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5. 동아일보 사람들- 국기열

Posted by 신이 On 10월 - 17 - 2018

 

국기열(鞠琦烈, 1892~1970)은 전남 담양출신으로 1923년 3월 고향에서 담양분국 고문으로 동아일보와 인연을 맺은 뒤 다음해 5월 정치부 기자로 입사했다. 왜정시대 인물사료에는 1921년 4월 와세다대학 정치과에 입학하였으나 1921년 11월 병 때문에 퇴학한 것으로 나와있다. 호는 일농(一農)으로 동아일보에서 정리부 지방부 정치부 경제부 사회부 등 5개 부장을 두루 역임했으며 1927년부터 1930년에는 편집인으로 있었다.1934년 8월 퇴사했다.

국기열은 만주의 군벌 장쭤린(張作霖)이 1925년 말  화북(華北) 쟁탈전을 벌일 때 만주로 특파됐고, 1927년 여름 동아일보가 전국 13도에 기자들을 보내 80여 곳의 수리조합을 답사하고 그 실태를 조사해 보도토록 했을 때 강원도에 파견됐다. 정치부 기자로서 조선총독부를 오랫동안 출입했으며 비구니로서 유명한 일엽 스님(1896∼1971)과 동거해 화제가 됐다.

 

국기열(鞠琦烈)(담양, 1892~1970) ▲ 1924. 5 기자(정치부), 정리부장, 지방부장, 정치부장, 지방부장 겸 경제부장, 편집인, 사회부장, 정치부장, 1934. 8 퇴사.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포화(砲火)의 전지(戰地)에 본사기자(本社記者) 특파(特派)

금십이일야(今十二日夜) 북행차(北行車)로

바야흐로 불꼿이 퍼지는 중국의 동란은 갓갑게 동아의 정국에 중대한 관계가 잇슴으로 각파의 승패리둔은 직접으로 동아 정국의 추이를 예언하는 것이라 이에 본사는 그 진상을 충실히 보도할 절실한 필요를 늣기는 동시에 한쪽으로 치우치는 혐의가 업지안은 일본의 통신긔관이 뎐하는 소식만은 미들수업서 이제 적지안은 희생과 위험을 불구하고 본사 긔자를 전디에 특파하기로하야 본사의 정치부댱(政治部長) 국긔렬(鞠琦烈) 군을 십이일 밤차로 포화의 전디로 향하게 함니다

(동아일보 1925년 12월 12일자 2면)  

 

 

국기열 정치부장이 보내온 기사들…

양군승패(兩軍勝敗)와 양양(兩樣)의 관측(觀測) (동아일보 1925년 12월 21일자 1면)   

봉군(奉軍)의 약탈우심(掠奪尤甚) 주민(住民)은 전도(前途)를 비관(悲觀) (동아일보 1925년 12월 22일자 1면)    

봉군(奉軍) 내부붕괴(內部崩壞)로 장작림(張作霖)의 운명(運命)은 금명(今明) (동아일보 1925년 12월 23일자 1면)   

장작림씨(張作霖氏) 최후(最后)의 비명(悲鳴) (동아일보 1925년 12월 24일자 1면)  

봉천(奉天)에서 본사특파원(本社特派員) 국기열발전(鞠琦烈發電)… 봉천(奉天)의 피난동포(避難同胞)와 시급(時急)한 구제방침(救濟方針)  (동아일보 1925년 12월 26일자 2면)  

 

 

전조선수리조합실사(全朝鮮水利組合實査)

강원도(江原道)

삼일포(三日浦)를 저수지(貯水池)로 적벽강동일대야(赤壁江東一帶野)

설계착오(設計錯誤)로 경영(經營)의 극난(極難)

몽리오백정보(蒙利五百町步)、조합원사백이십명(組合員四百二十名)

고성수리조합(高城水利組合)

◇ 제2대(第二隊) 제2반(第二班) 국기열(鞠琦烈)

(동아일보 1927년 11월 2일자 5면)  

 

 

