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200910066451012w1




 “언론 통폐합이 가져온 비극이라면 동아방송이 사라졌다는 데 있다. 1960년대 초 국내에서 아직 방송의 언론적 인식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세계적으로 드문 매우 언론적인 방송이었으며, 동아방송의 프로그램은 격조와 창의성이 넘쳐 있었다.”


  대표적인 원로 언론학자인 강현두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명예교수가 2001년 4월18일 가진 ‘체험적 한국 방송 40년’이라는 제목의 퇴임기념 강연 중 일부다.


  강 교수의 지적을 차치하고서라도, 많은 이들이 통폐합된 지 29년이 지난 동아방송을 기억하고 있다. 동아일보사도 TV 종합편성채널 사업을 준비하며 ‘동아방송의 가치를 21세기에 맞게 되살리겠다’는 포부를 천명한 바 있다.


  다시 방송을 시작하려는 우리에게 동아방송은 무엇을 시사하고 있는가? 2회에 걸쳐 동우지에 소개한다.




  4.19 혁명으로 정치, 언론에 대한 갈증이 터져 나오면서 새 방송사 인허가 요청이 잇따랐지만 당시 민주당 정부는 동아방송을 첫 번째로 승인했다,

  동아일보의 ‘보도 DNA’를 발전적으로 계승한 동아방송은 4.19 혁명의 역사적 정통성까지 이어받으면서 한국 방송 저널리즘을 ‘동아방송 이전과 이후로’로 구분하게 된다.




 ●‘최초의 방송언론’으로서 동아방송

  1963년 4월25일 오전5시반. “여기는 동아방송입니다. 동아의 첫 뉴스를 보내드리겠습니다”로 시작한 동아방송 뉴스는 개국하자마자 이전과는 다른 방송으로 청취자들을 사로잡았다.


  동아방송은 ‘아나운서가 읽는 뉴스’를 넘어 프로페셔널 기자들이 직접 취재하고 보도하는 본격적인 ‘방송 언론’이었다. 이는 다양한 특종과 스트레이트 뉴200910066451004w4스는 물론, 심층 분석에 기반한 뉴스쇼 등으로 이어졌다.


  동아방송은 개국 후부터 매일 15회 가량의 정시 뉴스를 내보냈다. 다른 방송사들이 개국 시점에 많아야 10회에 그친 것에 비하면 뉴스 비중을 대폭 늘린 것이었다.


  동아방송 이전까지 한국 방송뉴스는 해외 뉴스와 정부 발표를 전하는 관보적 성격에 그쳤지만, 동아방송은 신문 못지않은 특종 퍼레이드를 이어갔다.


  개국하던 그 해 10월 49명이 익사한 경기 여주군 조포나루터 나룻배 사건, 그 해 11월 이득주 중령 일가 몰살사건과 범인 체포 뉴스는 동아방송에서 가장 먼저 나왔다.


동아방송은 1967년 충남 청양군 구봉광산 낙반사고 당시 광산에서 8일 동안 갇혀있던 광부 양창선 씨 구출 작전을 방송사 중 유일하게 파이프를 통해 생생하게 전하기도 했다.




●본격적 앵커 개념 첫 도입

  동아방송은 특종 보도 외에 다양한 포맷의 뉴스 프로그램으로 심층 분석과 해설을 제공했다. 특히 단순히 뉴스를 읽는 것을 넘어 진행자가 주도적으로 프로그램을 이끌어가는 앵커 시스템을 도입해, 한국 방송사에 ‘퍼스낼리티 프로그램’을 정착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64년 봄 개편에 첫 선을 보인 ‘라디오 석간’은 그 날의 주요 뉴스 아이템들과 현장 녹음, 인터뷰 등을 남녀 캐스터의 더블 토크로 진행했다. ‘귀로 듣는 석간신문’을 표방한 이 프로그램은 한국 방송 사상 최초의 대형 뉴스쇼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라디오 석간’의 파괴력에 놀란 다른 방송사들은 유사 프로그램을 신설하기에 바빴다고 동아방송 국장을 지낸 최창봉 전 MBC 사장은 ‘나와 한국방송’이라는 연재물에서 회고했다.


  이와 함께 동아방송은 ‘DBS 리포트’ ‘라디오 기자실’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보도 기능의 폭과 깊이를 더해갔다. 뉴스 해설에서는 이동욱 전 동아일보 회장, 천관우 전 동아일보 주필 등 중량급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기도 했다.




●높아지는 청취율, 이어지는 권력의 탄압

  동아방송은 이 같은 방송으로 기성 방송의 청취율을 금새 따라잡았다. 당시 동아방송의 현실적인 가청 지역은 수도권과 충청 및 강원 일부였으나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은 그야말로 전국구였다.


  개국 직후인 1963년 당시 공보부 조사에서 18~19%대의 전국 청취율을 기록한 동아방송은 두 달 후인 그해 9월 연세대 조사에서 20%로 올라섰고, 1964년 공보부 조사에서는 33.5%로 껑충 뛰어 올랐다. KBS를 제외하고는 1위였다.




200910066450996w




  그러나 동아방송의 매서운 비판은 이내 정권에겐 눈엣가시였다.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앵무새 사건’으로 불리는 동아방송 간부 6명에 대한 투옥 사건. ‘앵무새’는 오후 9시55분부터 5분 간 방송되던 라디오 칼럼이었는데 학생들의 데모 등을 보도하면서 군사정권을 시원하게 비판했다.


그러던 중 1964년 6.3 사태로 잔뜩 예민해진 정권은 그해 6월4일 최창봉 방송부장, 고재언 뉴스실장, 이윤하 편성과장, 조동화 제작과장, 김영효 ‘앵무새’ 담당 PD 등 5명을 연행하고, 그 다음날에는 이종구 동아일보 외신부장을 자택에서 연행했다.


  방송 내용과 연관해 방송인들이 투옥된 최초의 사건으로 기록된 ‘앵무새 사건’ 관련자 6명은 이후 전원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 후 동아방송은 잇따라 정권의 탄압을 받으며 험로를 예고했다. 조동화 과장에 대한 심야 테러 등이 이어졌으며 1970년대에는 광고탄압으로 심야 방송이 중지되는 등 혹독한 고초를 겪게 된다.


  이와 관련해 강현두 교수는 2003년 4월24일자 동아일보에 기고한 ‘동아방송의 의의’라는 글에서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동아방송이 사라진 뒤 한국에서 ‘방송 언론’과 프로페셔널리즘의 입지가 좁아졌다. 방송은 정권과의 공생이 아닌 대립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동아방송 개국 40주년을 맞아 그 저널리즘 정신이 새삼 그리워진다.”

  







첨부파일

ecb7a8ec9eac-2eba9b4ed86b1-eb8f99ec9584ebb0a9ec86a1ec9d98-ec9eacebb09ceab2acec8381
Title : ecb7a8ec9eac-2eba9b4ed86b1-eb8f99ec9584ebb0a9ec86a1ec9d98-ec9eacebb09ceab2acec8381
Caption :
File name : ecb7a8ec9eac-2eba9b4ed86b1-eb8f99ec9584ebb0a9ec86a1ec9d98-ec9eacebb09ceab2acec8381.hwp
Size : 10 KB

댓글 없음 »

No comments yet.

RSS feed for comments on this post. TrackBack URL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