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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편집국장 설의식(薛義植)

Posted by 신이 On 6월 - 1 - 2016

  소오 설의식(小梧 薛義植)은 1922년 5월 3일 동아일보 기자가 됐습니다.   

 

  “동아일보가 화동에 있을 때다. 필자는 그때 사회부장으로서 데스크를 보고 있었으므로 한창 기사를 정리 중에 당시 사장이던 고하 송진우 씨가 키가 작달막하고 모시 두루마기를 입은 청년 한사람을 데리고 와서 이 사람이 이번에 입사하여 사회부에서 일하게 된 설의식 군이라고 소개했다. 내가 누구인지 몰라서 가볍게 지나가는 인사를 하자 송진우 씨는 다시 ‘설태희(薛泰熙) 씨 자제야’ 하면서 주의를 끌었다. 그제야 나는 그 청년을 다시 보게 되었다. 설태희는 왕조 한국 말년에 유명한 지사다.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유명한 지사 이준과 함께 관북학회를 조직했고 그 후 안창호와 함께 서북학회의 중진으로 지금의 건국대학 전신인 서북학교 창설의 공로자였다. 그는 그밖에도 구한말 선각자로서 우뚝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창간기자 유광렬, ‘한국의 기자상(記者像)’, 기자협회보 1968년 4월호, 2면)    

 

  소오가 동아일보에 입사해 처음한 일은 정치, 경제 등 외신기사 번역. 설의식은 ‘…이라더라’ 식의 남의 글만 만지고 있기는 20대의 젊은 감정에 너무 답답하였다고 했습니다.

  그 후 그가 직접 쓴 첫 글은 ‘호남홍조(湖南鴻爪)’. 부여, 논산 등 백제의 옛 유적을 돌아보고 쓴 기행문입니다.(신문 연재 당시 제목은 ‘鴻爪’)

 

 

1922년 11월 2일자 1면

홍조(鴻爪) (1)

괴롭던 여름도 벌써 지루한 기억에서 사라진지 오래였습니다. “일엽주(一葉舟) 배를 저어 청강(淸江)에 구슬 캐니…”라는 분외(分外)의 망상으로 “금년 여름에는 꼭!”하던 설계도 어느 틈에 공중누각이 되고 말았습니다.…(중략)…흥미는 여하튼지, 책임과 의무로 나날이 계속하는 바쁜 생애에 때로 병마의 고(苦)가 당상(堂上)의 우(憂)를 더하고 날로 본의 아닌 불충실이 선미(善美)를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녹음의 양미(凉味)는 너무나 분외(分外)거니와 기분의 휴양이나마 얻었으면, 하는 생각이 끊일새 없었습니다. “신색(身色)이 좋지 못합니다” 하시는 한기악 씨의 다정한 말소리와 “몇날동안 휴양하라”는 편집국장 이상협의 가벼운 허락을 받은 뒤로는 없던 기운이 나는듯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청강(淸江)의 구슬’은 어찌하였던지, 황산(黃山)의 옛 자취나 찾으리라고 얼른 작정하였습니다. 반쯤 흐린 10월 18일 아침. 부여로 가는 길이외다. 돌아다보니 지금부터 5년 전. ‘낙화암 꽃 이운 때, 반월성 가는 그대’라던 모 씨의 수편시(數篇詩)가 어린 가슴에 적지 않은 호기심을 일으키었습니다.…(중략)…대합실이외다. 차 시간은 한 10분 남았습니다. 공연히 이르게 온 것도 심술이 나는데 기다릴 일이 더욱 심술이 납니다. 그래도 제손으로 좌우치 못할 바에는 기다리는 것 밖에는 별 수가 없습니다. 장내는 온통 떠들썩 합니다. 칼자루 소리, 지팡이 소리, 구두소리, 나막신 소리, 외치는 소리, 말다툼소리…이 모든 소리가 한데 섞여서 알아들을 수 없는 일종의 악곡(樂曲)이 벌어집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지라 이야말로 신비곡(神秘曲)의 합창이외다.(하략)

 

 

1922년 11월 7일자 1면

홍조(鴻爪) (4)

(전략) 기차는 목적지를 향하고 또 달음박질을 시작합니다. 어디로 보든지 말숙한 수원의 공기는 티끌 하나 없는 듯 합니다. 지난번 대홍수로 누백년 풍상 역력한 노구(老軀)를 잔혹한 수중에 던진 화홍문(華虹門)의 잔해는 이금(而今)에 안재(安在)한지? 항미정(抗眉亭)의 청람(淸嵐)과 서호(西湖)의 풍광은 응당 시인묵객의 금수심장(錦繡心腸)을 짜내었으리다마는 ‘화중(畵中)의 병(餠)’으로 슬쩍 지나치는 나에게는 별반 감흥을 주지 아니합니다. 애오라지 화산(華山)의 우거진 삼림(森林)에 아롱진 햇발만 흐릿한 인상을 주었을 뿐이외다. 오막살이의 왜옥(矮屋)이 제멋대로 버려져 있음도 볼만하거니와 추수에 배바쁜 흰바지, 누른 소도 진박(眞朴)한 농촌의 활화(活畵)로 보려면 볼 수 있습니다.…(중략)…경기 충청의 경계점인 평택에 왔음이외다. 삼천리 금수강산에 침을 삼키면서 무수한 생명을 도륙한 일청(日淸)전쟁의 일부가 아산을 중심으로 평택 부근에서 연출된 낡은 일을 생각하여 봅니다. 그리고 그 참극 가운데서 허물없는 생민(生民)이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던 가련한 꼴들을 눈앞에 그려 봅니다. ‘남이야 무엇을 생각하든지 내 갈길이나 간다’는 듯이 차는 슬며시 움직입니다.(하략)

