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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0. 2 취재1부장, 취재2부장, 취재1부장, 정경부장, 사회부장, 편집국부국장, 편집국장대리, 편집국장, 심의실장 상임정책위원 겸, 71.11 퇴사.”

(동아일보사사 2권, 인물록)

 


“▲1920년 6월 15일 咸北 會寧군 八乙면 元山리에서 출생 ▲77년 11월 17일 서울에서 별세 ▲42년 日本大學 전문부 졸업 ▲42년 10월 東京 同盟通信기자 ▲45년 7월 만주국 통신사 기자 ▲45년 12월 合同通信기자 ▲48년 韓國日報 정경부장 ▲50년 2월 東亞日報 취재부장 ▲59년 2월 동 정경부장 ▲60년 1월 동 사회부장 ▲60년 7월 동 편집국 부국장 ▲65년 5월 동 편집국장 대리 ▲66년 1월 동 편집국장 ▲69년 2월 동 심의실장 ▲71년 11월 동 퇴사 ▲73년 仁村紀念會 감사 

 

□ 少年時節부터 동경한 新聞記者

 

  변영권(邊永權)하면 잊을 수 없는 몇 가지가 생각난다.

  6.25 직후 서울이 공산군 수중에 빠져(6월 28일) 필자가 종로거리를 황황히 지나치고 있을 때 그와 마주쳐 “잘 숨어 살아남자”고 다짐하면서 악수를 나누던 일, 60년대 초 필자가 동아일보에 입사, 꼭 10년간 편집국에서 상사로 모시고 함께 일하던 일, 그리고 특이한 계기로 71년 11월 함께 동아일보를 물러나던 일, 그 얼마 후 충격을 받은 그가 쓰러져 끝내 생을 달리하던 일 등등.

  변영권의 고향은 회령(咸北 會寧군 八乙면 元山리), 한반도의 최북단 변방이었다. 조선조때 육진(六鎭)이 설치돼 방어거점이던 회령에서 그의 선조들은 12~·3대에 걸쳐 뿌리박고 살아온 원주(原州) 변씨의 후예로 그는 부유하게 살던 변홍석(邊洪錫)과 어머니 황(黃)씨 사이에 태어난 2남 3녀 중 차남이었다.

  그의 당숙 변성렬(邊成烈)은 일찍이 도쿄의 제3고교(三高)를 거쳐 동경제대(東京帝大) 영문과를 나온 수재로 언론계에 투신, 동맹통신(同盟通信) 영문부차장, 동경제대 교양학부 교수 등을 역임하기도 하여 변성렬이 고향에 오면 그 지역 군수, 경찰서장(日人)도 쩔쩔맬 정도로 남다른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어린 변영권은 그때부터 “기자가 돼야 하겠다”고 마음먹게 되었고 그래서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당숙을 따라 도일, 도쿄에서 중학을 나온다음 일본대학(日本大學) 전문부에 입학, 졸업하던 해(42년 10월) 동맹통신 대륙부(大陸部) 기자로 입사했다.

  그러나 제2차대전이 끝날 무렵 변영권은 동맹통신과 자매관계에 있던 만주국 통신사로 전근명령을 받아 임지(長春…당시는 新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일본군이 소련군에 패퇴하여 만주국통신사는 소련군에 접수돼버렸다.

  한국인 신분을 밝히고 겨우 억류를 면한 변영권은 소련군 화물차에 매달려 신의주(新義州)까지 올수 있었고 다시 함경선(咸鏡線)을 타고 고향에 닿았을 때는 겨울이 닥쳐오고 있었다.

( … )

□ 國民신문 거쳐 東亞日報로

 

  48년 2월 변영권은 잠깐 동아일보로 옮겨 역시 정당출입을 맡았으나 그해 9월 국민신문이 창간되자 정치부장으로 발탁돼 다시 한번 자리를 옮기게 된다.

  당시 국민신문(乙支路2街 大成빌딩이 사옥)은 문봉제(文鳳渧)가 사장, 장인갑(張仁甲 6.25때 납북)을 편집국장으로 ‘보도제일’ ‘공정불편’ ‘민권옹호’ ‘산업진흥’등을 사시(社是)로 내걸고 의욕적인 출발을 했다.

  건국이후 초대내각이 성립되자 국민신문은 ‘약체내각’이라고 비판했으며 당시 대통령특사로 유엔에 파견돼 있던 ‘조병옥(趙炳玉)박사 소환설’이 나돌자 그것을 기사화, 1면 톱에 실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한미 관계를 보도한 내용이 국시위반(國是違反)이라하여 정부는 편집국장과 정치부장을 구속하고 곧이어 신문까지 폐간시켜 버렸다.

  서대문감옥에 갇혔던 변영권이 풀려났을 때 국민신문은 이미 문을 닫은터라 그제서야 그는 일자리가 없어진 사실을 알았다.

  국민신문이 폐간된 이면에는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이 싫어하는 흥사단(興士團)계통이었기 때문이라는 소문도 떠돌았다.

  어쨌든 변영권은 한달쯤후에 국민신문의 후신임을 자처 거의 비슷한 사시를 내걸고 48년 12월 8일 발족한 한국일보(韓國日報· 사장 韓根祖, 편집국장 金聖柱)의 정경부장으로 입사했으나 경영난으로 49년 12월 11일 그 신문도 문을 닫았다.

  변영권은 다음해(50년 2월) 다시 동아일보에 취재제1부장으로 입사했으며 얼마후 6.25전쟁을 맞는다.

