡설수설] 간디의 벌금, 조선엔? |
1929-04-01 |
2/2 |
印度「깐디」氏에 罰金六十五錢 |
1930-02-18 |
1/8 |
印度總督「어읜」卿에 期限附最後通牒, 陣頭에 立한 「마하트마 깐디」氏 無抵抗運動을 開始 |
1930-03-05 |
4/10 |
「간디」의 絶叫 |
1930-03-14 |
1/2 |
數萬群衆祈禱한 後 印度의 不服從示威「깐듸」氏 悲壯한 決議를 發表 |
1930-03-16 |
1/2 |
聖雄 깐디의 生涯와 그 事蹟 印度民族運動의 恒星 (1) |
1930-03-17 |
1/2 |
聖雄 깐디의 生涯와 그 事蹟 印度民族運動의 恒星 (2) |
1930-03-18 |
1/2 |
聖雄 깐디의 生涯와 그 事蹟 印度民族運動의 恒星 (3) |
1930-03-20 |
1/2 |
聖雄 깐디의 生涯와 그 事蹟 印度民族運動의 恒星 (4) |
1930-03-22 |
1/2 |
聖雄 깐디의 生涯와 그 事蹟 印度民族運動의 恒星 (5) |
1930-03-23 |
1/4 |
聖雄 깐디의 生涯와 그 事蹟 印度民族運動의 恒星 (6) |
1930-03-26 |
1/2 |
聖雄 깐디의 生涯와 그 事蹟 印度民族運動의 恒星 (7) |
1930-03-27 |
1/2 |
聖雄 깐디의 生涯와 그 事蹟 印度民族運動의 恒星 (8) |
1930-03-28 |
1/2 |
聖雄 깐디의 生涯와 그 事蹟 印度民族運動의 恒星 (9) |
1930-03-29 |
1/2 |
聖雄 깐디의 生涯와 그 事蹟 印度民族運動의 恒星 (10) |
1930-03-30 |
1/4 |
聖雄 깐디의 生涯와 그 事蹟 印度民族運動의 恒星 (11) |
1930-12-23 |
간디의 넷째 아들 굶어죽어 |
|
1931-01-10 |
1/5 |
「깐디」氏 令息「람다스깐디」六月禁錮 |
1931-08-12 |
5/1 |
「깐디」思想硏究, 自我로 超越하야 愛他主義에 (1) |
1931-08-13 |
5/1 |
「깐디」思想硏究, 自我로 超越하야 愛他主義에 (2) |
1931-08-15 |
5/1 |
「깐디」思想硏究, 自我로 超越하야 愛他主義에 (3) |
1931-08-16 |
5/1 |
「깐디」思想硏究, 自我로 超越하야 愛他主義에 (4) |
1931-08-18 |
5/1 |
「깐디」思想硏究, 自我로 超越하야 愛他主義에 (5) |
1931-08-19 |
5/1 |
「깐디」思想硏究, 自我로 超越하야 愛他主義에 (6) |
1931-08-20 |
5/1 |
「깐디」思想硏究, 自我로 超越하야 愛他主義에 (7) |
1931-08-21 |
5/1 |
「깐디」思想硏究, 自我로 超越하야 愛他主義에 (8) |
1931-08-22 |
5/1 |
「깐디」思想硏究, 自我로 超越하야 愛他主義에 (9) |
1931-08-23 |
5/1 |
「깐디」思想硏究, 自我로 超越하야 愛他主義에 (10) |
1931-08-25 |
5/1 |
「깐디」思想硏究, 自我로 超越하야 愛他主義에 (11) |
1931-08-26 |
5/1 |
「깐디」思想硏究, 自我로 超越하야 愛他主義에 (12) |
1931-09-14 |
1/7 |
「깐디」氏 着英, 如前 半裸體로 倫敦入 |
1931-09-16 |
1/2 |
聖雄「깐디」氏와 英首相의 會見, 그 珍妙한 應酬 光景 |
1931-09-29 |
1/9 |
英紡巨頭等과 「깐디」氏 會見, 綿布輸入問題 意見交換, 「랑커숴」地方을 視… |
1932-03-02 |
4/1 |
「깐디」씨 八十원 내소, 안면방해로 소송을 당해 파리의 새 이아기꺼리 |
1933-01-04 |
6/6 |
인도 三억 민중에게 진릿길을 웨처, 자기희생의 본이 된 「카람챤드 간디」[上][肖] |
1933-01-06 |
4/7 |
인도 三억 민중에게 진릿길을 웨처, 자기희생의 본이 된 「카람챤드 간디」[下][肖] |
1933-05-13 |
1/6 |
「깐디」氏 黃膽 容態는 자못 憂慮되어 |
1934-04-27 |
1/10 |
印度의 「깐디」氏 暴漢에게 被襲, 瀆罪로 苦難을 받으라고 脅迫, 自動車로… |
1934-06-15 |
3/4 |
「간디」와 自動車, 交通機關 利用않고 徒步 고집(런던) |
1936-01-11 |
1/7 |
聖雄「깐디」 臥病, 老齡이라 容態憂慮[肖](뽐베이) |
1936-08-05 |
3/3 |
印度의 大哲人 「깐디」翁의 昨今 三間斗屋의 田夫生活[肖](본베이) |
1937-09-19 |
6/6 |
「깐디」翁 衰弱靜 養諸志士雲集憂慮(뽐베이)[內外短信] |
1938-05-07 |
3/8 |
印度「깐디」翁 自死期豫言 |
1938-11-06 |
4/7 |
훌륭한 분의 이야기 ; 인도의 「깐디」 속이 상하면 절식을 합니다[肖] |
1939-03-03 |
3/3 |
움지기는 印度 ; 「마하트마·깐디」翁의 主唱下에 「왈다」에 最近完成된 全印度農工博物館[寫] |
1940-02-27 |
3/4 |
人氣의 筆頭는 聖雄「깐디」 |
<간디 동아일보 게재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