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된 지 10일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 ‘조선인을 위한 조선인의 체육회’ 결성을 주창한 변봉현의 논설 ‘체육기관의 필요를 논함’(1920년 4월 10일자부터 12일자까지 3회 연재)은 4면 한 구석에 조그맣게 실렸지만 역시 선각자들의 집결체였던 동아일보다운, 시대를 앞서 간 기획기사였습니다.
‘대한체육회 70년사’(대한체육회, 1990년, 38~40쪽)는
“기나긴 전사기(前史期)가 폐막되고 여명의 장이 열린다. 국권을 잃은 뒤의 굴종과 저항의 세월이 어느덧 10년째가 되는 1920년, 한 가닥 뜻있는 이들이 ‘민족체육’의 한 곬으로 뜻을 모아 광야에 외치듯 조선체육회의 창립을 선언하고 나섰으니, 이는 곧 ‘광복’을 지향한 대도(大道)와도 상통하는 장거(壯擧)일뿐더러 후세의 이 겨레에게 긍지를 안겨주는 장한 출범으로 볼 수 있다.”고 ‘조선체육회’ 창립의 의미를 적고 있습니다.
‘대한체육회 70년사’는 이어
“갖은 탄압을 받으면서도 연면히 이 땅의 민족 언론으로서 소임을 다해온 양대지(兩大紙)의 공적에 대해서는 췌언을 요(要)치 않거니와 조선체육회의 창립 또한 이 가운데의 동아일보에 크게 힘입은 것이었으니…(중략)…조선체육회의 발기는 변봉현이 동아일보의 창간 때부터 활동하면서 표면화되었다.…(중략)…동아일보사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고 또 각계 유지들의 공명을 얻은바 되어…(중략)…드디어 그 해(1920년) 6월 16일 하오 6시, 서울 인사동 소재 명월관 지점에서 발기인대회를 열었으니 모인 인사는 47인이었다. 이 발기인대회에서는 창립준비위원으로 윤익현(尹翼鉉) 변봉현 원달호(元達鎬) 이동식(李東植) 김병태(金丙台) 이중국(李重國) 유문상(劉汶相) 이원용(李源容) 김동철 김규면(金圭冕) 등 10명을 선출하여 모든 준비작업을 위임하고…(중략)…발기인은 먼저 학교 교장이나 학교를 대표할만한 인사와 사회유지로 친일적 색채가 없는 사람, 그리고 운동경기를 애호하는 체육인 등으로 구별해서 전국적으로 그 인물을 구하였다. 이렇게 하여 96명의 발기인을 모았는데 그 중 사회인사의 태반은 동아일보 주필 장덕수 씨가 천거하였다.” 며 대한체육회의 전신인 ‘조선체육회’의 설립에 동아일보의 역할이 컸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체육협회 발기
16일 오후에
오십 명 유지가
근래에 여러 가지로 새로운 사업이 많이 일어나는 중 특별히 한 민족의 쇠하고 성함에 큰 관계가 있는 체육에 대하여는 아즉 현저한 운동이 없는 것은 매우 유감으로 여기든 바이더니 지난 16일 오후 6시에 이에 대하여 뜻있는 몇 분이 시내 명월관 지점에 모이어서 체육회를 발기하였다는데 우선 창립위원 10명을 선정하고 여러 가지 의견을 교환한 후 폐회하였다는데 당일 출석한 사람은 고원훈 이동식 장두현 씨 외의 47인이었더라.
1965년에 발간된 ‘대한체육회 70년사’ 별책 68쪽에 따르면 1920년 7월 13일 개최된 조선체육회 창립총회에서 장덕수(당시 동아일보 주간)가 발기인 대표로 자신이 작성한 ‘조선체육회 창립취지서’를 낭독했습니다.
조선체육회 창립총회
“조선체육회 창립총회는 먼저 발기인 총회로부터 시작하여 고원훈 사회 하에 회의를 진행, 장덕수가 발기인 대표로 취지서를 낭독, 이승우가 규약을 낭독하여 만장일치로 이를 통과시키고 뒤따라 창립총회에 들어갔다. 발기인이 많이 모였으나 준비위원들이 준비한대로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계속하여 장소를 명월관지점 별유천지(別有天地)로 옮겨 피로연을 베풀고 이 석상에서 전형위원들에 의한 체육회 첫 이사진이 선출되었고 다음날 이 이사진에 의하여 체육회 초대 회장으로 장두현이 선임되었던 것이다. 창립총회 석상에서 낭독된 취지서는 장덕수가 만들고 체육회 규약은 이원용 이중국이 작성하여 배재고보 교무주임으로 있는 이중국의 형 이중화의 교열을 받았던 것이다. 지금 체육회 창립취지서는 구할 길이 없고 그 며칠 후 즉 7월 16일자 동아일보 사설로 게재된 조선체육회 창립에 대한 논설내용이 지금 남아 있을 뿐인데 이 사설은 취지서를 쓴 장덕수가 집필한 것으로 조선체육회 창립정신을 이 사설에서 충분히 찾아볼 수 있어 그 사설 내용을 아래에 소개한다. 아래는 동아일보 1920년 7월 16일자 사설 내용 전재.”
