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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 21 : 1936년 8월, 일장기를 지우다

Posted by 신이 On 8월 - 24 -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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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1936년 8월 25일자 석간 2면에는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해 월계관을 쓰고 시상대에 오른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감격적인 사진이 실렸습니다.  8월 26일부터 시작하는 ‘대망의 올림픽 영화 – 조선 남아의 의기’ 상영을 알리기 위해서 였습니다.  


  손 선수의 우승 소식이 전해진 그 날인 8월 11일자 1면 전체를 털어 ‘세계 제패의 개가’ 기사와 사설 ‘세계 제패의 조선 마라손’을 게재함으로써 조선 민족의 우수성을 일깨워 독립에 대한 희망을 은연 중에 고취시키고 13일자 사설 ‘청년들아 일어나자’를 통해 다시 한번 온 민족의 가슴을 피 끓게 했던 동아일보가 이날은 시상대에 오른 손 선수 사진 가슴 한복판의 일장기를 지워버렸습니다. 




  “우리의 손기정은 이겼다. 우리의 젊은 손기정은 마라톤 세계에 빛나는 승리를 얻었다. 손기정은…잠 깬 조선의 새 힘을 안고 마라톤 세계의 제1주자가 되어준 것이다. 스포츠의 승리자 손기정은 스포츠 이상의 승리자인 것을 기억하자. 우리가 이 기쁨을 더 기뻐함도 이 까닭이요, 이 감격에 더 감격함도 이 때문인 것이다.…조선의 아들인 손, 남 양군은 물론 세계에 자랑할 만한 철각도 가졌거니와 세계를 제패할 더욱 굳은 의지를 가진 것이라 양군의 우승은 곧 조선의 우승이요, 양군의 제패는 곧 조선의 제패다.…조선은 너무나 오랫동안 숨어 지내왔다. 또 너무나 오랫동안 기운 없이 살아왔다.…이제 손, 남 양용사의 세계적 우승은 시드는 조선의 자는 피를 끓게 하였고 깔아진 조선의 맥박을 뛰게 하였다. 그리하여 한번 일어서면 세계도 손 안의 것이라는 신념과 기백을 가지도록 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우승은 밖으로는 자랑이며 뽐냄이며 안으론 격려이고 교훈이니 이 우승를 가져다준 손, 남 양군에게 우리는 무엇으로 갚아야 될 것인가.…” (사설  ‘세계 제패의 조선 마라톤’ , 동아일보 1936년 8월 11일자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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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36년 8월 11일자 1면



  


최인진 사진연구가(전 동아일보 사진부장)은  ‘손기정 · 남승룡 가슴의 일장기를 지우다’ (신구문화사, 2006, 94~104쪽)에서 일장기를 말소한 사진은 오사카아사히(大阪朝日)신문 발행 주간지 아사히스포츠에 실린 것이 출처라고 기록되어 있으나(일제 조사보고서, 동아일보 사사 1권, ‘ 인촌 김성수전’ 등) 오랜 추적 조사 끝에 8월 23일자 오사카아사히신문 남선(南鮮)판과 조선 서북(西北)판 5면에 실린 사진이 그 출처임을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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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8월 23일자 '大阪朝日 朝鮮 西北版'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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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장기를 말소한 동아일보 1936년 8월 25일자 2판 2면



 일제 총독부는 이날짜 동아일보를 압수하고 나흘 뒤인 8월 29일자로 무기정간 처분을 내렸습니다.


  “소화11년 8월 독일 수도 베를린에서 거행된 세계 올림픽 마라톤 경쟁에 손기정(孫基禎)이 우승하자 언문 각 신문은 광희난무(狂憙亂舞)하고 그 사실을 가지고 ‘우리들의 승리’라고 보도했다.


  민중은 이에 자극을 받아 민족 의식이 갑자기 대두하고 혹은 조선인 만에 의한 우승 기념 체육관의 설립을 계획하고 혹은 손기정의 장학 자금을 부담하고 혹은 또 그에게 금품을 수여하려는 자가 속출하여 신문지는 다시 이를 기특한 행위라 하여 특필 대서 하는 등 열광적 태도를 나타내기에 이르렀다.