 

 

1922년 11월 9일자 1면

홍조(鴻爪) (5)

(전략) 미호천(美湖川)의 청류(淸流)에 한가한 가벼운 돗대가 선뜻 보이자, 차가 머무르니 이른바 ‘최치원(崔致遠)’이란 이름이 와전되었다는 ‘조치원(鳥致院)’이외다. 어찌하였던지 이곳이 옛날 최치원의 채읍(采邑)이었던 것은 사상(史上)의 사실이외다. 충청남북도와 전라남북도에 통하는, 그야말로 사통오달(四通五達)의 요충이외다. 예로부터 농산물의 집산지로 유명하거니와 지금도 7대 시장의 하나라 합니다. 그러나 전 인구 4천 5백 중에 근 삼할의 비(比) (1천 2백여 명)를 가진 일인이 있음을 생각하고는 없던 한숨이 저절로 나옵니다.

 

 

1922년 11월 12일자 1면

홍조(鴻爪) (6)

(전략) 처음 오는 공주에 더구나 아는 사람도 없고 해서 어슬렁 어슬렁 찾은 곳은 지국(支局)이외다. 시가 입구의 넓은 길 양편에는 ‘사꾸라’ 나무가 열을 지었습니다. 봄새 한동안은 실로 ‘화(花)의 공주’였을 것이외다. ‘대화혼(大和魂)’의 여백이 간데 족족 냄새를 피웁니다. 10여 년 노력으로 의식(意識)없는 길같은 것을 훌륭하게도 ‘대화식(大和式)’을 만들었습니다. 이골목 저골목 방황하면서 그야말로 ‘대화정(大和町)’ 부근까지 가니까 열서너살 먹어 보이는 우리 동무가 일본말로 응대합니다. “도아닛보샤데스까” 하기에 나도 덩달아 “소오”하고 생각하니 나도 일본말을 하였더이다.…(중략)…지국원 제씨와 인사를 필(畢)한 뒤에 화두는 신문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곳이 구도(舊都)라, 담화는 때로 고금(古今)에 상하(上下)하고 동서(東西)로 어지럽게 달립니다. 공주의 인구는 7천 4백여 명, 그 중 일인이 1천 5백여 명이라 합니다. 보통으로 보아 주업은 농업인데 특산물이라고 별로 따질만한 것은 없다 합니다. 그렇게 큰 부자가 없는 동시에 그렇게 적빈자(赤貧者)도 별로 없답니다. 크지도 못한 이곳에 요리점, 색주가가 누백(累百)이라 함을 보아 생산보다 소비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가 싶습니다. 청년회 등 수양단체가 근년부터 갑자기 울흥(蔚興)한다 함은 감하할 일이외다. 

 

 

  이듬해인 1923년에는 인터뷰 기자로 나섰습니다. 당시에는 ‘탐방기자’라고 불렀고 인터뷰 내용을 문답체로 하지 않고 상대방의 말을 탐방기자가 이어서 받아쓰는 형식이었습니다.  

 

 

1923년 1월 5일자 3면

조선과 조선인의 번민 4
생장(生長)과 건설의 번민
살고자하나 살 길이 없고
악수하며 뺨을 치는 비극
중앙고보 교장 현상윤 씨 담(談)

 조선과 조선인의 번민에 대하여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 현상윤 씨는 말하되 “날이 가고 달이 옴을 따라 모든 사물이 바뀌고 갈리고 합니다. 살려고 애쓰는 사람은 이 사이에 있어서 낡은 것을 고치고 새 것을 마련하느라고 한없는 애를 씁니다. 이렇게 애써 깨닫고 얻은 바가 살림에 알맞고 맘에 만족하면 비로소 웃음이 솟고 즐김이 생깁니다. 그러나 불행하게 뼈가 닳도록 애써도 애쓴 보람이 없고, 피가 마르게 생각하여도 생각한 값이 없게 되면, 이에 가진 고통과 많은 번민으로 마침내 뜻아닌 설움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한서(寒暑)가 바뀔 때에 병이 더욱 생기는 것처럼, 신구(新舊)가 갈릴 때에 번민과 고통이 더한층 심하여 집니다. 낡은 것은 썩었다 하여서 버립니다. 그러나 새 것이 없으니 번민이외다. 지내온 방식은 틀렸다 하여 끊어 버립니다. 그러나 새로운 것이 보이지 아니하니 고통이외다. 이것이 방금 일반 우리가 느끼어가는 과도기의 번민이외다.(하략)” 하더라.