동아일보의 창간사를 쓴 장덕수의 ‘조선체육회 창립취지서’ 역시 명문입니다.
변봉현과 함께 이 ‘조선체육회’ 창립준비위원이었던 김동철(金東轍)도 본사 창간 기자였습니다. 변봉현은 야구선수, 김동철은 축구선수 출신이었습니다.
동아보다 한 달 앞서 창간(1920년 3월 8일)된 조선일보에서 경제부장을 맡아보고 있던 김동철은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진학문 창간 당시 정치부장의 권유로 동아가 창간되기 사흘 전 입사, 취인소(取引所 · 증권거래소)를 맡아 동아일보 최초의 주식 담당 기자가 됐습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체육 분야에 있었습니다.
“나는 명색 경제부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경제보다 오히려 체육 관계에 더 열을 올려 체육기자로서의 활약이 더 적극적이었으며 지금도 체육기자로서의 생활이 더 생생하게 기억된다. 학교시절부터 거의 모든 운동에 손을 뻗쳐 당시 우리나라에 수입된 종목 쳐놓고 조금씩이나마 손대 보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특히 마라톤에 있어서는 학교에 있던 4년간 줄곧 전국 기록을 보지(保持)하고 있었으며 축구에 있어서도 경성 ‘베스트’의 ‘센터 포드’를 맡았고 정구도 전국대회 개인전에서 준결승에 올라간 정도의 실력은 갖고 있었다.” (김동철, ‘동우’ 1963년 10월호)
“나는 학교시절부터 체육인으로서는 건방질 정도의 긍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체육에 대한 열(熱)도 또한 이에 못지않게 대단했었다. 내가 마라톤에서 일등을 했을 때든가 당시 모 신문사의 기자로 있던 이상협 씨가 내 이름을 물은 적이 있다. 나는 내심 자존심이 깎인 듯한 불만한 마음을 품고 ‘당신이 기자십니까’고 반문, 기자라는 대답을 듣고는 ‘기자가 내 이름도 모르느냐’고 무례한 핀잔을 주었을 정도로 자기에 대한 자만이 대단했었다.” (위 글 중)
‘김동철 선수’의 이름을 몰랐던 기자, 이상협은 창간 편집국장으로, 학창시절 마라톤 선수 김동철은 평기자로 동아일보에서 다시 만나게 됐습니다.
“나는 동아에 있는 동안 우리나라의 체육진흥을 위하여 애쓸 수 있었던 것과 또 작으나마 공헌을 할 수 있었던 것을 내 일생동안의 보람으로 생각한다. 그때만 해도 아직 체육인을 그저 장난꾼으로만 알던 때였지만 나는 나대로 체육진흥을 무엇보다도 중요한 민족운동의 하나로 확신했고 이를 위해 헌신할 결의까지도 서 있었다. 그때 모든 민족운동이 다 그랬듯이 체육운동 역시 동아의 그늘 아래서 전개되어 갔다. 오늘날 이 나라 체육의 중심 기관이 되고 있는 대한체육회만 해도 동아의 사람들에 의하여 탄생을 보게 된 것이다.” (위 글 중)
그는 창간 당시를 “당시에 일간신문이 동아일보만은 아니었으나 거의 조선 이천만 민중의 의사를 대표할만한 것은 동아일보 뿐 이었다.”며 “당시 동아일보는 이 나라 뜻 품은 젊은이들의 선망의 적(的)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경신(庚申)년에 동아일보가 창간되었으나 그 간난(艱難)한 것은 이루 말하겠습니까, 경제상 곤란은 둘째요 격일하야 당하는 압수처분에는 기가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당시에 일간신문이 동아일보만은 아니었으나 거의 조선 이천만 민중의 의사를 대표할만한 것은 동아일보 뿐이었습니다. 이제 창간 당시를 회고할 때에 이와 같이 수난이 앞을 가리었음에도 불구하고 창간 당시의 주지를 일관하여 조선 사람의 신문임은 물론이요 세계적 대신문이 된 것을 기뻐합니다.” (‘창간호 박든 그 때 세월도 빠르다 – 창간 당시 정치부 기자로 있다가 지금은 철도국에서 일보는 김동철 씨의 술회담’, 동아일보 1930년 4월 1일자, 부록 5면)
“동아에서 내 젊음을 쏟던 적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내 나이 칠순을 넘고 같이 일하던 동료들도 이제 몇이 남지 않았다. 동아는 내가 가장 힘세고 꿈 많던 시절 정열을 불태우던 일터이자 또 나를 키워준 도장이기도 하다. 내 인생의 가장 절실한 희로애락과 꿈이 얽힌 곳, 나는 동아를 생각할 때마다 마치 오래전에 떠나온 나의 고향을 그리는 듯한 깊은 감회를 맛보지만 바뀌인 세대는 이제 김동철이 동아에 있었다는 사실조차 아는 이가 거의 없을 것이다. 벌써 마흔세 해 전, 동아보다 한 달 앞서 창간된 조선일보에서 소위 경제부장의 일을 맡아봤던 나는 얼마 안 있어 그 자리를 박차고 동아가 창간되기 바로 사흘 전에 동아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이 나라 뜻 품은 젊은이들의 선망의 적(的)이었다.” (김동철, ‘동우’ 1963년 10월호)
그는 “당대의 문필 양기탁 유근 선생을 비롯 김성수 장덕수 이상협 씨 등등 아마 한곳에 그 많은 인재들이 모이기란 전무후무 할 것이다. 나는 동아가 이 민족이 대망하던 유일한 민족대변지라는 점도 있었지만 언론생활을 열망하던 내가 평소에 존경해 마지않던 양기탁 유근 선생 등을 직접 모시고 배울 수 있다는 희망 때문에 지우(知友) 진학문 씨로부터 입사 교섭을 받았을 때 기쁜 마음으로 응낙하였다. 내가 동아에 있는 동안 일 자체에도 큰 보람을 느꼈지만 더욱이 그곳에서 뛰어난 동료들과 훌륭한 선배들을 사귈 수 있었던 것을 더없는 큰 보람으로 길이 간직하고 싶다.”며 그들의 면모와 일화를 기록으로 남겨 놓기도 했습니다.
