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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 100년, 東友 100인 – 고희동

Posted by 신이 On 5월 - 28 - 2019

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66호) 

 

 

창간호 1면 3·1운동 재판 ‘통큰편집’ 시도…

한국 첫 서양화가  –  고희동

  

 

 

<고희동(春谷 高羲東), 1886∼1965>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이 동아일보 창간동인이 된 것은 그가 동경미술학교 서양학부에 들어가 5년 과정을 졸업하고 1915년에 귀국해 중앙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게 된 인연에서 비롯됐다. 입사 후 그의 첫 작품은 창간호 1면 도안이었다.

 

 

 “복판에 네모지게 난간을 하고 제목은 그 위에 가로 쓰고요. 네모진 난간속에 창간사를 넣었습니다. 고구려 고분에서 발견된 벽화 속의 용 같은 것을 모두 모아 만들었습니다”(1965년 4월1일 동아방송, 고희동 증언). 고희동 화백은 고구려 강서대묘 벽화들의 이미지를 종합해 꽉 차면서도 균형 잡힌, 새 세상을 향해 승천하는 용의 꿈, 민족의 희망, 동아일보의 갈 길을 한폭의 도안으로 나타냈다.

 

 

 3·1 독립운동 관련자 48인의 재판을 앞두고 동아일보는 48인의 사진을 모두 실어 거족적인 관심을 표시한다는 대담한 기획, 통큰 편집방침을 세웠다. 그런데 딱 한 사람 한용운 선생의 사진을 구할 수 없었다. 이 난처한 순간을 기지로 넘기게 한 사람이 바로 고희동이었다. 어떤 단단하게 생긴 청년얼굴에 그럴듯하게 화이트를 칠해 가짜 한용운 선생 사진을 만든 것.

 

 

 고희동은 14세 때 한성법어학교에 들어가 4년간 프랑스 말을 배웠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04년 궁내부 주사로 취직하여 궁내의 프랑스어 통역과 문서 번역 일을 했다. 그러나 이듬해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관리생활을 버리고 현실도피책으로 그림을 시작하게 됐다.

 

 

 당대의 대가로 알려진 안중식과 조석진 문하에 드나들기 시작한 게 화가로서의 출발이었다. 그러나 당시 화단이 중국 그림책을 충실히 옮겨 그리는 풍토에 환멸을 느끼던 춘곡은 궁내부 시절 외국인들과 접촉하면서 대할 수 있었던 서양의 그림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됐다. 일본으로 유학 간 최초의 미술지망생으로,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가 된 배경이다.

 

 

 귀국해서 신미술운동을 펼칠 결심을 한 고희동은 중앙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한편, 한국 최초의 서화가들 모임이자 근대적 의미의 미술단체인 서화협회를 결성해 총무를 맡았다. 회장은 스승 안중식이었다. 서화협회의 가장 중요한 활동은 회원작품전으로, 1921년 중앙고보 강당에서 제1회 서화협회전이 열렸다. 대중을 상대로 한 최초의 근대적인 전시회였다. 회원전과 더불어 한국최초의 미술지인 서화협회보를 창간하기도 했다. 

 

 

 창간 초기의 지면 도안이 어느 정도자리 잡힌 1923년 12월 춘곡은 동아일보를 퇴사하고 미술운동에 매진했다. 1939년 일제의 탄압으로 서화협회가 해산되기까지 총무 또는 회장으로 민족진영의 미술가 단합에 정력을 기울였다. 광복 후에는 조선미술건설본부 위원장으로, 그리고 우익 미술가들의 집결체인 조선미술협회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 글 황의봉(동우회 편집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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