 

 

1923년 1월 9일자 3면

조선과 조선인의 번민 8
영적빈핍(靈的貧乏)으로 고통
번민과 고통은 밖에서 오는 것
정신활동으로 번민을 제하자
한용운 씨 담(談)

조선과 조선인의 번민에 대하여 조선불교법보회 한용운 씨는 말하되 “먼저 고통과 번민에 대한 관념부터 말씀하겠습니다. 우리가 보통 받는 고통으로 말하면 두가지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첫째 정신상으로 받는 고통과 둘째 물질상으로 받는 고통이외다. 모든 고통은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것이니 이것을 받은 때에 받아서 느낀 때에 비로소 고통이 생기는 것이외다. 만일 그 고통을 받지 않고 느끼지 아니하면 고통이란 없을 것이외다. 다시 말하면 고통을 고통으로 알고, 고통을 고통으로 느끼는 그 느낌이 고통이외다. 들어오는 고통을 받지 않고 느끼지 말고 스스로 나아가 기쁘게 즐겁게 영적활동으로 나아가면 고통이란 없을 것이외다. 이렇게 말하면 어떠한 분은 현실세계를 부인한 모순의 말이라 할 것이외다. 우리가 아무리 고통을 느끼지 아니한다 하더라도 밖으로 들어오는 고통 그것은 다름없이 있을 것이 아니냐고 할 것이외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좀 넓어집니다. 하나 이것이 결코 현실세계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외다. 다만 그 고통이 생기는 까닭이 고통을 느끼는데 있으므로써 만일 이 고통을 느끼면서 밖으로 그 고통 주는 바를 쳐버린다든지 또는 그 고통을 없이할 만족을 요구한다든지 할진대 아마 그 고통은 용이하게 없어지지 아니하리다. 더욱 고통은 고통을 더할 것이외다. 옷이 없어서 고통이외다. 밥이 없어서 고통이외다. 자유를 잃어서 고통이라 합니다. 그래서 밥을 구하며 옷을 주기를 기다립니다. 자유를 빼앗은 자를 원망합니다. 고통을 주는 모든 것에 대하여 반항도 하고 애원도 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을 주는 고통 그것이 또한 저(彼)라는 자리에 있어서, 나(我)에게 요구합니다. 나와 같이 겨릅니다. 이렇게 되고도 고통이 없어질 수 있습니까? 이렇게 되고도 번민치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현재 우리 조선이 조선사람이 정신상으로나 물질상으로나 무한한 고통을 받음은 사실이외다. 남다른 설움과 고통으로 울고 불고하는 터이외다. 밥이 넉넉지 못하고 옷이 헐벗어 목숨을 부지하기에 갖은 고통이 일어납니다. 자유가 없으니까 눈이 있으나 입이 있으나 없으나 다름이 없습니다. 손이 날래고 발이 튼튼하다 하더라도 아무 보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통을 느끼어 갑니다. 그러나 이 고통을 물리치려고 없이하려는 태도로 수단을 부리고 길을 취한다 하면 고통은 점점 더할 것이외다. 근본적으로 이 고통의 ‘탈’가운데서 뛰어나와 쾌락하게 평화롭게 영적활동을 계속하여가면 고통은 자연히 없어질 것이외다. 고통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지 못할 것이외다.” 하더라.

 

 

1923년 2월 18일자 3면

토산(土産)운동은 여하(如何)히 지속할까 1
장려회 간부로서 사회에
사회유지로서 장려회에

토산장려운동은 바야흐로 실행에 들어가려 한다. 그러나 한사람이나 두사람이 한해나 두해동안 떠든다고 이와 같이 큰 운동이 성취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 중대한 자활운동을 어찌하면 성취하고 끝끝내 본뜻대로 실행할까. 이에 본사에서는 물산장려회 간부의 의사와 일반 사회 유지의 의사를 들어 사회에 소개하는 것도 한가지의 자극이 될 줄로 생각한다.

민중사업
일반이 다같이 꾸준히 합시다
장려회 유성준(兪星濬)

이 문제에 대하여 물산장려회의 이사장 유성준 씨는 말하되 “물론이외다. 우리가 다같이 잘살 때까지 끈기있게 계속하지 아니하여서는 안될 것이외다. 그리하여 우리가 지금 취하는바 소극적 운동이 장차 적극적으로 발전되어 우리의 경제상태가 세계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어야 할 것이외다. 이 운동에 대하여 우리들은 있는 힘과 가진 정성을 다하려 합니다. 일반 인사들이 가르쳐 주시는대로, 인도하여 주시는대로 끝까지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전조선 민중의 운동이므로 이 운동을 우리 간부 몇사람의 약한 손에만 맡겨서는 큰일납니다. 백년이나 천년이나 계속할 운동을 17이 넘지 못하는 우리 간부들에게만 부탁하여서는 운동의 생명이 길지 못하게 될 것이외다. 이런 의미에 있어 일반 민중은 다 각기 우리 회(會)의 간부로 생각하여야 할 것이외다. 그리하여 우리의 아들과 딸이 또한 간부의 책임을 계승할 의무와 권리를 깨달아 10대, 100대를 계속하여야 할 것이외다.(하략)” 하더라.

 

 

  1923년 4월, 포항 영일만에 연 3일 폭풍우가 쏟아져 행방불명된 사람이 1천여 명, 어선 360여 척이 파괴되는 참사가 일어났을 때 설의식은 그 현장으로 갔습니다.