  공산군이 서울에 침입하기 하루전 날(6월 27일) 밤, 이미 다른 사원들은 모두 피신한터에 변영권은 동료사원들과 호외준비를 하고 있었다. 문선공이 모두 자취를 감춰 정인영(鄭仁永· 현 漢拏그룹회장)기자가 고학했을 때의 경험을 살려서 활자를 골랐고 공무국장(李彦鎭)이 조판, 손으로 힘겹게 편판을 돌려 겨우 3백여장의 호외(정부가 방송한 피난 가지 말라는 내용)를 찍어 광화문거리와 안국동로터리에 뿌렸다. 호외를 뿌리고 난 뒤 무교동 ‘실비옥’에 모여 이별의 술잔을 나눈 사원은 변영권을 비롯, 이언진, 정인영외에 장인갑(張仁甲) 이동욱(李東旭) 조인상(趙寅相) 김성열(金聖悅) 권오철(權五哲) 최경덕(崔慶德) 김준철(金俊喆) 김상흠(金相欽) 최흥조(崔興朝) 김호진(金浩鎭) 백광하(白光河) 김진섭(金鎭燮) 등 15명이었다.
 

 

□ 6.25때 拉北 九死一生

 

  이승만 대통령의 방송(녹음방송)만을 믿고 호외 발행에만 신경을 쓰던 변영권 등과 당시 서울시민 거의 대부분은 이미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되고 말았다.

  곧이어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소위 ‘의용군’에 끌어갈 청년들을 잡아 수용하는 장소(日新국민교 자리)로 변영권을 끌고 갔는데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낯익은 좌익 기자가 그를 알아복 ‘우익기자’로 고발, 사설유치장에 격리수용된 후 다시 국군과 미군포로를 수용하는 장소(舞鶴여고자리)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될 무렵 그는 그곳에 수용됐던 모든 사람들과 함께 강제북송대열에 끼어들게 되었다.

  변영권과 함께 끌려가던 2백~3백명중 상당수는 도중에서 총살, 또는 폭격통에 희생됐으나 “납북행렬이 함경도(永興에서 洪原으로 가는 고갯길)에 이르렀을 때 국군이 동해안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산속에 숨어 있던 반공청년들이 인민군과 총격전을 벌이는 틈을 타서 나는 용케 도망쳐 살아 남았다”고 변영권은 ‘나의 記者時節’에서 회상했다. 그가 흥원지구에서 걸어서 서울에 도착한 것은 50년 11월, 이미 10월 4일에 복간된 동아일보사에 닿았을 때는 바싹마른 거지꼴이었으나 그는 쉴틈도 없이 그길로 신문 제작을 거들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서울은 또 다시 1.4후퇴를 맞는다. 그때도 변영권은 김삼규(金三奎)편집국장 등과 함께 마지막까지 동아일보를 지킨 사원중의 한사람이 된다.

  임시수도(釜山)에서 민주신보 시설을 빌어 동아일보가 속간된 것은 51년 1월 10일쯤,  “피난 사원과 함께 민주신보 한구석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52년 토정동 2가에 임시사옥이 설때까지 타블로이드 2면 지면을 만들기 위해 동료 사원들과 함께 뒤었고 동아일보를 들고 가판까지 나서야할 만큼 어려운 시기였으나 결코 힘겹게 느낀적은 없었다”고 그는 늘 회고했었다.

  환도이후 변영권은 53년12월에 취재 제2부장, 55년 4월에 취재 제1부장, 59년 2월에 정경부장, 60년 1월에는 사회부장, 그해 7월에는 편집부국장, 65년 5월에 국장대리, 66년 1월 1일자로 드디어 편집국장으로 3년 남짓, 동아일보 제작의 사령탑에 앉았다가 69년 2월에 심의실장, 그해 3월에 상임정책위원을 겸임했으나 71년 11월 15일 그는 20여년동안 정든 동아일보를 떠나야 했다.

 

□ 4.19와 5.16, 激動期를 東亞에서

 

  그는 자신의 생애 중 가장 보람있었던 무렵으로 4.19때(사회부장)를 꼽았다. “그때 처음 취재차량에 라디오카를 달아 편집국에 앉아서도 기자들의 움직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고 입체감있게 취재할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호외를 찍어 동아일보 옥상에서, 또 신문사 비행기에 실어 공중에서 환호하는 데모군중위에 뿌리던일, 그리하여 서울하늘에 동아일보의 호외가 꽃잎같이 휘날리던 일, 그때가 기자생활 중 가장 보람찬 순간이었다”고 생전에 그는 되풀이 회상하기도 했다.

  5.16쿠데타이후 편집국장 자리를 지키던 변영권은 수시로 정보기관에 불려 다니고 온갖 협박도 당한 끝에 급기야는 자택에 폭탄테러(65년 9월 9일 普門동 7가 그의 집 대문을 다이나마이트로 폭파, 집이 대파된 사건, 범인 색출 안됐음)까지 당하기도 했다.

 ( … )

  여기서 60년대 초기 동아일보 편집국 간부들의 별명에 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변영권은 ‘곰’ 편집국장은 ‘코끼리’ 그밖에 국장급은 ‘너구리’ ‘여우’ ‘오토세이’등 동물이름의 별명이 붙었고 필자는 ‘토끼’ 그밖에 ‘메기’도 있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용모 성격 등이 많이 참작된 별명으로 어느 부분 어울리는 점이 있어 지금 생각해도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일과 맞붙었을 때 뒤를 돌아보지 않고 밀어 붙이는 ‘곰’같은 성격, 무뚝뚝하나 술도 잘하고 어딘가 친근감이 가는 선(線)이 굵은 ‘함경도 사나이’…언제나 솔직하고 가식을 모르던 변영권이 국장석에 앉아 ‘물끄러미 바라보서 미소짓던 얼굴’은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이혜복 대한언론인회 회장, 少年時節부터 동경한 新聞記者, 한국언론인물사화-8.15전후, 1992)

 

 

변  영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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