新聞記者團 언파레-트

漢陽學人

京城에는 여러 개의 新聞記者團이 잇다. 北岳俱樂部, 京畿俱樂部, 光化門俱樂部, 梨花俱樂部, 司法記者團, 京城府政記者團, 鐵道記者團, 經濟記者團, 運動記者團과 넷 市內 鍾路, 本町, 西大門, 東大門, 龍山의 各 警察署出入記者團까지 合한다면 無慮 14개의 新聞記者團이 날마다 激烈한 競爭을 하고 잇다. 무릇 團結體라는 것은 엇더한 性質의 것이던지 團體나 或은 團員의 共同利益을 위하야 互相扶助 共同戰線을 펴는 것이 常例이지만은 新聞記者의 團體만은 이와 저윽히 달은 바가 잇다. 勿論 엇더한 新聞記者가 對外的으로 迫害를 바덧다던가 또는 新聞記者로서의 人格을 蹂躪밧엇다던가 하는 境遇에는 全新聞記者團이 一齊히 蹶起하야 共同戰線을 펴는 例가 아주 업는 것은 안이지만은 그러한 일은 1년에 단 한번이 잇슬가 말가 하는 極히 드문 일이요 表皮를 살짝 베끼고 한번 그 內幕을 들혀다 볼 것갓흐면 新聞社와 新聞社 記者와 記者사이에는 어느 때던지 「살이 살을」 베혀 먹는 激熱하고도 深刻한 競爭의 演出 되는 것이니 新聞記者團은 또 吳越同舟의 團體라고 할까?

그러면 各 新聞社의 大小記者들이 每日 가티 모히는 前記 各記者團의 陣容은 엇더한가? 이에 大略 그의 「아웃트라인」을 엿보면 다음과 갓다.

1. 北岳俱樂部

이는 總督府 出入記者團으로써 組織된 新聞記者團이니 그 몀버-는 東亞의 麴琦烈, 金東進, 朝鮮의 李瑄根, 朴尹錫, 中外의 金炯元, 洪鍾仁, 每申의 高永翰, 金乙漢의 8명인데 그 中의 金炯元, 洪鍾仁의 兩氏는 中外日報의 沒落으로 事實上 棄權을 한 셈이고 朝鮮의 李瑄根氏는 編輯局長代理가 되엿다고 자최를 보지 안음으로 現在에는 남어지 五氏가 僅僅 그 看板을 維持해 갈뿐이다. 또한 그리고 總督府는 그 自體가 朝鮮의 最高行政機關인만큼 이에 每日 出入하는 各 新聞社의 記者들도 적어도 한 新聞社의 體面과 威信을 損傷시키지 안코 兼하야 手腕과 力量이 相當한 中堅記者들이 만흔데 麴琦烈氏는 老鍊 金東進氏 敏捷 朴尹錫氏는 熱誠 高永翰氏는 固執 金乙漢氏는 圓滿하다는 點으로 評判이 놉다.

(漢陽學人, ‘新聞記者團 언파레-트’, ‘삼천리’ 1931년 7월호, 72~73쪽)

 

 

배먼저 단이는 사람

馮虛 玄鎭健氏. 月灘 朴鍾和氏. 土月會朴勝喜氏. 東亞의 鞠琦烈氏 모다 배가 부르시어서 발보다 배가 압장을 서 가신다.

(‘萬華鏡’, ‘별건곤’ 1931년 3월호, 27쪽)

金一葉 女史의 佛門入    

延專敎授 李魯翊氏 林檎園 주요 시인인 林蘆月, 東亞日報, 鞠琦烈氏 等 세 분의 가정에 매담으로 순례하고, (…)

(‘金一葉 女史의 佛門入’, ‘삼천리’ 1933년 9월호, 21쪽)

 

 

新聞街散步

前東亞의 政治部長 鞠琪烈氏 11年만에 辭任하엿는데 退職慰勞金 2,000圓을 밧다.

(‘新聞街散步’, ‘삼천리’ 1934년 9월호, 77쪽)

總督府記者 座談會

出席人士 東亞日報…梁在厦 朝鮮日報…洪鍾仁 每日新報…金麟伊 朝鮮新聞…崔澍夏

12월 15일 京城金千代會館에서

기자 – 東亞日報는?

梁東亞 – 初創 시대인 大正 9년, 10년 경에는 李相協, 張德秀들도 다녔고 그 뒤로는 韓偉健, 崔元淳, 金東進, 鞠琪烈 등등이었지요, 金俊淵이도 한동안 다녔든 줄 기억하나 분명치 못해요.

(‘總督府記者 座談會’, ‘삼천리’ 1940년 3월호, 225쪽)

 

 

댓글 없음 »

No comments yet.

RSS feed for comments on this post. TrackBack URL

Leave a comment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