 

 

1923년 4월 19일자 3면

풍화(風禍)의 영일만을 방(訪)하여

전에 없던 대폭풍우로 포항 일원에 일대 참사가 일어난 뒤로 그곳 동포의 안위(安危)가 어떠한가? 한낱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목전에 닥치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미친 바람과 험악한 바다로 더불어 싸우던 동포의 안위가 어떠하며 아울러 참해를 당한 그들에게 동정의 열루를 금하지 못하는 동아일보사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나선 나(특파원)는 오늘 새벽 이 곳에 도착하여 먼저 이곳에서 알아볼 수 있는 데까지 알아본 사실을 종합하여 한시가 바쁘게 자세한 소식을 기다리는 일반 독자에게 알려드리고자 한다. 물론 이미 보도한 사실은 또다시 쓸 필요가 없으나 이미 보도한 바가 사실과 다른 것도 있고 또는 자세치 못한 점도 있음으로 지나간 사실이나마 개괄하여 다시 한번 보도하는 터이다.【17일 대구에서 특파원】

경파(鯨波)에 피탄(被呑)한 포항
밤낮 사흘동안의 대참극
360척 어선의 위경

행위불명
근(近) 천 명
시체 60 발견
중경상자 140명
구호된 자는 약 300명

 

 

  1925년 봄, 설의식은 사회부장이 됐습니다. 우리의 정치, 경제가 우리의 손에서 벗어나 일제의 뜻대로 행해지던 시절, 사회부는 신문의 활기를 불어넣는 편집국의 중심이었습니다. 책상의 배치부터 편집국장, 사회부장 순이었습니다.

  사회부장 설의식은 ‘망중한인(忙中閑人)’이란 필명으로 사회만평을 써서 큰 인기를 모았습니다. 일제하 조선의 지식인들이 가졌던 비애, 착잡한 심정을 시니컬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926년 7월 4일자 2면

보는 대로 듣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망중한인(忙中閑人)

첫 인사말씀
날마다 지면에 나타나는 신문기사는 대체로 보도, 소개, 해설, 비판 네 가지 범위를 벗어나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하라더라’나 ‘하얏다고’ 등 꼬리를 붙이는 객관적 보도 소개가 원래 신문기사의 주요한 부분이지마는 지도주의(指導主義)를 가져야 할 조선에 있어서는 세상의 모든 현상에 대하여 시비의 해설과 흑백의 비판이 또한 없지 못할 필수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문에는 ‘이라더라’의 싱겁고 차디찬 보도, 소개 이외에 우렁찬 사설을 가지고 악마의 대가리를 때리기도 하고 정의의 기운을 떠받치기도 하며 ‘두루뭉실’의 오장(五臟)을 해부하여 썩은 곳과 성한 곳을 가리어 놓는 이외에 뜨끔한 횡설수설(橫設竪設)로써 염통을 푹푹 찌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한 지방 한 지방에 대하여는 지방논단과 지방단평이 있으며 독자에게는 파사(破邪)의 칼 같은 자유종(自由鐘)을 개방하였으니 이것이 다 같은 종류의 기사입니다. 그러나 사설이니 횡설수설 같은 종류는 필치가 너무 정중하고 안목이 너무 원대하며, 재료의 취택(取擇)이 너무 엄정하고 보는 독자가 보편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정중할 데 정중하고 호방할 데 호방하며 원대하기도 하고 비근(卑近)하기도 하고, 이런 것도 저런 것도 자유자재한 필치와 안목과 취택으로 많은 독자에게 보일 기사가 필요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보도나 소개 같은 것도 원래 ‘기사’라 여러가지 조건이 붙어야 하는 까닭에 길거리에 가득한 사실도 기사로 쓰지 못하고 책상 위에 수두룩한 재료도 기사로 만들어지지 않으며 귀에 들리는 소리, 눈에 보이는 꼴들이 그저 없어지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이것을 어떻게 하면 기사로써 독자에게 제공할까? 하고 생각한 것이 이 ‘보는 대로 듣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라는 특수한 기사를 마련하여 보는 것입니다. 내용이 무엇인가는 지면으로 알려지려니와 채택하는 범위는 크든지 작든지 제목과 같은 범위로 비평도, 해설도, 보도도, 소개도 무엇이나간에 붓으로 그릴 수 있는 것이면 다 수용하되, 글쓰는 태도와 문체는 정중하기보다도 건들건들하게 점잖게보다도 트집스럽게, 텁텁하기보다는 선들선들하게 하려고 합니다. 뜻대로 해보아서 뜻대로 안 되는 것은 붓대의 재주가 부족한 탓이고 ‘망중한자(忙中閑者)’의 허물은 아니니 독자는 미리 알아두소서. 첫 인사가 길었소이다. 

 

 

1926년 7월 5일자 2면

휘루참마속(揮淚斬馬謖)

이야기는 퀴퀴하지마는 옛날 한(漢)나라 삼국 때에 제갈량이란 사람이 군율을 어긴 막하(幕下) 참모(參謀), 마속(馬謖)의 목을 칼로 자르면서 눈물을 흘린 일이 있었다. 제갈량의 울던 이유가 어디에 있던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법에 의하여 목을 자르되, 목을 자르며 우는 정경’은 참으로 기막힐 정경일 것이다. ‘6.10만세’가 생긴 이후로 관계 학생의 처치에 대하여 총독부 당국에서는 각 학교에 처벌하기를 명령하였다. 그래서 위선 배재고보에 8명의 희생자가 나고 뒤를 이어 각 학교에 피같은 비극이 일어날 것이다. 처벌의 시비곡직(是非曲直)은 차치하고 수 년 동안 자기 손으로 기르고 가르치던 장래 많은 자기의 제자를 자기 손으로 내어쫓을 때에, 그 선생의 가슴이 과연 어떠하였을꼬! 고개를 숙이고 교문을 나서는 제자의 머리 위에 떨어지지 아니치 못할 선생들의 암누(暗淚)를 우리는 잘 안다. 그리고 그 심정에 제갈량 이상의 빛 다른 비애가 숨어있는 것도 우리는 잘 안다.

