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창간 당시 논설반 기자 김명식(金明植), 박일병(朴一秉) 선생은 사회주의 신봉자이자 열렬한 운동가였습니다.




  송산 김명식(松山 金明植 · 1890~1943 재직기간 1920.4~1922.2)은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에 입학하여 같은 과에 있던 장덕수(창간 때 논설주간)를 만나 1916년 봄, 조선 중국 대만의 청년 40여명이 일본제국주의를 타파하고 서로 도울 것과 민족평등, 국제평등을 실현한다는 목적으로 결성한 신아동맹단(新亞同盟團)에 함께 참여한 것이 계기가 돼 본사 논설반 기자가 됐습니다.






ec82aceca7841

김명식 (본사 사원록)







  김명식은 장덕수보다 나이가 많았으나 정열적이고 도전적이었습니다.




  “논설반에서 큰 소리로 ‘너같이 못생긴 자나 그것을 못 싣는다지, 누가 뭐라 할 것이냐’고 악을 쓴다. 들어가 보니 김명식과 장덕수가 사설의 가쇄(假刷)를 앞에 놓고 김이 쓴 사설을 장이 못 싣는다고 하여 언쟁이 벌어진 것이다.

김은 분을 참지 못하여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장은 고요히 고집 피우지 말라고 권고하는 것이었다. 가쇄된 사설의 제목은 ‘성인불사(聖人不死·성인이 죽지 아니하면), 대도불식(大盜不息·큰 도둑이 쉬지 않고 일어난다)’이라는 것이었다. … 필자는 이 글의 본 뜻을 이야기하면서 김명식씨에게 양보하기를 권고하였었다.” (창간 기자 유광렬의 회고)




  김명식은 논설기자로서 속필(速筆)인 동시에 다작(多作)을 만들어 냈고, 주의주장이 강한 논객이었던 만큼 논란도 많이 따라 다녔습니다.




  “장덕수 군은 신문사 창립 사무에 분주하여 집필할 여가가 넉넉지 못하였고 장덕준 군은 집필할 만한 건강이 없었다. 그럼으로 약마(弱馬·약한 말)의 짐은 경(輕·가볍지)하지 아니하였다.

더구나 당시 신문의 편집 체재는 현재와 달라서 전보(電報·외신)를 3면에 실고 1면에는 시사평론과 사상문제에 관한 논문만 게재하였는데 매일 평균 6, 7단의 논문이 있어야 1면 편집이 되었다.

그럼으로 1면에 게재할 만한 투고가 있을 때에는 좀 짐을 덜었지마는 1면 기사에 원고료까지 줄 수 없던 그 때 현실에서 그러한 투고가 많이 있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장 군과 둘이서 거의 매일 1면 6, 7단 기사를 쓰지 아니할 수 없었고 또 장 군이 일이 있는 때에는 혼자 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으로 쓰는 양이 많은 만큼 장 군보다 더 많이 필화를 당하였고 또 장 군은 논전은 삼가고 수양론과 시사해설을 많이 쓰기 때문에 사내외의 선배와 부로(父老)의 분노를 산 일이 없었지마는 나는 비교적 사상문제를 많이 썼으므로 사내 선배에게서까지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가 쓴 ‘조선부로(朝鮮父老)에게 고함’(1920년 5월 4일자부터 9일자까지 6회 연속 게재)이라는 글은 창간 이후 처음으로 질문대(質問隊·항의 방문한 사람들)를 맞아 박영효 사장이 퇴진까지 한 사건이었습니다.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족제도에 대해 ‘가장권의 남용’, ‘부로(父老)된 의무를 행하라’, ‘자녀로 하여금 수성(獸性)혼인을 강제치 말라’, ‘부로(父老)된 책임을 다하자’ 등으로 주제를 나누어 낡은 인습을 타파하자는 주장을 편 글이었습니다.




  이 글이 연재되던 5월 8, 9일자에는 모화사대(慕華事大)주의를 비판하는 ‘가명인(假明人·거짓 명나라 사람) 두상(頭上)에 일봉(一捧)’이라는 ‘환민(桓民) 한벌’(권덕규의 필명)의 기고문까지 실려 각지의 유림들이 본사를 찾아와 항의하는 소동을 빚었습니다.




  “합병 이후 근대적 의미와 색채를 가진 필화와 논전은 동아일보가 선진(先進)일 듯하다. 그리고 동아일보 창간시대의 조선 청년은 사상적 기근이 극도에 달하였었다. 재래사상으로부터는 이탈하였지만 그 빈자리에 채울 만한 신사상은 얻지 못하였다.