  애초에 손기정은 제국의 선수로 출장한 것으로 그의 우승은 내선인이 같이 축복해야 할 사실이다. 따라서 내선인의 대립은 결코 허용될 것이 아니다. 다만 감정상 어느 정도 이해될 여지가 있다고 인정해 간행물의 검열에 있어서도 내선융화를 저해할 특수 사정이 없는 한 관용의 태도를 취했다.


  전기(前記) ‘우리들의 승리’ 운운과 같은 문언(文言)의 류(類)는 이를 불문에 부쳤다. 동아일보는 소화11년(1936) 8월 11일자 사설에 ‘손, 남 양 용사의 세계적 우승은 조선의 피를 끓게 하고 조선의 맥박을 뛰게 했다. 그리고 한번 일어서면 세계도 손안에 있다는 신념과 기개를 갖게 했다’고 게재했다. 이것은 분명히 민족의식을 앙양시키려는 것이라 판단된다 할지라도 아직 노골적으로 제국을 이겨서 독립의 소지(素地)를 달성할 수 있다고 강조한 것으로는 사료되기 어려우므로 특히 계고(戒告)를 가하고 불문에 부쳤다.


  사정이 그런데도 점점 조선 민중이 손기정의 우승을 가지고 마치 조선이 일본을 이겼고, 이것(손기정의 우승)이 조선 독립의 초석이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으므로 이의 단속 대책을 신중히 고려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동사(同社)는 소화11년 8월 25일자 지상에 위 손기정의 사진을 게재했으나 그 흉부에 봉부(縫附)한 유니폼의 일장기 마크를 고의로 말살한 의심이 농후하므로 그 발매 반포를 금지함과 동시에 그 실정을 조사해보니 그 사진은 8월 23일자 오사카아사히(大阪朝日)신문에 게재된 것으로 전기(前記) 제국 국기가 지면에 나타나는 것을 피하려고 여러 손기술로 공들여 이를 말살한 사실이 판명되었다.


  원래 동아일보는 창간 이래 정간 처분을 받은 것이 이미 3회이고, 그 정간 해제 때마다 지면의 개선을 서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비국민적 거조(擧措 · 행동거지)로 나온 것은 실로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사안이 실로 중대하므로 그 조치에 대해서는 단순히 당해 신문지의 발매 반포 금지 압수 처분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단호히 발행을 정지하고 그 반성을 촉구함과 동시에 일반 언문 신문사에 경고로 삼고 자칫하면 민족적 감정으로 치달아 조선 통치에 호감을 갖지 못하게 하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나라 국기 국장(章)에 대하여 존경의 적성(赤誠 · 참된 마음에서 나오는 정성)을 다하지 않는 몽매(朦昧)한 도배의 포회(抱懷  ·마음 속에 품은)한 류상(謬想 · 잘못된 생각)을 소멸(掃滅)시키는 계기로 삼으려 마침내 소화11년 8월 27일 발행 정지 처분을 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 ‘극비-조선출판경찰개요’, 1936년, 112~114쪽)   




 장용서(張龍瑞) 당시 사회면 편집자는 ‘일장기말소사건의 후문’(동우, 1966년 8월호 10~11쪽)에서 “그 이유야 말할 나위도 없이 민족 감정의 발로로, 당당한 대한의 아들을 남의 민족의 대표로 내세우기가 원통하고 억울해서 현실은 그렇지 않지만 마음으로의 표현은 참아 그대로 할 수 없어 지워버린 것이다. 이것은 편집자나 운동부 기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3천만이 똑같이 간직하고 있는 민족혼의 지상명령이었던 것이다. 그때 우리 처지는? 일제가 국련(國聯)에서 탈퇴하고 만주에 괴뢰 제국을 세워놓고, 중국 본토를 유린 침략할 야망으로 우리나라를 그 발판으로 만들기 위하여 우리 민족정신을 영영 말살하려고 천인공노의 방약무인한 행동을 함부로 하였고, 이에 따라 우리 민족은 아무 저항도 못하고 나날이 그들의 혹편(酷鞭)에 몰려 일인화(日人化)의 구렁으로 쏠려만 들어갔다. 이런 판에 본보가 용감하게 일국기(日國旗)를 지웠으니 그 ‘센세이션’은 참으로 컸었다.”며


 “총독부 도서관 검열관도 그저 관심 않고 통과시켰던 것인데, 당시 경성부 협의원-후방공단장인 조병상(曺秉相)이란 친일파가 발견하고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에 가서 ‘왜 저런 불온한 신문을 발행하게 놔두느냐’고 항의했다는 것이다. 그때의 친일파란 거개 이런 심보를 가지고 있었다.”고 술회했습니다.