 

 

1926년 7월 13일자 2면

종로경찰서사(史)

경성부 내 다섯 군데의 경찰서 중에서 조선경찰로서 가장 중요하고, 조선경찰로서 가장 말썽많고, 조선경찰로서 가장 사건이 많은 종로서에서는 종로서사란 역사를 편찬하려고 방금 재료를 수집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종로경찰서는 실로 피와 눈물의 광영을 품은 혁혁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문구로써 일본신문은 벌써부터 선전하고 일본통신은 연해 연방 보도를 한다. ‘종로경찰서는 피와 눈물의 역사’라고 찬양한 일본 신문의 태도와 의사가 어떠한지는 알기가 어렵거니와 우리도 종로경찰서의 내력이 피와 눈물이라고 단정하기에 조금도 주저치 않는다. 직접 민중과 관계된 경찰서가―체포하고 취조하는 경찰서가 눈물의 역사를 가졌다 하면 그 경찰서를 중심으로 한 민중도 눈물의 역사를 가졌을 터이며, 그 경찰서가 피의 내력을 가졌다 하면 그 경찰서를 중심으로 한 민중의 활동도 피의 역사를 가졌음으로써다. 하물며 종로경찰서가 광영으로 생각하는 피와 눈물의 역사가 직접 민중으로부터 우러나온 재료임이랴?(하략) 

 

 

  1926년 8월 11일자 3면에 쓴 ‘헐려 짓는 광화문’은 일제에 의해 헐리는 광화문을 보며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과 억울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필자명 ‘小木吾子’는 그가 자신의 아호 ‘소오(小梧)’의 한자 획수를 풀어 지은 것입니다.

 

 

1926년 8월 11일자 3면

헐려짓는 광화문
소목오자(小木吾子)

헐린다 헐린다 하던 광화문은 마침내 헐리기 시작한다. 총독부 청사 까닭으로 헐리고 총독부 정책 덕택으로 다시 짓게 된다.
원래 광화문은 물건이다. 울 줄도 알고 웃을 줄도 알며 노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아는 ‘사람’이 아니다. 밟히면 꾸물거리고 죽이면 소리치는 생물이 아니라 돌과 나무로 만들어진 건물이다.
의식 없는 물건이오, 말 못하는 건물이라 헐고 부수고 끌고 옮기고 하되 반항도 회피도 기뻐도 설어도 아니한다. 다못 조선의 하늘과 조선의 땅을 같이한 조선의 백성들이 그를 위하여 아까워하고 못 잊어할 뿐이다. 5백 년 동안 풍우를 같이 겪은 조선의 자손들이 그를 위하여 울어도 보고 설어도 할 뿐이다.
석공의 마치가 네 가슴을 두드릴 때, 너는 알음이 없으리라마는 뚜닥닥 하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가슴을 아파한다. 역군(役軍)의 둔장이 네 허리를 들출 때, 너는 괴롬이 없으리라마는 우지끈하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허리질려할 것을 네가 과연 아느냐 모르느냐?
팔도강산의 석재와 목재와 인재의 정수(精粹)를 뽑아 지은 광화문아! 돌덩이 하나 옮기기에 억만 방울의 피가 흘렀고, 기왓장 한 개 덮기에 억만 줄기의 눈물이 흘렀던 광화문아! 청태(靑苔) 끼인 돌 틈에 이 흔적이 남아 있고 풍우 맞은 기둥에 그 자취가 어렸다 할진대, 너는 옛 모양 그대로 있어야 네 생명이 있으며 너는 그 신세 그대로 무너져야 네 일생을 마친 것이다.(중략)
서로 보지도 못한 지가 벌써 수 년이나 된 경복궁 옛 대궐에는 장림(長霖)에 남은 궂은 비가 오락가락한다. 광화문 지붕에서 뚝딱하는 마치 소리는 장안을 걷치어 북악에 부딪친다. 남산에도 부딪친다. 그리고 애달파하는 백의인(白衣人)의 가슴에도 부딪친다.…

 

 

  1925년~1936년 사이 동아일보에 난 사고(社告) 대부분도 소오가 작성했습니다. 긴 글은 아니지만 당시 사회의 한 단면을 알 수 있습니다. 

 

 

1925년 5월 1일자 호외 1면

소년동아일보 임시특별호 부록
잘살려면 어린이를 위하라
새조선의 일꾼은 어린이
축 어린이날 기념

이날은 5월 1일이니 어린이들의 새로운 명절이외다. 이날은 우리 어린이들의 장래를 위하여 걱정을 하고 근심을 하는 여러 어른들이 크나큰 뜻을 가지고 어린이를 위하여 마련하여 놓은 명절이니 재작년부터 시작하여 전조선에서 해마다 기념하여 오는 즐거운 날이외다. 아직까지 귀중한 어린이를 위하여 즐거운 놀이를 지어주지 못하고 반가운 때를 마련하여 놓지 못한 우리나라의 어린이들을 위하여서는 둘도 없는 크나큰 명절이외다. 이 명절을 어떻게 지내게 할꼬? 하는 정성으로 어린이를 지도하려는 어른들은 벌써 전부터 이날의 모든 준비를 위하여 애써온 결과, 이제 이르러 만반의 준비는 다 되고 또는 조선 전체의 연락도 원만하게 되어 오늘의 조선 천지는 그야말로 어린이 세상이 될 것이올시다. 부내를 중심으로 이날의 기념에 대한 소식을 보도하여 즐거운 날을 같이 하려 합니다.
소년동아일보 일기자(一記者)