무슨 자유니 무슨 자결이니 하는 의미를 아는 자 적었고 또 알려주는 자 없었다. 일찍 문예부흥이니 종교혁명이니 하는 말과 미국에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이 있었고 불국(佛國)에 대혁명이 있었고 영국에 산업혁명이 있었단 말은 들었지마는 그들이 모두 무슨 사상과 주의의 실현인지 아는 자 적었고 또 알려주는 자 없었다.

더구나 로서아의 신(新)사실은 물을 곳이 없었다. 이러한 시대에 동아일보는 나왔다. 그리하여 국제연맹과 윌슨의 평화원칙을 알려 주었다. 또 루소와 몬테스큐를 전하고 아담 스미스와 존 스튜어트 밀을 전하고 또 루터와 칼빈을 전하였다.

그럼으로 사상에 주리든 청년들의 동아일보로 향함은 분천(奔川·흐르는 물)을 급히 따라가는 갈마(渴馬·목마른 말)와 흡사하였고, 동아일보에는 청년 사상의 원천인 관(觀)이 있었다.” <김명식, ‘필화(筆禍)와 논전(論戰)’, 삼천리, 1934년 11월호>




  그가 1921년 6월 3일부터 8월 31일까지 61회에 걸쳐 본지에 쓴 ‘니콜라이 레닌은 어떠한 사람인가’는 조선에 공개적으로 소개된 최초의 레닌 일대기였습니다.






ec82aceca78421





  사회주의사상에 심취해 있던 김명식은 레닌의 지원 자금이 국내로 들어와 1922년 3월 ‘신생활(新生活)’이 창간되자 동아일보를 떠나 사회주의사상의 전파와 운동의 길로 나섭니다.




  “1922년 11월 ‘러시아혁명 5주년 기념호’로 발행된 ‘신생활’ 11호에 게재된 김명식의 ‘러서아혁명 5주년 기념’, 신일용의 ‘5년 전의 금일을 회고’ 등의 글이 ‘적화사상’을 선전했다고 해 재판에 회부되었다. …

이날 공판에서는 단연 방청객들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긴 이가 있었다. ‘공산주의에 찬성하는가?’라는 재판장의 질문에 ‘마르크스의 사상에 공명하며 연구하고 찬성하오’라고 당당히 답하며, 공판을 사회주의사상의 선전장으로 활용한 신생활사의 주필 송산 김명식(松山 金明植)이 바로 그였다.” (박종린, ‘한국의 사회주의:인물 1-꺼지지 않은 불꽃 송산 김명식’, 진보평론 제2호, 1999년 겨울)




   1923년 1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김명식은 가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시달리다 1943년 4월 11일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며 “일본이 망할 때까지 나의 사망신고를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1920년 4월 1일자 동아일보 창간호에는 송산 김명식(松山 金明植)의 시 두 편이 실려 있습니다.





 


비는 노래




시조 주몽(朱蒙) 연 땅에

천수제(天授帝·고려 태조 왕건)가 지은 이름

산고수려(山高水麗) 장할시구

단목(檀木·박달나무)에 움이 나고

근화(槿花·무궁화)가 새로 필 때

동아일보 탄강(誕降)하다

영락제(永樂帝·명나라 3대 왕)의 포부이며

을지공(乙支公)의 정신이며

원효(元曉)의 자비이며

왕인(王仁)의 문화이며

서희(徐熙)의 용맹이며

개소문(蓋蘇文)의 기개이며

신숭겸(申崇謙)의 혼백이며

성삼문(成三問)의 구설이라

소리소리 정의(正義)이며

말말이 인도(人道)로다

남해는 깊고 깊고

백두는 높고 높다

동반도(東半島)

