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석 유광렬(種石 柳光烈, 1898~1981, 재직기간 1920. 4.1~1924.12.1) 선생도 동아일보 창간 당시 사회부 기자였습니다.
1919년 매일신보에 입사했으나 교정 일만 시키는 것이 싫어 한달도 채 안돼 그만두고 만주일보 외근 기자로 갔다 1920년 2월 창간 준비가 한창이던 동아일보에 입사한 그가 처음 한 일은 창간호 축사를 받으러 다니는 일이었습니다.
“기자들이 대부분 대학, 전문학교, 적어도 중학교는 나왔는데 소학교에도 전혀 다니지 아니한 것은 나뿐인 듯 하여 다소 열등감이 있었으나 나는 그럴수록 정열을 기울이어 일해 보려 하였다. 동료 김동성은 중국으로 특파되어 중국의 혁명가 및 정객의 축사를 얻어오게 되고 염상섭은 일본의 정치가나 학자의 글을 얻어왔다.” (유광렬, ‘기자반세기’, 서문당, 1969, 129쪽)
유광렬은 ‘소학교도 시원히 못 나오고’ ‘자작(自作) 자습(自習)’으로 깨우친 무학(無學)의 문사(文士)였습니다.
영어도 ‘사전을 뜯어 먹어가며’ 독학으로 공부, 타계(83세) 직전까지 ‘타임’이나 ‘뉴스위크’를 봤다는 유광렬을 창간 동료 기자 김동성은 ‘배우지 않아도 재주를 타고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의학으로 말하면 같은 4년을 배우고 같이 졸업을 하고 나왔지만 파리 날리는 의사가 있는가 하면 눈코 뜰 사이가 없는 의사가 있지 않아요. 의사도 천성으로 의사가 될 사람이 되어야지 억지로 만들 수 없습니다. 또한 문사(文士)도 그렇습니다. 글을 배운다고 해서 다 잘 쓰는 것이 아니에요. 유광렬 씨 같은 분은 배우지 않아도 재주를 타고난 사람이에요. 그런 분들이 모인 곳이 동아일보고… 말하자면 13도에서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유지(有志)들이 자연히 모이게 된 것이지요.” (김동성, 동아일보 1960년 4월 1일자 4, 5면 ‘내가 겪은 대로, 본대로, 들은 대로, 본보 창간 당시를 말하는 좌담회)
26세의 주간 장덕수가 창간사를 쓴 뒤 22세의 유광렬에게 일독(一讀)해 줄 것을 부탁할 정도로 그는 한학에 조예가 깊었고 유광렬도 한 군데를 지적해 준 것 외 손댈 곳이 없는 장덕수의 뛰어난 한학 실력과 탁월한 문체에 놀랐다고 합니다. <이경남(李敬南) ‘설산 장덕수’의 저자, 다큐멘터리 작가 증언>
“창간 당시에 나는 연소하였으나 동아일보가 이천만 민중의 절대한 성원으로 탄생되었으니만치 당시의 기세야말로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각 방면의 지사(志士)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게 되니 한 개의 언론기관이라는 것보다는 차라리 다른 어떠한 절대 기관이라는 것이 타당하다 할 것이외다. 말하자면 철두철미 민중의 대변자로 자타가 공인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은 나뿐이 아니라 전 사원들이 항상 긴장하고 또 감격한 가운데서 힘을 다해 해가 지고 날이 밝도록 일하였습니다. 내가 제일 처음 외근을 나가기는 재판소였는데, 당시의 악법이던 태형(笞刑) 폐지론을 가지고 향진(鄕津) 사장과 격론도 하였었습니다. 그리고 온갖 곤란이 있어도 해내려고 한 문제에 대하여 기어이 해내리라는 기세는 꺾이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창간호 박든 그때 세월도 빠르다 – 전사원(前社員) 술회담’, 동아일보 1930년 4월 1일자 부록 5면>
이후 그는 특종을 자주 터뜨려 사회부 기자로서 성가(聲價)를 높였습니다. 3·1운동 48인 공판 때에는 오전에는 편집국장 이상협이 공판기사를 쓰고 오후는 유광렬이 담당하였습니다.