 

 

1925년 12월 31일자 2면

사회면 특별계속기사
신년(新年) 제1일부터 양면으로 시작

10년을 하루같이
◇10년을 하루같이―말하기는 쉬워도 10년이란 시간의 길위에서 7전8기하는 인생 생활의 자취를 살펴본다 하면 진실로 끔찍할 것이외다. 아무려한 보람도 없고 이렇다할 거둠도 없이 보내는 세월도 한해 두해…10년이라는 마루에 서서 돌아다본다 하면 개인이나 사회의 변천이 놀라울 것이외다. 이에 을축(乙丑)의 한해를 보내고 병인(丙寅)의 또 한해를 밟게됨을 당하여 현재 한가지 직업과 한가지 생활로써 10년 이상을 하루같이 지내어오는 분들의 과거를 들어서 세상과 싸워온 노력의 자취와 아울러 그들을 통하여 재현되는 과거의 사회를 소개코자 하는 것입니다.(하략)

문패의 내력담
◇30여 만 생명이 활동하고 6만여 호 가옥이 착잡(錯雜)한 부내(府內)의 거리 거리와 골목 골목에는 가로 세로 크고 작은 문패가 수없이 눈에 뜨입니다. 길쭉한 놈, 넓다란 놈, 모난 놈에, 붉은 놈에, 사기 문패, 나무 문패, 화강석제, 양철판제 등 바탕도 각각이며 모양도 종종(種種)이니 따라서 문패의 주인공도 가지가지외다. 민모(閔某), 이모(李某), 김모(金某), 박모(朴某) 등 개인도 있고 모모회(某某會), 모모단(某某團) 등 각종 단체와 무슨 회사, 무슨 조합, 어떤 공장, 어떤 학교 등 여러가지 구별의 빛다른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같이 빛다른 내용에 열이면 열, 백이면 백이 모두 딴 살림의 딴 세계를 꾸미고 있으니 그 경로와 현상이 과연 어떠한지, 진실로 흥미도 흥미려니와, 거죽으로만 보고 지나는 그 문패의 내력을 들어 희망의 새해를 맞는 독자에게 알려드림도 쓸데없는 헛수고는 아닐 것으로 믿습니다.(하략)

 

 

  소오는 31년 창간된 월간지 ‘신동아’의 창간 멤버이기도 했습니다. 잡지를 제작 총괄했던 그는 단평란인 ‘정시사시(正視斜視)’를 통해 매월 시사문제를 알기 쉽게 논평, 해설하고 각종 칼럼을 집필해 독자들의 애독 대상이 되었습니다. 

 

 

신동아 1931년 11월호 17쪽

정시사시(正視斜視)
신문보도를 중심으로
忙中閑人

천체(天體)는 움직인다. 세월은 흐른다. 만물이 유전(流轉)하고 제상(諸相)이 변화한다. 시공이 한가지로 동(動)할때, 세태는 어떠튼고? 인사(人事)는 어떠튼고? 제(題)하여 가로되 ‘정시사시(正視斜視)’, 신문을 통하여 표리(表裡)를 일별(一瞥)하자.
생활난으로 퇴학한 보교(普校) 아동이 작년 1년간 전 조선에 8만여 명. 그래도 재적(在籍)이 ‘우세’라니 아직은 천행(千幸)인가?
농업부채가 5억원이라, 경지(耕地)가격의 6할이 차금(借金). 이 빚을 갚으려면 자자손손이 유언(遺言)을 해야할 판.
원산서는 백주강도가 마약을 사용하여 부녀의 금품을 강탈, 밀양서는 어떤 가주(家主)가 집을 비우라고 실내에 극약을 살포, 약품용도에 일신기원(一新紀元).(하략)

 

 

신동아 1932년 1월호 19쪽

불음도천지수(不飮盜泉之水)

‘군자는 불음도천지수’―갈증으로 죽을지언정 ‘도천(盜泉)’의 물은 마시지 않는다는 말이다. 대개 그 이름이 나쁜 까닭이니 이른바 명분사상의 편린이다. 어지러운 세상이 더럽다 하여 수양산 산곡 속에서 천명을 마친 백이(伯夷) 숙제(叔齋)를 결백의 표상으로 삼거니와 우리의 사육신 중의 매죽헌(梅竹軒)은 이것도 나무랬었다. ‘초목역첨주우로(草木亦沾周雨露), 괴군유식수양미(愧君猶食首陽薇)’라고 고사리를 캐어먹은 것도 논죄하였다. 결백도 이에 이르면 동서사상에 그 예가 드물 것이다.
이것이 현대인으로 가능한 일일까? 현대생활에 가합(可合)한 일일까? 기성(旣成)의 논리와 형식이 붕괴의 도정을 밟고 있는 지금에 있어서 이같은 관념으로 빚어낸 모든 덕목과 모든 제도의 존재가 가능할 것인가?
현대는 과학으로써 존재하고 과학은 객관으로써 생명을 삼는다. 도천(盜泉)이라는 이름의 ‘나쁨’과 ‘샘물’의 질과는 하등의 관련이 없다. 주나라 정권의 ‘더러움’과 ‘고사리’ 사이에는 아무러한 인과도 없다. 현대의 과학은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친다. 객관 위에서 엄숙한 판단을 내리는 현대의 과학은 우리의 생활의식과 양식을 이렇게 규정한다.(하략)

 

 

  1940년 8월 일장기말소사건 당시 편집국장이었던 설의식은 일제에 의해 강제해직됐습니다. 해방 후 그는 다시 동아일보로 돌아와 1945년 12월 1일자 중간사(重刊辭) ‘주지(主旨)를 선명(宣明)함’을 썼습니다.

