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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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여명의 창간 동인(同人) 중 일본인은 야마하나(山塙芳潔·1890~1935, 재직기간 1920.4~1924.9) 사진기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인 사진 기술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상협 편집국장이 경성일보에서 스카우트한 야마하나(山塙)에게는 편집국장과 같은 100원의 월급을 지급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1920년 창간된 3개 민간신문(동아, 조선, 시사신문) 중 동아일보에만 유일하게 사진기자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는 움직이는 신문, 살아있는 신문을 만들고자 했던  동아일보의 언론선각자 동인(同人)들의 앞선 생각 덕분이었습니다.




   “독자는 당일 있은 일이 그날 저녁 신문에 나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하시겠으나 보통 사진관에서 사진을 박으면 기한이 일주일씩 되는 것과 달라서 우리 동아일보사의 지금 설비한 것으로 말하면 사진을 박아다가 동판을 만들어내기까지 두 시간 반이면 넉넉하다. 그러나 이것은 금전과 노력을 아끼지 아니하는 일이니까 그러하지 영업으로 하자면 도저히 되지 못할 일이다.” <‘동아일보 여하(如何)히 제작되는가’, 1921년 4월 1일자 5면>




  동아일보의 사진기자가 된 야마하나의 첫 작품은 1920년 4월 2일자 7면 ‘우리 동아일보사에서 일하는 이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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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고(山塙) 씨는 그 두드러진 항일의 분위기 속에서도 구애됨이 없이 오직 좋은 사진만을 위해 동분서주했으며 조금도 일인(日人)이라는 오만한 티를 보이지 않았다. 일인 행세를 하려는 몰지각한 동포들이 허다한 시절에 산고(山塙) 씨는 한복까지 차리고 다니며 한인 행세를 하면서 오직 직장에만 충실하려고 애썼다.”<고희동(高羲東), 동우(東友) 1963년 7월호>




   “그 당시 사건에 따라 ‘불령(不逞)’이라는 두 글자가 풋득풋득 신문지상에 보였었다. 이것들을 따다가 소위 ‘불령선인(不逞鮮人)’이란 말의 반어(反語)로 ‘불령일인(不逞日人)’이라는 별명을 지어 일본 사람들 사이에 나를 놀리는 일이 많이 있었다.” <야마하나, ‘신문 사진반으로서의 회고담’, 철필(鐵筆) 1930년 8월호>




  야마하나는 동아일보에 있을 때 백두산 탐험대에 동행(同行), 신문에서는 최초로 백두산 일대의 사진을 촬영해 지상에 게재했습니다.




  ‘천고(千古)의 신비경(神秘鏡)인 천지(天池)의 전경(全境)’   ‘본사 특파 사진반의 고심 촬영한 사진’ 이란 설명과 함께 1921년 8월 29일자 3면에 실린 백두산 천지 모습은 당시 독자들에게 큰 감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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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간 이후 첫 사업으로 단군영정(檀君影幀) 현상모집(1920.4.11)을 한데 이어 백두산 천지  탐방에 나선 것은 조선 민족 역사의 발원지를 집중 조명함으로써 민족의식을 일깨우려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아민족(我民族)의 발상지(發祥地)! 신화(神話) 전설(傳設)의 백두산(白頭山)에


   본사 특파원과 사진반은 금일 상오 십시 남문 출발




  “조선 민족의 시조 단군이 탄강하고 조선 안에서는 제일 높은 산으로 산머리에는 사시(四時)를 두고 눈이 녹지 아니하는 백두산은 실로 조선 민족의 옛 역사의 발원지이요 일시 동아(東亞)의 천지에서 위엄을 떨치던 배달사람의 신비를 감추고 있는 산이라 금년 하기에 함경남도청에서 백두산 탐험대를 조직하매 본사에서는 다년 신문기자에 종사하던 민태원(閔泰瑗) 씨와 사진반 산고방결(山塙芳潔) 양씨를 파견하여 서늘한 사진과 신비하고 재미있는 전설로 더위에 괴로워하는 독자를 위로코저 하는 바 양씨는 금일 오전 열시 이십분 차로 함흥을 향하여 떠나서 함흥서부터는 자동차로 혜산진(惠山鎭)까지 간 후 장쾌한 도보 탐험을 개시할 터이라 기사와 사진이 독자에게 어떠한 감흥을 줄 것은 독자의 판단에 맡기고 오직 정성을 다할 뿐이라 사천여년의 역사를 가진 조선 시조를 내인 이 산은 과연 본사 특파원의 손을 거치어 무엇을 나타내려는가.” (동아일보 1921년 8월 6일 3면)




