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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초대 편집국장 이상협(李相協)-상

Posted by 신이 On 5월 - 12 - 2016

 초대 편집국장 이상협(李相協) (1893-1957)-상

 

‘민족의 대표기관’을 자임한 「동아일보」가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출신 이상협을 편집국장에 선임한 것은 이상협만큼 편집부터 영업, 공장의 일까지 신문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신문 제작의 귀재로 불렸다(「동아일보」 1964. 4. 1).

 

  이상협은 보성중학과 관립한성법어학교를 나와 일본의 게이오(慶應)대학에 2년여 수학한 뒤 19세에 「매일신보」에 입사, 21세에 연파주임(軟派主任·한글전용 사회면 책임자), 25세에 편집장을 맡을 정도로 신문 제작에 뛰어난 소질과 기량이 있었다. 그는 3·1독립운동 관련 기사를 3월 7일자에야 3면에‘각지소요사건(各地騷擾事件)’이라는 2단 제목으로 보도할 수밖에 없었던 총독부기관지의 한계를 절감하고 얼마 후 사직했다.‘서기도 앉기도 어려웠던 샌드위치의 햄 같은’매일신보의 입장에서 벗어나 민간신문의 제작에 수완을 뽐내보고 싶은 기개가 가슴에 뭉친 것은 당연했다(백악산인.1938,43쪽).

 

 이상협은 「동아일보」창간과 관련해 김성수를 가장 유력한 투자가로 생각하고 교섭을 벌였다고 회고했다(최준,1976,333~334쪽).

 

“그래 교섭을 벌였는데 첫 번째 회답은 새로 시작한 사업 때문에(…교육사업) 어렵겠다는 얘기였다. 나는 크게 실망하였다. 왜냐하면 그를 노치면 또다시 좋은 사람을 얻기가 매우 힘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직장까지 버리고 나섰던 몸으로 그저 앉아만 있을 수는 없어 동분서주해 가면서도 또다시 그에게 재고할 것을 요청했던바 뜻밖에도 신문사업에 나서겠다는 김성수씨 측의 회답을 받아 용기백배하여 「동아일보」 창간에 노력했던 것이다.”(살아있을 때의 이상협 진술)

 

 당시 중간에 교섭을 벌인 사람은 중앙학교 교장 최두선이었다. 최두선은 40년 후 당시를 회상하면서 창간감독 유근과 함께 이상협을 창간 주창자로 꼽고 있다.“그 분(유근)하고 또 당시엔 젊었지만 신문계에서 이름 있는, 다시 말하면 편집경험이 있는 이상협 씨가 있습니다. 이씨는 편집이나 기술면에 경험이 있는 분입니다. 이분들이 권유하고 내가 다소 중간에서 심부름한 셈이지요. 김성수 씨에게 설명도 해드리고 요새로 말하면 사업계획서 같은 것도 이상협 씨가 만들어온 것을 말해 드렸지요.”(「동아일보」 1960.4.1.)

 

 「동아일보」 발행허가는 이상협 명의로 출원해 1920년 1월 6일 나왔다(「매일신보」1920.1.8.). 사이토(齊藤)총독의 취임 직후 그는 개인면담에서 총독에게 “민심의 동향의 전면을 정당히 표현하는 민간신문기관은 조선민중의 요구인 동시에 총독정치에도 또한 가장 필요한 것이 되지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했다고 한다(백악산인,1938,44쪽). 

 

 편집국장 이상협도 다른 창간 주창자들과 같이 논설반원이자 정리부장, 사회부장을 겸임했다. 국장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직접 취재에 나서 그 민완을 보였다. 3·1독립운동사건 제1회 공판에 직접 가서 공판기를 썼다.“물론 재판소 담위(擔位․담당)기자도 있었을 것이나 그러나 사건이 원체 천하의 이목을 끄는 것이라, 가능한 한도까지의 충실한 보도를 하기 위해서는 그 임(任)에만 적(適)하다면 마땅히  국장급의 인물이 출진하는 것도 그 공판의 성질로 보아 또한 그 격에 맞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백악산인, 45쪽)

   
<참고문헌>
 최준, 「한국신문사논고」, 일조각, 1976. 
 백악산인(1938), 복면객의 인물평, 권토재래의 이상협 씨, 「삼천리」 제10권 제12호(1938년 12월), 4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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