 

 

1945년 12월 1일자 1면

중간사(重刊辭)
주지(主旨)를 선명(宣明)함

천도(天道) 무심치 않아 이 강토에 해방의 서기(瑞氣)를 베푸시고 성조(聖祖)의 신의(神意) 무궁(神意無窮)하시어 이 천민에게 자유의 활력을 다시 주시니 이는 오로지 국사(國事)에 순절(殉節)한 선열의 공덕을 기특타 하심이오, 동아에 빛난 십자군의 무훈을 기특타 하심이라. 세계사적 변국(變局)의 필연적 일면이라 한들 하등의 감격이며 이 하등의 호복(鴻福)인가?(하략)

 

 

  1947년 런던 올림픽 마라톤 제패를 기념해 본사에서는 마라톤 ‘제패가’를 공모했으나 응모작품 가운데 당선작이 없자 설의식이 ‘제패가’를 작사했습니다.

 

 

1947년 6월 28일자 2면

본사현상(本社懸賞)
씩씩하고 장엄한 철각(鐵脚)의 노래

본사가 현상모집한 마라톤 제패가는 마땅한 작품이 없어 가람 이병기 씨의 환영가와 소오 설의식 씨의 제패가가 탈고되어 그중 제패가는 이화여자대학 음악과에 작곡을 위촉한 바 동과 교수 이유선 씨의 작곡도 완료되어 인쇄에 부치었는데 이 곡은 가장 씩씩하고도 장엄하여 15년 전 권(權, 권태하), 김(金, 김은배) 두 선배의 주춧돌 위에 손(孫, 손기정), 남(南, 남승룡) 두 선수가 한층 탑을 쌓았고 이번 서(서윤복) 선수의 빛나는 제패도 마라톤 왕국의 관록을 온 천하에 떨친 이 감격과 자부심을 그대로 살리어 멜로디도 우렁차게 삼천리 방방곡곡에 울려질 것을 확신한다.

마라톤 제패가
설의식 작사
이유선 작곡

1. 이 나라 아들의 줄기찬 얼과 힘
세계를 흔들어 날리는 태극기
(후렴)
북을 울려라 빛나는 승리
드높은 이 나라 마라톤 나라
2. 오색에 타오를 우리의 그 횃불
온누리 빛내리 다시금 밝으리
(후렴)
북을 울려라 우뚝한 자랑
드높은 이 나라 마라톤 나라
3. 한줄기 핏줄에 뻗어난 봉오리
영겁에 피리라 월계의 꽃송이
(후렴)
북을 울려라 거룩한 이름
드높은 이 나라 마라톤 나라

 

 

  1901년 함경남도 단천군 파도면 용성리에서 태어난 설의식은 21살 때 동아일보에 입사, 일장기 말소사건과 40년 강제폐간 시기를 제외하고 1947년 동아를 떠날 때까지 온 젊음을 동아에 바친 동아일보의 사람이었습니다. 

 

  “소오(小梧)가 어느 날 동아일보의 사주를 보았는데 풍파가 많을 운명이라는 괘가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필자 자신도 어렴풋이는 기억되거니와 당시의 통의동(通義洞) 근처에 속칭 백인(白人)이라는 머리와 살갗이 하얀 도사가 있었는데 소오가 동아일보의 운명을 개인의 경우로 하여 그에게 점을 쳤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주풀이로 적어 준 종이쪽지를 서재 서랍에 넣어 두었는데 우연히 그것을 본 모친이 행여나 다른 여자와의 관계에서 태어난 어린 아이의 사주가 아닌가 하여 오해하셨다는 것이다. 하루는 모친이 소오를 불러 앉히고 사실대로 이야기할 것을 다그치자 그것이 동아일보를 의인화하여 나온 괘라는 것이 밝혀졌고 비로소 소오의 모친도 한동안의 근심을 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동아일보에 대한 소오의 애착을 말해주는 이야기의 하나다.” (주요한, ‘한국언론인물지’, 한국신문연구소, 1981년, 429~430쪽) 

 

  “화동시대(花洞時代)―이것은 동아일보의 화동시대요 동아 기자로 있었던 필자의 화동시대를 의미합니다. 동시에 필자의 붓에 그려진 수견(隨見) 수문(隨聞) 수상(隨想)의 재료가 되었던 그 당시의 사회상인 것입니다. 기미 이후의 세태를 반영한 적활(敵活)의 대정년간(大正年間)이니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이겠습니다. 생각으로는 어제 그제와 같습니다마는 세월로 따져보니 역시 사반세기를 물러선 옛날입니다. 동아일보가 터를 잡았던 ‘화동’은 화동에서도 거의 막바지였습니다. 지금은 터마저 없으나 한말(韓末)에는 기호학교(幾湖學校)였고, 그 후에는 중앙학교였던 자리였습니다. 나는 이 학교에서 공부를 했었습니다. 늙은 포플러나무가 높다랗게 버티고 서 있는 그 언저리 옆방에서, 난생 처음으로 영어를 배울 수 있는 ‘서울 유학생’의 자랑을 맛보았습니다. 그 후 만세운동을 치르고, 동경생활을 거치고, 전라도 장성―두메골 조막학교의 교원생활로부터 서울로 불려와서 주저앉은 자리가 바로 중학생 시대의 그 자리인 동아일보의 그 자리였습니다. 여전히 포플러가 버티고 서 있는 그 방이었습니다. 중앙시대의 그 교실이 동아시대의 편집국이었고, 그때의 그 자리쯤이 사회부 자리였습니다. 야릇한 인연 같기도 하였습니다. 필자는 화동과 이 같은 숙연(宿緣)을 가지고 있습니다. 화동의 그 집과, 그 자리, 그리고 그 일터에 풍기는 시대적 감각에 심신이 완전히 파묻혔던 생생한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설의식, ‘화동시대’, 대한민보사, 1952년, 1~2쪽) 