  일제는 일장기 말소를 처음 제안한 운동부 기자 이길용(李吉用), 사회면 편집자 장용서(張龍瑞), 조사부 전속화가 이상범(李象範 · 화가), 사진과장 신낙균(申樂均), 사진부원 백운선(白雲善) 서영호(徐永浩), 사회부장 현진건(玄鎭健), 잡지부장 최승만(崔承萬) 등 8명을 종로경찰서에 구금, 40일 동안 취조(取調)를 계속했습니다.


 혹독한 고문 끝에  일제 경찰은  ‘일장기 말소 사진 게재 경위’를 아래와 같이 밝혀 냈다고 보고했습니다.


  “운동부 기자 이길용은 8월 23일 오후 5시경 동아일보사가 같은 달 25, 26, 27, 3일 동안 경성 부민관에서 독자 우대를 위한 올림픽 활동사진을 상연한다는 계획 발표 기사를 게재하고 그 다음으로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의 사진을 게재하기로 하고 8월 23일자 오사카아사히신문에 실린 손기정의 사진을 오려내어 조사부원 이상범에게 손 선수의 사진을 24일 석간에 게재할 예정이니 ‘그 가슴에 표출된 일장기를 보이지 않게 수정해 달라.’고 부탁하자 이상범은 이를 승낙하여 오사카아사히신문에서 오려낸 원화에 착색한 다음 이를 사진과장 신낙균의 책상위에 제출했음.


  그런데 편집국 사회부 기자 장용서가 24일 오후 2시반경 사진부실로 들어와 사진과장 신낙균, 사진부원 서영호에게 이상범이 보이지 않게 한 것만으로는 아직 일장기가 남아 있으니 충분하게 이를 말소할 것을 잊지 말라고 다짐하고 그 방을 나왔음. 서영호는 이를 승낙하고 동판에 나타난 손 선수의 사진에서 가슴에 표출된 일장기 부분에 청산가리 농액을 사용(증거품 영치했음)하여 이를 말소하고 인쇄부에 넘겨 이것이 그 석간에 게재된 것임.” (일장기 말소 사건의 수사주체인 경기도 경찰부장이 1936년 8월 27일 총독부 경무국장 및 경성지방법원 검사정 앞으로 보낸 비밀 정보보고 문서인  경고검비<京高檢秘> 제1929호)


 

  8월 29일의 같은 보고서는 ‘일장기를 말소하게 된 동기’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길용, 장용서, 서영호 등의 진술에 의하면 우리 동아일보는 조선 민중을 대상으로 창간하여 오늘에 이른 것으로 조선 민족의 의사에 반하는 기사 편집은 이를 삼가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일장기를 그 사진에 표출하는 것은 조선 민중인 독자가 환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 사내에도 이러한 분위기가 있는 것을 헤아려 알고 이와 같은 일을 했다는 것임. 또한 이번 올림픽대회에서 손기정이 세계 기록을 깨고 우승한 사실에 대해 그들은 손기정이 조선인임에도 불구하고 조선 민족의 대표자로서 올림픽에 출장하여 우승했다고 세계에 발표하지 못하고 일본이 우승했다고 발표할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 우리 조선인으로서는 매우 개탄을 금하기 어려운 일로서 우리 사에서도 대다수의 사원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진술했음.” (경고검비<京高檢秘> 제2344호)  




  이 사건으로 이길용, 이상범, 신낙균, 백운선, 서영호 뿐 아니라 송진우(宋鎭禹) 사장, 장덕수(張德秀) 부사장, 김준연(金俊淵) 주필, 설의식(薛義植) 편집국장, 현진건(玄鎭健) 사회부장, 이여성(李如星) 조사부장, 박찬희(朴瓚熙) 지방부장, 최승만(崔承萬) 잡지부장등 13명이 일제의 강압으로 회사를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동아일보는 이듬해 6월 1일, 279일이라는 최장기 정간 끝에 다시 발행하게 됐으나 함께 무기정간 처분을 받은 자매지 신동아, 신가정은 일제 치하에서 다시 발행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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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용 기자







                                                                                                                                                       동아일보의 일장기말소 사건을 언급하고 있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홈페이지의 손기정 선수 소개란(www.olympic.org/kitei-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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