“그 당시 내가 외근하던 곳은 몇몇 경찰서와 재판소였다. 조간이 없고 석간 4면 밖에 없던 그때로는 비교적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독신으로 여관에 있던 나는 저녁 먹은 후에는 부지런히 내가 맡은 경찰서 관내의 파출소를 순회하면서 노트를 만들었다.…또 경찰서 내 하찮은 서류에서 흘겨본 글자에서 날카로운 추리로 다른 신문사 기자가 못쓰는 ‘스쿱’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내가 기자로서 사내에서 인정을 받기는 48인 공판기사를 써서 당시 편집국장의 기사 쓰는 솜씨와 겨루게 되고부터였다. 실상 이 48인 공판 기사는 다른 사의 기사보다 또는 편집국장보다도 내가 특색이 있는 기사를 쓰게 된 것은 (토지조사국에서 같이 근무했던) 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 · 아동문학가 · 손병희 선생의 사위)과의 교우관계로 항상 손병희 선생 댁을 출입하여 (3·1운동 준비과정에 대한) 예비지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광렬, ‘기자반세기’, 서문당, 1969, 144~145쪽)
1921년 9월 12일 백주에 총독부에 폭탄을 던지고 1922년 3월 28일 상해 부두에서 다나카(田中) 대장을 저격한 김익상(金益相) 의사 사건 기사도 유광렬의 특종이었습니다.
“3월에 철혈단원 김익상은 일본 군벌의 거두인 다나카(田中)를 저격하였으나 다나카는 맞지 아니하고 미국 부인 스나이더 여사가 맞아 죽었다. 이때에 일본 경찰은 작년 9월에 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어느날 일본 경찰이 수배한 문서를 흘끗 노려보고 그것이 서울 마포 공덕리 김익상임을 알았다. 곧 공덕리로 가서 김익상의 소년시대부터 해외에 나가기까지의 이력과 그의 성격을 자세히 기록하여 거의 사회면 전면을 뒤덮었다. 이날에 서울서 발행한 신문으로 우리말이나 일본어 신문에는 한줄도 내지 못하여 스쿱이 되고 말았다. 그때에 20여 세이던 나로는 이러한 스쿱으로 신문의 한 면 전부를 뒤덮어서 수만 독자를 경도(驚倒)하게 한 일을 한 개의 자랑으로 여기던 것이 회상된다.” (유광렬, ‘기자반세기’, 서문당, 1969, 168쪽)
독립운동의 일환일 뿐 아니라 유광렬의 특종으로 시작된 사건이라 동아일보는 끈질기게 김익상사건을 추적 보도해 타 신문을 압도했습니다.
“김익상은 상해에서 일본영사 경찰에 잡히어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가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사(社)에서는 나를 나가사키에 특파하여 공판 방청기를 쓰게 하였다. 공판은 몇번 연기가 되었으므로 나는 거의 2주일이나 그곳에서 묵고 있었다. 쌀 한가마에 6, 7원으로 물가가 싸던 그때에 나는 7백여원의 여비를 받아가지고 갔으니 사로서는 입사 이래 계속하여 많은 스쿱을 뽑는 데 대한 상여도 겸하여 상당히 후대하는 여비였다. 나는 김익상의 자필사인을 얻기 위하여 일본말이나마 성경을 들여보내고 그 자필 영수증을 받아서 자필사인이라고 본사에 보내는 위트를 보이던 것도 회상된다. 공판기는 장문의 신문 전보로 역시 그날 사회면의 전면을 뒤덮던 생각이 난다.” (유광렬, ‘기자반세기’, 서문당, 1969, 168쪽)
공개(公開)된 폭탄사건(爆彈事件)의 진상(眞相)
김익상(金益相) 제1회 공판 상보(公判 詳報)
작년 9월 12일 백주에 총독부에 폭탄을 던지고 금년 3월28일에 상해 부두에서 다나카(田中)대장을 저격한 김익상의 공판이 지난달 30일에 나가사키(長崎)에서 열렸는데 김은 거침없이 당당하게 진술, “나에게 최대로 이익되는 점은 ‘조선 독립’이다.”라고 외쳤다.
그가 동아일보에 재직하면서 재판소를 출입할 때의 일입니다.
윤덕영(尹德榮 · 순종 왕비의 백부) 자작이 돈과 뇌물을 받아먹고 사람들에게 분참봉(分參奉 · 국상 때 장례식을 주관하는 임시직 관리) 벼슬을 시켜주었다는 풍문이 떠돌면서 윤 씨에 대한 이야기가 각 신문에 났습니다. 그러나 소리만 요란할 뿐 실체가 없었습니다.