 

  “소오 설의식은 현대적인 감각의 문장가였으며 수필가였고 직업적인 작가, 정치적인 문제들을 격조있게 논평한 논평가였다. 소오는 생활과 직업을 분별하지 않은 직업적 몰입의 부지런한 성격이었다. 그는 활기와 야망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가 옳다고 믿는 주장에 대해서는 끝까지 굽히지 않는 끈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한 성격 때문에 어느 경우에는 이단적인 주장으로 보이기도 하였고 그 때문에 약간의 오해를 받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소오는 뚜렷한 생애를 살고 간 많지 않은 사람 중의 하나라 하겠다. 언론인으로서의 20년이 넘는 생활 가운데 새한민보와 서울신문 고문으로 일하던 몇 년을 제외하고는 동아일보와의 관계 속에 살았던 셈이다. 소오는 부지런하고 성격이 깔끔하여 그 자신의 지난날에 관해 많은 글을 남기고 있다. 그만큼 소오는 생활에 충실하고 자기 글을 아끼었던 것이다. 그리 크지 않은 키에 안경을 끼고 있는 것이 매서운 데가 있어 보였다.”(주요한, ‘한국언론인물지’, 한국신문연구소, 1981년, 425~431쪽 발췌) 

 

  “소오 설의식의 문장은 원래 단문을 잘 쓰기로 이름 나 있었다. 그의 글이 촌철살인의 함축성과 포괄성을 지녔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던 일이었다. 동아일보의 단평난인 횡설수설은 원래 하몽 이상협이 창안한 것인데 하몽이 조선일보로 옮겨간 뒤에는 소오가 맡아 집필하였다. 당시 동아일보의 횡설수설은 조선일보의 ‘팔면봉(八面鋒)’, 중외일보의 ‘반사경’과 함께 다 이름있는 칼럼이었으나 동아일보의 것이 단연 뛰어나 독자의 인기를 집중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건(一件) 일평주의(一評主義)로 일관하였던 횡설수설은 동아일보의 상징이었고 알맹이였다고 하겠다. 또 그 글은 역대 편집국장이 맡아서 쓰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주요한, ‘인물론-소오 설의식’, ‘신문평론’ 1975년 8월호, 45쪽)

 

 

  “예전 편집국장 설의식(薛義植)은 사람이 옷차림은 수수한데 심술이 좀 있거든―나하고 언젠가 이놈 저놈하고 대판 싸움을 했지. 그게 언제든가 지금 만주 가있는 서범석(徐範錫)이 그 신문 편집국에 있을 때인데 어느 날 야근 때 공장에 판 짜러 들어갔다는 것을 좀 불러 달라고 전화했더니 웬 사내가 전화를 받는데 불친절하고 딱딱하기 한량없단 말이야. 저는 몹시 바쁜 모양인데 전화거니 성가시어 골을 잔뜩 낸 모양이야. 그래서 설왕설래 끝에 저쪽에서는 이년, 저년 하고 개진창으로 욕을 마구 퍼붓기에 나도 화나서 이놈, 저놈하고 한바탕 들이대었지. 싸우다가 ‘나는 복혜숙이다. 너는 대체 누구냐?’하고 물었더니 ‘나는 설의식이다’ 하겠지. 그 때 아뿔사 된 손에 걸렸구나 했지만 그냥 버티었지. 그 뒤에도 가끔 만나는데 만나면 욕 하다가 웃고 갈라지지. 알고 보면 퍽으나 상냥한 신사이나 좀 고집과 틀과 텀텀이 있어 탈이야.”(복혜숙(卜惠淑), ‘장안(長安) 신사숙녀 스타일 만평’, ‘삼천리’ 1937년 1월호, 105쪽) 

 

 

 동아일보 1954년 7월 22일자 2면
 설의식 씨 별세

소오 설의식 씨는 오래 전부터 숙환으로 가료 중이던 바 21일 상오 6시 반 시내 명륜동 1가 10의 2호 자택에서 별세하였는데 씨는 향년 54세이다. 씨는 함남 단천 출신으로서 일본대학을 졸업한 후 일제시 본보에 입사하여 사회부장 편집국장을 역임하였고 8.15 해방후 본보가 다시 발간되자 주간으로서 활동하였는데, 씨의 날카로운 필치는 세인으로부터 많은 호평을 받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씨의 저서로서는 ‘민족의 태양’ ‘충무공 진중일기’ ‘화동시대’ ‘치욕의 표정’ ‘통일조국’ 등이 있다. 

 

 

소오 설의식(小梧 薛義植)

 

 

댓글 한 개 »

  1. cafe303…

    34. 편집국장 설의식(薛義植) | 동네 :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트랙백 by cafe303 — 2016/06/09 @ 12:3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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