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기자 김동성(金東成 · 1890~1969) 선생은 100년 전, 1910년대에 이미 ‘미국 말’을 ‘미국 말답게’ 한, 앞선 사람이었습니다.
14세 때 ‘작심하고 서울 구경을 실행’하고 15세 때 황성신문 10년 치를 독파하며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읽고 큰 충격과 감명을 받아 고향 개성에 한영(韓英)학원을 설립, 서울의 윤치호(尹致昊) 선생을 교장으로 초빙해 신학문과 영어를 익혀 중국 소주(蘇州) 동오(東吳)대학으로 건너가 1년간 수학했습니다.
그는 ‘왜놈들은 모두 강도’라는 생각에서 그 시절 대개의 사람들이 택하는 ‘동경행’이 아닌 미국 유학 길에 올랐습니다.(1909년)
그 곳에서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신문학(新聞學)’이라는 것을 전공하고 1919년 귀국, ‘영어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덕’에 동아일보 창간기자로 합류했습니다.
창간기자로서 그의 활약은 컸습니다.
창간 직전 한국 기자 최초의 ‘특파원’이라는 이름으로 북경에 간 그는 불과 일주일 사이 쑨원(孫文)의 ‘천하위공(天下爲公)’이란 휘호를 비롯하여 5·4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는 저명한 학자요 교육가인 베이징대학 총장 차이위안페이(蔡元培), 베이징 정권의 국무총리 진윈펑(靳雲鵬),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이란 명저로 널리 알려져 있던 량치차오(梁啓超), 전 사법총장 왕충후이(王寵惠), 전 동삼성(東三省·만주) 총독 자오얼쉰(趙爾巽), 전 천변(川邊) 서강(西康) 진무사(鎭撫使) 인창헝(尹昌衡), 옌징(燕京)대학 총장 스튜어드 등 당대 명사 20여 명의 휘호를 받아 본지에 게재했습니다.
“저명인사 20여 명의 축필(祝筆)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은사 앤더슨(Roy Anderson, 중국 소주 동오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쳐준 사람)의 특별한 주선도 큰 힘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외국인들의 ‘조선 언론’에 대한 큰 기대를 보여주는 실례(實例)고 … 우리 겨레들의 동아에 대한 기대와 성원은 지금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으며 외국기관 또는 외국인 역시 ‘동아’를 마치 한민족의 대표기관처럼 대접해 주었었다.” (김동성의 회고)
뿐만 아니라 김동성은 창간호 3면에 한 칸짜리 만평도 그렸습니다.
“동아일보란 글자가 박힌 수건을 허리에 두른 어린이가 까치발로 곧추 서서 손을 위로 뻗어 ‘단군유지(檀君遺趾)’라는 휘호가 쓰인 액자를 잡으려 하고 있다. 갓 태어난 동아일보가 단군의 뜻을 이어 배달민족의 독립을 이루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는 비장한 각오가 담긴 창간 만평”(손상익 만화평론가 · 언론학 박사, 동아일보 2005년 4월 1일자 A26면 ‘동아일보 만화로 본 85년 사회사’)이 그의 작품입니다.
나아가 1920년 4월 11일자 3면에 ‘그림이야기’라는 이름으로 ‘4칸 만화’를 한국 최초로 그리며 ‘만화(漫畵)’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며 만화에 대한 이론도 깊어 ‘만화 창작 이론의 효시’로 일컬어집니다. (위키백과)
그 후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며 그는 ‘최초의 국제기자’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동아에 재직하는 동안 잊혀지지 않는 것은 1921년 10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제2회 만국기자대회’에 대표로 참가했을 때의 일이다. 회의장 각국 대표 석 가운데 ‘코리아’라는 이름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격했던 심정은 지금도 생생하며 각국 대표들이 호놀룰루 시가를 행진할 때 그곳 교포들이 고국에서는 이미 자취를 감추어버린 태극기를 흔들며 열광적인 환영을 하여주던 때의 감격도 잊을 수 없다. 나는 그곳에서 대회 부회장으로 피선, 국내에서는 굉장히 장한 일이라고 파문이 컸다고 하나, 실은 그 대회의 부회장은 참가 각국에서 각각 1명씩을 내기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나 혼자 대표로 간 ‘코리아’에서 김동성이 부회장을 차지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호놀룰루대회가 끝난 후 워싱턴으로 직행, 11월 11일부터 열리는 ‘열강 군축회의’를 참관 취재했는데 이 계획은 본사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서 진행한 일이었다.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워싱턴행 계획이 일제 당국에 알려질 때는 호놀룰루대회 참가 자체도 어려울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동우(東友) 1963년 6월호 5쪽>
그는 한국 최초의 언론학 개론인 ‘신문학’(1924년 6월)을 펴낸 데 이어 한영사전인 ‘최신 선영(鮮英)사전’을 일제시대(1928년 12월) 출간했으며, 해방 후 ‘그레이트 칸’(징기스칸)이란 영문 소설을 영자신문에 연재했습니다. 그 외 열국지 서유기 금병매 등의 소설을 쓰고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1956년 9월 1일자부터 1960년 4월 29일자까지 1254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장기 연재했습니다.