만년지(萬年紙)에

한양 평원 벼루 삼고

한강은 연수(硯水·먹을 갈기 위해 벼루에 붓는 물) 삼고

남산은 먹을 삼고

송백엽(松柏葉·소나무와 잣나무 잎) 붓을 매고

단목(檀木) 같이 굳은 뼈와

근화(槿花) 같이 고운 고기

설총(薛聰)의 지은 말로

세종(世宗)의 만든 글로

김생(金生)의 체를 받아

무궁무진 써내어

남해같이 깊은 내용

백두같이 높이 들어

질풍악우(疾風惡雨) 겁내지 않고

여천동수(與天同壽) 하오리라






새 봄 




대리(大理)가 동(動)하다

고료(孤廖·외로움)가 파하다

상설(霜雪)이 갔다

견빙(堅氷)이 풀렸다

막힌 샘이 흐르고

붉은 산이 푸르다

아! 봄이로구나

봄이 왔다 봄이 왔다

어디에 어디에

어둠의 근역(槿域)에

마귀도 가고 사탄도 가고

파리 떼도 가다

일기가 따습고

바람이 가볍다

새가 울고 꽃이 피고

나비가 난다

저 무궁화 고운 꽃에

나비가 앉는다

꽃송이 속에 입부리를

깊이깊이 찔렀다

두 날개를 너울너울

꽃 종자를 날린다

황금도 명예도

권력도 없다

저 꽃에 저 나비에

다만 뜨거운 사랑의 결정(結晶) 뿐이다

아 황금의 무용(無用) 권력의 패배

정(情)의 세계 사랑의 승리

아! 사랑 아! 사랑

새 봄의 새 사랑






  동아일보 창간 멤버로 김명식 보다 세 살 아래였던 박일병(朴一秉·1893~불명)도 열렬한 사회주의자였습니다.




  1893년 함경북도 온성에서 태어나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와세다대학 문과에 입학한 박일병은 1919년 3월 만세운동에 참가하였고 이듬해 귀국해 동아일보 논설반 기자가 됐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돼 동아일보를 떠나 사회주의 운동가의 길로 나섰습니다.




  보성전문 동기이자 시인인 황석우(黃錫禹)로부터 ‘누가 뭐라 해도 조선에 단 하나뿐인 존재이자 이조(李朝) 500년 이후 처음 난 웅변가’ (삼천리 제4권 1932년 4월호)라는 평가를 받았던 박일병은 김명식이 쓴 ‘조선부로(朝鮮父老)에게 고함’과 권덕규(權悳奎)의 ‘가명인(假明人) 두상(頭上)에 일봉(一捧)’이 논란을 빚어 유림들이 몰려왔을 때 이들을 상대해 설득시켰다고 합니다.




   “이 놈! 동아일보 놈들아 부유(腐儒·생각이 낡고 완고하여 쓸모없는 선비)라니 웬 말이냐. 공부자(孔夫子·공자를 높여 이르는 말)의 성학도(聖學徒)를.”

박일병은 부유(腐儒)의 뜻을 웅변(雄辯)으로 설시(說示)한 뒤 “그래 당신들이 이런 부유(腐儒)란 말이오?”

도포자락은 더 할 말이 없어 돌아 나갔다. (삼천리 1931년 9월호)




  동아일보를 떠난 그의 활동은 본지에 줄곧 소개됐습니다.

 


  1920년 6월 6일자 3면


  고학생과 노동자를 돕기 위한 동경동우회가 조직되다. 동 회는 박일병 홍승로 등이 고학생의 취학과 노동자의 인격 함양을 위한 강습회를 할 계획이다.






  1921년 4월 22일자 3면


  단군어천(御天)기념


  오늘 22일은 음력으로 3월 15일이니 곧 단군의 어천절이라. 가회동에 있는 대종교 남도본사에서는 오전 11시부터 성대한 기념식을 거행하고 저녁 7시 반에는 수송동 각황사에서 강연회를 여는데 송진우가 ‘조선인’, 박일병이 ‘신시(神市)’라는 제목으로 강연한다.
 




  1922년 3월 23일자 3면


  차부(車夫)의 강연에

  차부(車夫)의 만세로

  해산된 노동 강연


  진남포(鎭南浦) 노동야학회(勞動夜學會) 주최로 박일병(朴一秉)씨를 청하여 지난 십칠일 하오 칠시에 당지 비석리 장로교회당에서 강연회를 개최하였는데 ‘우리의 희망’이라는 연제로 구보조(久保組) 차부 강일성(康一成)군이 등단하여 강연을 하던 중 청중들의 박수하는 소리는 회장이 떠나갈 듯 한 중 인력거부 박성록(朴成祿)은 그 강연에 어떠한 감동을 받았던지 만세를 불렀으므로 경찰관은 즉시 회의 해산을 명하고 만세 부른 한 인력거부는 즉시 체포되어 방금 취조 중이라더라. (진남포)






  1923년 5월 23일자 3면






ec82aceca7843






  그는 1926년 6월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 때 사촌동생 박순병(朴舜秉)과 함께 체포돼 박순병은 심문 중 고문으로 숨졌고 박일병은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고문의 후유증으로 시력을 거의 잃어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으나 그 후 그의 웅변은 다시 들을 수 없게 됐습니다.




  박일병과 박순병은 2007년, 김명식은 199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습니다.








ec82aceca7844_ebb095ec9dbcebb391

1928년 서대문형무소 투옥 중의 박일병



 

댓글 없음 »

No comments yet.

RSS feed for comments on this post. TrackBack URL

Leave a comment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