그 때 이상협 편집국장이 그를 불러
“이만큼 썼으니 이제 윤 자작이 불려나오는 기사는 빠뜨리지 말아야지….”
소위 ‘낙종’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그 후 유광렬은 날마다 검사국에 나가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어느 날 오후, 검사국 서기가 전화를 받으면서 “네- 네- 내일 오전 열시쯤 오시게 하지요. 보교(步轎)를 타고 오세요? 네-네- 상관없습니다. 인력거로 오시더래도 관계치 않지요.”라고 통화하는 걸 들었습니다. 유광렬은 직감적으로 윤 씨의 소환을 확신하고 사진기자 야마하나와 함께 재판소 입구를 지켰습니다.
열시쯤 되자 휘장으로 잔뜩 가린 인력거 하나가 쏜살같이 들어오더니 휘장을 벗기고 윤 씨가 쑥 나왔습니다. 야마하나는 황망히 카메라 렌즈를 맞추었으나 급히 복도로 들어가는 윤 씨의 모습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2층으로 올라간 윤 씨는 응접실에서 약 1시간 동안 취조를 받고 다시 나왔습니다. 야마하나는 바싹 문간에 다가서서 서둘러 사라지려는 윤 씨를 전광석화처럼 찍었습니다. 그날 석간에 천신만고 끝에 찍은 사진을 3단에 걸쳐 내고 대서특필 하였습니다.
“몹시 벼르던 일을 이룬 것인 만큼 매우 통쾌하였다. 그 익일 조선 내의 각 신문이 다투어 전재하고 일본 내지 각 신문이 또 전재하고 다시 영자신문에까지 전재될 때에 모든 통신사와 모든 신문에 그 최초 재료를 제공하였다. 나의 신문기자 생활 중 가장 통쾌한 일 중 하나였다.” (유광렬, ‘신문기자로의 통쾌’, 별건곤 1928년 8월호, 45~46쪽)
동아일보 1921년 5월 25일자 3면
윤덕영자(尹德榮子)가 검사국(檢事局)에
분참봉(分參奉) 문제(問題)로 주목(注目)의 초점(焦點)된 의문(疑問)의 거두(巨頭)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의 호출을 받고 황망히 미행으로 출두한 윤덕영 씨는
천서(川西) 검사에게 한시간이나 심문받았다.(사진 : 심문을 받던 윤덕영 씨)
유광렬은 1923년 상해특파원으로 1년을 근무한 뒤 1924년 사회부장이 됐고 그 해 10월 이상협을 따라 조선일보로 옮겼습니다. 1919년 9월 2일 오후 4시 경성 역에서의 강우규(姜宇奎)의사 폭탄투척사건을 현장에서 지켜본 유광렬은 동아-조선-시대-조선일보에서 네 차례나 사회부장을 지냈고 말년에는 한국일보 사빈(社賓)으로 언론 일선에 있었습니다.
그가 남긴 ‘기자반세기(記者半世紀)’는 일제시대 동아, 조선 등 민간 언론계의 수많은 비화들을 생생히 기록해 놓아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그가 남긴 또 다른 일화 중 하나.
“제가 해방 후 한때 신익희 국회의장 비서실장으로 있었어요. 언젠가 인촌 선생이 신익희 선생하고 여러 가지 얘기를 하고 인사를 하고 나가더군요. 그런데 얼마 있다가 다시 돌아오셨어요. ‘내가 아까 와서 얘기를 하고 나갈 때 신익희에게는 잘 있으라는 얘기를 하고 인사를 했는데 그대에게는 인사 잘못한 것 같아 도로 왔다.’고 하십디다. 내가 ‘무슨 말입니까. 저에게 인사를 안했다고 이렇게 오실 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인사를 하고 가셨거나 안 하고 가셨거나 관계 없습니다.’고 했더니 ‘어찌 신익희에게는 인사를 하고 유광렬에게는 인사를 안 하고 가라는 법이 있느냐. 그렇게 해 가지고는 민주주의고 무엇이고 창달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자꾸 인사를 받으라고 해요. 그 분의 겸손함을 나타내는 아주 좋은 예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