  1921년 8월 8일 함흥을 출발한 탐험대는 북청 혜산진을 거쳐 8월 16일 백두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상오 11시에 산꼭대기에 도착하매 ‘천지(天池)’의 물빛이 쪽보다도 더욱 푸르고 거울보다도 더욱 고요하여 창공에 배회하는 백운(白雲)의 그림자와 전후좌우에 삼엄하게 버텨선 고봉준령(高峰峻嶺)의 머리가 그 속에 비치어 그 아름다운 경치는 그릴 수가 없으며 그 장엄한 풍경은 오직 감격을 일으킬 뿐이었다.” (동아일보 1921년 8월 21일자 3면)




  이들의 취재는 ‘백두산행(白頭山行)’이라는 기행문과 ‘백두산(白頭山) 탐승(探勝·경치 좋은 곳을 찾아다님) 화보(畵報)’로 8월 21일자부터 9월 8일자까지 18회 연재됐습니다.




  이와함께 8월 27일 열린 ‘백두산 강연회’는 대성황을 거두었습니다.




  “조선 민족에게 무한한 감흥을 일으키는 강연회라 정각 전부터 물밀 듯 몰려오는 군중이 뒤를 이어 순식간에 회장 안은 정결한 흰옷 입은 사람으로 만원이 되고 장내에 들어오지 못하는 수천의 군중은 닫은 문밖에 몰려서서 돌아가지 아니함으로 그 혼잡은 실로 형언할 수 없었다. … 20여 장의 환등으로 백두산의 장쾌한 실경을 구경시키다가 끝으로 천지의 전경이 나오매 관중 편에서 박수가 퍼부어 일어났었다.” (동아일보 1921년 8월 29일자 3면)




  백두산 천지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준 충격은 컸습니다.




  “그때는 ‘쇠사진’을 만드는 사람으로 통했고 인기가 대단했다. 동아의 첫 사진기자로는 산고방결이라는 일본사람이 있었다. 항일투쟁의 선봉에 선 동아가 일본사람을 기자로 썼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지만 그 당시의 간부들이 또한 비상한 머리를 써서 일본사람을 이용했다는 사실은 이 산고씨가 그 치열한 항일의 분위기속에서도 조금도 일인이라는 티를 보이지 않고 한복까지 차려입고 한인이상으로 동아에 충실함으로써 입증이 되었다. 나의 동아입사는 창간 후 3년이 지난 1923년 8월로서 그 뒤 약 18개년 동안 근무했다. 당시 산고씨, 한우식 씨 이렇게 세 사람이 사진부 전체 ‘멤버’였고 일선취재와 암실작업 그리고 제판 일을 겸했으니까 말하자면 북치고 장구치고 꽹가리를 한꺼번에 쳤다고 할까.


  취재용 기재로는 지금도 ‘파고다’ 공원 같은 데에서 볼 수 있는 삼각이 달린 영업용 사진기 한대와 또 ‘앙고’라고 하는 휴대용사진기가 한대 있었을 뿐이고 모두가 유리 원판을 사용했다. 그리고 야간촬영은 ‘마그네슘’가루를 들고 다니며 ‘펑’하고 마치 폭탄 터뜨리듯 소리를 내가며 찍었으니 요란했을 뿐 아니라 눈썹과 머리카락을 그슬리는 등 화상을 입기 일쑤였다.


 그 당시는 대부분의 ‘뉴스’원이 폐쇄되고 있어 더구나 사진취재는 전부가 금지되다시피 되어 곤란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두루마기’속에 ‘앙고’라는 큰 사진기를 감추어 가지고 일본놈 경찰들의 눈을 피해가면서 사진을 찍었고 그러다가도 발각이 되면 찍지 않은 딴 원판을 슬쩍 바꿔치기를 해서 내주는 게 습관이 돼있었다.


 그때는 한달 월급이 65원이었고 5원짜리 한 장으로 그때 일류 요정 명월관에서 팔선녀를 거느리고 한잔 제키고도 돈이 남았고 또 일반사람들이 모두 깎듯이 대접도 해주었으니 사는 보람이 있었다.” <문치장(文致暲·1923년 당시 사진기자)의 회고, 동아일보 1965년 4월 1일자 11면>




  야마하나는 동아일보에 이어 조선일보, 중외일보 등에서 활동하다 1935년, 46세의 아까운 나이에 별세했습니다. 


  


동아일보 1935년 8월 27일자 석간 2면 야마하나 부음기사




  그는 각 신문사의 사진부를 개설하면서 많은 사진들을 남겼지만 정작 그의 모습이 담긴 사진은 찾을 수 없는  ‘사진 없는 사진기자’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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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민족대표들의 대공판 화보-잠도 못자고 방청권을 얻고자 줄 서 있는 시민들 (1920년 7월 15일자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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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밖의 새로운 봄 빛(1920년 4월 17일자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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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무소 앞에서 출옥자를 촬영하기 위해 몰려든 사진반원들. 동아일보 1927년 2월 9일자 2면에 게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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