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당시 유근(柳瑾 · 1861~1921), 양기탁(梁起鐸 · 1871~1938), 두 분을 편집감독으로 모셨습니다. 일찍이 유근 선생은 황성신문, 양기탁 선생은 영국인 배델과 함께 대한매일신보 창간멤버였습니다. 이들을 편집감독으로 모신 것은 ‘그들이 끼칠 정신적 지도력과 조선왕조말 이래 민간지의 정신을 동아일보가 이어받는다’는 뜻에서였습니다.
“우리 민족의 문화 발달이 긴급하다는 부르짖음이 유식자(有識者)의 사이에 일어나매 선생은 다시 신문사업이 가장 긴요함을 부르짖어 동아일보사의 창설을 주창하였으니 선생은 실로 동아일보사의 설립을 발론(發論)한 최초의 한 사람이며 동아일보라는 이름도 선생의 정한 바이라….” (동아일보 1921년 5월 22일자 3면)
유근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쓴 위암 장지연(韋庵 張志淵)과는 피를 나눈 형제와 같은 사이였습니다. 장지연 선생이 ‘시일야방성대곡’을 쓸 때 망국의 슬픔과 격정을 이기지 못해 몇 자 쓰고서 울고, 울면서 술 마시고, 또 쓰다가 절반쯤 쓰고 울면서 쓰러지자 유근 선생이 뒷부분을 마무리 지었다고 전해집니다.
1921년 5월 20일 유근 선생이 작고하자 장지연은 ‘이 몹쓸 사람아. 한날 한 자리에서 죽자고 약조해놓고 먼저 가다니 웬 말인가’하고 통곡하다 깔고 있던 요를 둘둘 말아 사람처럼 세워놓고 큰 절을 한 뒤 술을 권했다고 합니다.
“석농, 오래간만일세. 한잔 들게.”
“자네가 안 마시면 내가 먹지.”
“… ….”
“… ….”
“오늘 많이 마셨으니 우리 함께 잠이나 자세.”
“지방열(地方熱)을 없이하라. 이것은 조선인의 고질이니 사회를 위하여 활동하는 자, 민족을 위하여 일하는 자는 마땅히 이에 조심하여 그 근절을 기하라.”
동아일보 1921년 5월 23일자 1면 추모사설 가운데 인용된 선생의 유언입니다.
양기탁 선생은 황성신문에 실린 ‘시일야방성대곡’을 대한매일신보에 즉각 전재하고 영문판 ‘Korea Daily News’ 에도 번역 게재해 세계에 이를 알렸습니다. 양기탁 선생은 창간호 1면 ‘知아 否아?(아는가 모르는가?)’라는 글에서 약소국 벨기에가 강대국 독일 스페인 등으로부터 굳건히 독립을 유지하는 것을 부러워하며 벨기에 사람들의 독립심과 애국심, 상호부조와 조합운동을 우리의 본보기로 삼자고 했습니다.
1904년 영국인 배델(裵說 · Ernest T, Bethell · 1872~1909)과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할 때 그 비용 중 일부를 고종(高宗)이 제공했는데 배델이 고종을 알현할 때 통역을 할 정도로 선생은 서방 세계에 대해서도 눈을 뜬 선각자였습니다.
1911년 ‘데라우치(寺內)총독 암살미수사건’을 일제가 확대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선생은 4년간 옥고를 치르고 유배 중 만주로 탈출했습니다. 선생은 동아일보 편집감독으로 있을 때인 1921년 8월, 미 의원 일행이 서울역에 내릴 때 독립공고서(獨立控告書)를 제출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려다 또다시 투옥됐습니다. 그때 충격을 받은 모친이 작고하자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일시 출감한 사이 다시 만주로 탈출하였습니다.
“유근 선생은 겉으로 보아서는 온후한 군자인데 비하여 양기탁 선생은 모습부터 강직하여 보이고 기른 수염과 함께 어디로 보든지 애국지사인 혁혁한 풍모가 역연하였다 … 양 선생은 독립운동에 열중하여 별로 신문사에 못 나오고 … 노(老) 지사는 일하던 사원들이 황망히 쭉 일어나서 경의를 표하면 입가에 씁쓸한 웃음을 띠고 앉으라고 손짓하면서… 바람과 같이 사라지더니 다시 망명하여 독립운동자로서 바람 센 만주 광야로 떠났었지요.” (창간 기자 유광열)
양기탁 선생과 관련하여 김일성(金日成)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1권 190~192쪽 요약)에 아래와 같은 기술이 있습니다.
“3·1 인민봉기 후 남만에서는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사업이 활발히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모든 단체들이 저마다 다른 파를 무시하고 자기파를 내세우면서 본위주의를 하기 때문에 통합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통합을 위한 논의는 매번 무의미한 입씨름과 마찰로 공회전을 하였다. 아버지는 통합운동이 직면하고 있는 이런 난관을 타개하기 위하여 이 사업에 독립운동의 원로들을 인입하려고 결심하였는데 그 첫 대상으로 지목된 사람이 량기탁이었다. 적의 감시 속에 있는 량기탁을 서울로부터 남만주까지 안내해온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심중히 생각하던 끝에 그 적임자로 리관린을 선전하고 량기탁에게 보내는 편지를 주어 그를 서울로 파견하였다.
량기탁은 민족주의자들 속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평양 한학자의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부터 애국적인 신문활동과 교육운동으로 대중 속에 반일독립정신을 배양하는데 많은 힘을 기울이었다. 량기탁이라면 조선에서 처음으로 되는 ‘한영사전’을 편찬하고 일본에 대한 국채보상운동을 지도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그는 ‘105인 사건’으로 감옥살이도 여러 해 하였으며 신민회와 상해임시정부(국무위원), 고려혁명당(위원장) 조직에도 관계하였다. 이 사람이 오동진과 함께 정의부도 조직하였다. 이런 경력으로 독립운동자들은 소속에 관계없이 그를 존경하였다.
리관린은 서울에 나갔다가 형사들에게 붙잡혀 종로경찰서 구류장에 갇히었다. 적들은 그에게 매일같이 악착한 고문을 들이댔다. 코에 고춧가루 물을 부어넣기도 하고 참대 침으로 손톱눈을 찌르기도 하고 두 팔을 뒤로 제쳐 천정에 매달아놓기도 하였다. 어떤 날에는 그를 마루바닥에 눕혀놓고 얼굴에 널판자를 올려놓은 다음 그것을 디디고 서서 발을 탕탕 구르기도 하였는데 고문할 때마다 중국에서 왔는가, 로씨야에서 왔는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다니는가하면서 차고 때리고 짓밟고 하였다. 나중에는 두 다리에 매운 재떡을 붙이고 석유를 친 다음 불을 달아놓으면서 태워죽이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래도 리관린은 굴복하지 않고 ‘나는 직업이 없어서 다니는 여자다, 어느 부자 집 침모나 보모를 하려고 서울에 왔는데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붙잡아다놓고 왜 이렇게 못살게 구는가’하고 대들었다. 리관린이 하도 뻗대자 한 달 만에 놈들은 그를 놓아주었다. 그는 운신조차 할 수 없는 몸이었으나 기어이 량기탁을 데리고 흥경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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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by 쭈쭈쭈마 — 2018/06/16 @ 10:12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