“김동성의 증조부는 개성 갑부라는 말을 들을 만큼 큰 부자였으나 조부와 부친 때 홍모라는 개성 유수(留守·조선시대 벼슬)에게 강제로 토색을 당해서 현금 3만 냥을 빼앗겼다.… 그의 부친은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운명과 집안의 쇠퇴해감을 비관하여 주야로 술만 마시다가 3대 독자로 태어난 천리구가 겨우 세 살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나고 마니 향년 39세였다. 그리하여 천리구의 어머님은 항상 말하기를 ‘너의 부친은 과음해서 요사(夭死)하였으니, 너는 제발 술을 먹지 말라’고 어려서부터 신신당부하였다. 이 때문에 천리구는 일생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 후 천리구가 동아일보의 창간 동인이 되어 신문사 일로 매일같이 요리 집 출입을 할 때에도 술을 접구(接口)도 하지 않아 동료들을 모두 탄복하게 하였다. … 나는 외람되나마 하몽 이상협, 민세 안재홍 씨와 더불어 선생을 가리켜 한국이 낳은 3대 기자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김을한, ‘천리구 김동성(千里駒金東成)’, 을유문화사, 1981년>
‘천리구(千里駒)’는 김동성 선생의 아호로 ‘천리를 가는 준마, 뛰어난 자질을 타고난 사람’이란 의미로 동네 사람들이 붙였다고 합니다.
그는 16세 때 민 충정공 댁에 생겨난 혈죽(血竹)을 보고 ‘두 가지에 달린 잎사귀가 48잎’ 인 것까지 관찰했을 뿐만 아니라 ‘대나무는 24시간에 36인치 자란다’는 기록까지 남겼습니다.
“신문인(新聞人)이면서도 덮어놓고 열넉냥금의 신문기자가 아니라 값을 치자면 여느 신문기자에 비하여 천균(千鈞)의 무게를 갖는다.… 1937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발성 영화(發聲映畵) 심청전(沈淸傳)을 휴대하고 이를 해외에서 상연하여 우리의 문화를 널리 소개하였으며…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의 여러 원수(元首)들을 만나보고, 장차 한국민의 이민 계획을 면밀히 수립,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하려던 차 불행하게도 6·25로 이민 계획은 수포가 되고 말았다.… 그의 아호(雅號) 천리구(千里駒)는 김문(金門)의 ‘천리구’ 만이 아니라 오국(吾國)의 천리구 됨이 분명하다.… 만나면 만날수록 그의 해박한 지식과 겸허한 자세에는 저절로 머리가 수그러진다. 그리하여 나는 천리구를 가리켜 ‘기자 중의 기자’, ‘신사 중의 신사’라는 존칭을 부여했던 것이다.” <월탄 박종화(月灘 朴鍾和), 1980년 9월(김을한의 책)>
시베리아로부터 철병(1920년대 초)해 가는 미(美) 군인들이 미쳐 쓰지 않은 의료품들을 원산 등지의 의료기관에 기증하고 갈 때 ‘없는 나라’를 대신해 ‘동아일보 김동성’이라는 영수증을 발급해 준 사실을 평소 자랑스러워했고 전쟁과 연애, 그리고 기자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이겨야 한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여기에 인용된 사진 중 창간호에 실린 첫 번째 사진을 높은 화질로 제공해 주실 수 있을까요? 학술 논문에 인용하고 싶습니다. 제가 볼 때에 이 사진은 원본을 스캔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축쇄판을 다시 스캔할 수밖에 없어서 기왕이면 좋은 화질과 해상도의 사진을 싣고 싶습니다. 부탁 드립니다.
Comment by 부끄럼 — 2009/08/25 @ 8:21 오후
부끄럼님 동네역사관 편집담당자입니다. 사진 관련해서 도움이 필요하시면 02-361-1384, happyend@donga.com으로 연락주세요.
Comment by 신이 — 2009/10/01 @ 9:56 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