“당대의 문장 양기탁 선생도 그저 별다른 풍채나 겉에 흐르는 재기(才氣)마저 없는 초라한 노인이었으며 고하 송진우 씨 같은 이도 후세인이 상상하는 바와 같이 어떤 영웅적 기질이나 또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그런 거창한 존재는 결코 아니었다. 고하 같은 이는 그가 노상 즐겨 피우는 담배의 이름과 그 값조차도 번번이 잊어버려 사환에게 심부름을 시킬 때마다 ‘그 이름이 무어다라’ ‘값이 얼마지’하는 식의 어처구니없는 건망증을 부리는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내 생각키에는 대체로 위인들의 위인 된 기질이란 일단 유사시 일에 부딪쳐서 발휘되는 것이지 평소의 일상생활에서 그 내음이 풍기는 것이 아니지 않나 여겨진다. 요즈음 흔히 위인인척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너무도 평범했던 옛 사람들을 생각하게 된다.”
“조선 신문에 경제면이 생기기는 동아일보가 창간된 후에도 얼마 지난 뒤 일이었고 그것도 그때는 동아일보가 4면 신문이었기 때문에 광고 관계로 전면 12단 중 6단 내외가 경제기사의 차지로 양으로 퍽 빈약하얏섯스며 시대일보가 창간되자 10단 이상의 경제면이 조선에 비로소 처음으로 독자 앞에 나오게 되었으며 이에 자극되어 동아, 조선 등도 경제면을 점차 확대하였었다.…(중략)…현재 각 사의 경제부원으로 보면 어느 사나 많아야 3인이오 그렇지 않으면 대개는 2인이다. 한사람은 내근하고 한사람은 각 은행, 회사, 취인소 등을 오전 중에 돌아다니다가 오후에 사에 들어와서 막음(마감)시간 안에 기사 쓰고 편집하느라고 두 사람이 애쓰는 것이 현황이다.…(하략)…” (이건필<李健赫 · 중외일보>, 철필<鐵筆>, 1930년 8월호, 35쪽)
위 이야기는 1930년의 상황이나 1920년 동아일보 창간 당시에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에는 경제 담당 기자가 2명이 있었는데 한 명은 김동철(金東轍), 또 한 명은 월봉 한기악(月峰 韓基岳) 이었습니다. 한기악 기자는 주로 은행을 출입했고 김동철 기자는 지금의 증권거래소에 해당하는 취인소(取引所)를 담당했습니다.
“나는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또 잠간이나마 인연으로 동아에 와서도 줄곧 경제부에 소속 취인소와 시중상황(市中商況)의 취재를 전담하게 되었다. 말이 경제부지 기자라고는 단 두 명, 당시는 경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아직 소홀했고 우리나라의 경제계 자체도 아직 미미했을 뿐 아니라 또 취재를 맡은 나 자신도 경제에 대한 소양이 극히 저급하여 기사다운 기사 하나 제대로 쓰지 못했지 않나 지금도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 때 모든 것이 다 그러했지만 취인소는 특히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어서 거기서 쓰는 모든 용어 전부가 다 우리말로 옮기기 어려운 왜식 용어였다. 마감시간에 뒤쫓기며 이것들을 우리말로 고쳐 쓰느라 진땀을 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김동철, ‘구우회고실(舊友回顧室)’ – 내가 있던 시절, 동우(東友) 1963년 10월호 10쪽)
당시 주식 기사는
‘초부(初付 · 처음) 후 부동(不動)으로 무폭(無幅)의 추이 계속되다가 결국 **등은 대인(大引 · 크게 상승)이었으나 일반 장세는 전과 다름없이 무활기(無活氣)였다.’는 식으로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